소설리스트

67화 (67/142)

제67화

“일단 개선식 때 월계관을 바친다는 계획은 제 머리에서 나왔어요. 아버지는 그 계획을 듣고 실행을 허락해 주셨죠. 제가 윈터펠에서 첩자 역할을 하길 바랐을 거예요. 물론 저는 아버지의 기대대로 움직여 줄 의사가 조금도 없답니다.”

“그렇다는 건, 아버지를 배신하겠다는 뜻인가?”

글렌의 표정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얼굴이다.

“이해가 되지 않는군. 나를 사랑한다고 했던 말이 거짓이라고 했으면서 대체 왜 아버지를…….”

나디아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건 제 가족을 증오하기 때문이에요.”

“…….”

“아버지도, 여동생도, 제게 절대 씻을 수 없을 잘못을 저질렀거든요. 저를 체스말처럼 이용한 뒤에 죽이려 했죠. 그래서 저도 똑같이 되갚아 주려고요. 저는 그들이 비참한 죽음을 맞길 원해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가족을 죽이려는 생각을…….”

“그건…… 떠올리기도 싫은 기억이라 말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요. 제가 공작 저에 계속 머물렀으면 죽었을 거라는 사실 하나만은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니 손끝이 차가워졌다.

그 커다란 저택에서 온전히 그녀의 편이라고 할 만한 인간은 단 하나도 없었다.

나디아는 뻣뻣한 손가락을 움직여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꼭 움켜쥔 손이 새하얗게 질려 가고 있었다.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는 우선 발라지트 가를 벗어날 필요가 있었어요. 그래서 당신을 선택했죠.”

“…….”

“발라지트 공작가를 증오하는 건 당신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우리는 좋은 동업자가 될 거예요. 저는 윈터펠이 발라지트와 맞설 수 있도록 더욱 부흥시킬 테고, 당신은 제게 윈터펠 후작 부인이라는 자리를 잠시만 대여해 주면 돼요.”

“대여?”

심상치 않은 단어에 글렌이 몸을 흠칫 떨었다.

후작 부인 자리를 잠시만 빌려 달라니, 그 말인즉…….

“네, 대여요. 모든 일이 끝나면 깔끔하게 떠나줄 테니까요.”

“떠……난다고?”

“반드시 이혼해 드릴게요. 저도 당신이 마음에 없는 여자와 얼결에 결혼하게 만든 것에 대해선 굉장히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거든요. 그러니 상황이 모두 정리되면 저와 이혼하고 다른 신부를 찾으세요.”

“…….”

“아 참, 그래도 위자료는 두둑하게 챙겨 주셔야 해요? 가문의 재산 증식에 제가 많이 기여한 거 알고 계시죠?”

나디아가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그리 덧붙였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하…….”

글렌은 한참 동안 멍하게 선 채로 자신이 들은 말을 정리해야 했다. 머릿속이 실타래처럼 엉킨 것만 같다.

그러니까…… 그녀는 자기 가족을 증오해서 집안을 빠져나오길 원했고, 동시에 그들에게 복수하길 원했다.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수단이 바로 저와의 결혼이었으리라.

윈터펠은 대대로 남부와 사이가 좋지 않고, 발라지트 공작과 대적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니.

“…….”

이제야 그간 의아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풀리는 기분이다.

입으로는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묘하게 제게 관심이 없는 것 같았던 태도.

자신을 유혹하는 것보다 영지를 발전시키는 데에 더 열중했던 행적들.

세인들은 나디아를 가리키며 사랑에 눈이 멀었다고 했지만, 글렌이 볼 때 그녀는 누구보다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복수하겠다는 목표를 위해 그녀는 최적의 수단을 찾아냈으며, 계획을 차례대로 진행시켰고, 또한 그 과정에서 사랑에 눈이 먼 여자라는 오명을 쓰는 것조차 꺼리지 않았다.

……그래.

그렇게 된 거였구나.

대체 자신의 무얼 보고 사랑에 빠졌는지 줄곧 의아했는데, 실상은 그러했구나.

이리저리 흩어졌던 퍼즐 조각이 하나로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누군가 뒤통수를 망치로 후려친 것 같았다. 정신이 어질어질해질 지경이다.

그가 날아갈 것 같은 의식을 겨우 붙잡으며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아래에서 그녀의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났어요?”

눈치를 살피는 듯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조심스레 눈동자를 굴리는 모습이 사랑스러우면서도 애처롭다. 그럼에도 글렌은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화가 났나?

나를 속였다고 화를 내야 하는 상황인 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뭐라고 딱 집어 말할 수 있는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사실 이성적으로 따져 보면 나로서는 나쁠 것 없는 이야기지.’

지금껏 수많은 성과를 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나디아는 매우 유능하다.

그렇게 유능한 사람이 자신과 공동의 적을 가지고 있다.

나디아의 능력은 발라지트 공작가와 대적하는 데에 필히 도움이 되리라.

공동의 적을 물리친 후에는 협업 관계를 정리한다. 나디아는 후작 부인 자리를 깔끔하게 포기하고, 글렌은 그녀의 성과에 걸맞은 위자료를 지급한다.

아주 간단하고 합리적인 이야기였다. 서로 이득을 주고받는 비즈니스 관계, 깔끔해서 좋지 않은가?

……그런데 심장에 찬바람이 몰아치는 것 같은 이 기분은 대체 어째서인지.

그때, 아래에서 나디아의 목소리가 재차 울렸다.

“저기, 글렌, 지금 숨 쉬고 있는 거 맞죠?”

“아.”

그제야 그는 자신이 숨 쉬는 것도 잊었다는 걸 깨달았다. 급하게 숨을 몰아쉬자 그녀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미, 미안해요. 그렇게 충격이었어요?”

