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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65/142)

제65화

일단 얼마 전 본채의 가구를 새것으로 바꾸었으니 낡아서 부서진 것은 아니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글렌이 멀쩡한 가구를 부쉈을 가능성도 없었다. 그가 왜 자기 집안 살림을 깨부순단 말인가?

‘원래 불량품이었나?’

남은 가능성은 그것뿐이었다. 아무래도 다음부터는 거래처를 바꾸어야 할 듯싶다.

당황한 것은 나디아뿐만이 아니었는지, 곧이어 깜짝 놀란 선후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저게 왜…… 갑자기 금이 간 게냐?”

“살 때부터 불량품이었나 봐요.”

“제 잘못입니다. 제가 좀 더 꼼꼼히 살펴야 했는데…… 다음부터는 더욱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새 테이블을 주문해야겠군요.”

세 사람이 금 간 테이블을 바라보며 그리 대화를 나누었다.

고든이 글렌을 바라보며 묻는다.

“후작님, 손을 긁히지는 않으셨습니까?”

“아…… 괘, 괜찮다.”

“다행이군요.”

글렌 역시 당황한 기색은 마찬가지였다. ‘조금’ 힘을 줬다고 책상에 금이 갈 줄이야.

그의 시선이 부서진 테이블과 제 오른손을 빠르게 오갔다.

‘젠장, 갑자기 손에 힘이…….’

첩을 들이라는 나디아의 권유를 듣는 순간, 뒷목에 피가 오르는 것 같더니 자연스레 손에 힘이 들어가 버렸다.

본인도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이유 없이 화가 나고 속이 뒤집히는 것만 같다.

그때,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선후작이 입을 열었다.

“가만…… 우리가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지?”

“후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지금 가구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지. 글렌, 대체 무슨 소리냐? 후계를 낳을 생각이 없다고? 저 말이 진실이냐?”

“그게…….”

글렌의 이마에 살짝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

“좋아. 사랑한다는 거짓말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두고 보지.”

“하지만 내 아내로 인정받을 망상 따위 꿈에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내가 발라지트의 딸에게서 후사를 볼 일은 영영 없을 테니.”

머릿속으로 자신의 목소리가 재생된다.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잡아떼기에는 증인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하객들만 해도 수십 명은 넘어갈 것이다.

심지어 그따위 말을 했던 건 결혼식을 올린 당일이었다. 이쯤 되니 서재의 벽에 머리를 박고 싶어진다.

시시각각 변하는 아들의 표정을 목격한 아이작이 탄식을 터트렸다.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 저 얼굴을 보니 안 들어도 될 것 같다.

“정말 그따위 말을 했나 보구나. 한 가문의 당주가 후사를 보지 않겠다니, 제정신인 게냐? 형제도, 살아 있는 사촌도 없는 놈이!”

그야 예전에는 나디아가 발라지트 공작의 세작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나디아가