“아니…… 아니다.”

“저도 본의 아니게 후작님을 기만한 것에 대해서는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머리가 멍한 와중에도 글렌은 이성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애썼다.

그녀가 진심으로 제게 반했다고 믿은 건, 또 주변인들 앞에서 그리 자신한 건 민망한 일이긴 하다.

하지만 만일 나디아가 윈터펠을 돕지 않았더라면 그는 지금쯤 이런 것보다 더욱 곤란한 난관에 직면해 있으리라.

수치심과 실질적인 이득을 맞교환했다고 생각하면 그리 억울할 것도 없었다.

그래.

감정을 앞세우지 말고 윈터펠의 영주로서, 가문의 이익과 명예만을 생각하라.

유능한 파트너를 얻었다는 건 오히려 잘된 일 아닌가?

생각을 마친 글렌이 목소리를 짜내다시피 하며 말을 이었다.

“내게 사과를 할 필요는 없어. 그대가 우리 가문을 많이 도와준 것도 있으니…… 등가교환했다고 생각하겠다.”

“!”

그러자 나디아의 표정이 햇살처럼 밝아졌다.

그가 진지하게 화를 내진 않을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일말의 불안감이 있었던 건 사실이었다.

걱정거리를 해결한 그녀가 글렌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흔쾌히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이 계약 관계가 상호간에 이득이 되도록 노력해 볼게요.”

“…….”

계약…… 관계…….

그 단어를 들으니 어째서인지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다.

그런 계약 남편의 속내를 조금도 짐작 못한 듯, 나디아가 밝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럼 잠자리나 합방 문제는 후작님 선에서 잘 정리되도록 부탁드려도 될까요?”

“응?”

“아, 물론 그것 때문에 오늘 고해성사를 한 건 아니고요……. 후작님도 내심 제가 부담되셨죠?”

“…….”

“혹시라도 제 고백을 받아 주지 않으셨다고 마음 쓰실 필요는 없어요. 그러니까 제 말은…… 괜히 제게 부채감 같은 걸 느끼실 필요가 전-혀 없다는 거예요. 저도 이득을 얻고 있는 상황이니까요. 서로 윈윈인 셈이죠.”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주옥같은 확인 사살이다. 글렌은 정말 절절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여자, 진짜 나한테 마음이 없구나…….

슬프게도, 이쯤 되니 정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제 용건은 이게 끝이에요. 후작님은 왜 저를 찾아오신 거예요?”

“뭐?”

“아까 저를 찾으러 오는 길에 마주쳤잖아요. 제게 할 말이 있는 거 아니었어요?”

그 말을 듣고서야 그는 자신이 원래 나디아를 찾아갔던 이유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녀에게 먼저 발언권을 준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글렌이 무너지려는 표정을 겨우 다잡으며 입을 열었다.

“별것…… 아니다. 영지 일에 관한 용건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나 혼자 처리할 수도 있을 것 같군.”

“뭔데 그래요? 말해 봐요. 이왕이면 혼자보단 두 명이서 고민하면 더 좋죠.”

얼핏 듣기에는 애정을 기반으로 한 세심함 같았지만 글렌은 이제 안다.

저건 비즈니스 파트너로서 함께 문제 상황을 해결하자는 의미일 뿐이라는 걸…….

“……바쁜 일도 많을 텐데 굳이 내가 하나 더 추가할 필요는 없을 테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내 선에서 해결해 보겠다.”

“정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고요.”

나디아가 빙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걱정거리를 하나 덜어서 매우 가뿐한 표정이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요. 서로 잘해 봐요.”

“…….”

글렌이 제 앞에 내밀어진 손을 바라보았다. 비즈니스 파트너를 향한 인사이리라.

복잡한 감정이 휘몰아쳤지만 고민할 여유는 길지 않았다. 그는 곧장 내밀어진 손을 마주잡았다.

“나 역시…… 잘 부탁하지.”

“얘기가 잘 통해서 좋네요. 그럼 저는 먼저 가 봐도 될까요? 업무가 밀려 있어서요.”

글렌이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억지로 목소리를 짜내듯 말했더니 더는 대답할 힘이 없었다.

“나중에 식사할 때 다시 봐요!”

그러더니 가벼운 발걸음으로 총총 걸어가 버린다.

글렌은 그녀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멍하게 서 있어야 했다.

아니, 사실은 그녀의 모습이 사라진 후에도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표현하는 쪽이 옳으리라.

“…….”

망부석처럼 우뚝 서 있는 그의 머리 위로 따뜻한 햇볕이 내리쬔다.

날씨는 따뜻하다 못해 더운데, 어째서인지 몸은 점점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심장에 구멍이 뻥 뚫린 듯 허하다. 알 수 없는 상실감이 가슴을 가득 메웠다.

‘이건 나에게도 이득인 거래일 텐데…….’

머리로만 생각해 보면 이런 기분이 들 이유가 없었다.

혹시 제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계약상의 맹점이 있는 건 아닐까? 본능적으로 실수를 알아차렸기 때문에 찬물을 맞은 듯한 기분이 드는 건 아닐까?

글렌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선 채로 제가 깨닫지 못한 부분이 무엇일지 고민했다.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다리가 저려올 때쯤에서야 그는 마침내 깨달을 수 있었다.

재잘재잘 떠드는 나디아와 이야기할 때는 괜히 기분이 좋았던 이유.

예쁘게 치장한 모습을 볼 때면 조금씩 심장이 뛰었던 이유.

다른 여자와 후사를 보라는 말에 심사가 뒤틀렸던 이유.

그건 자신이 스며들 듯 나디아에게 빠졌기 때문이다. 사랑을 하고 있었던 건 그녀가 아니라 자신이었다.

글렌은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도 최악의 타이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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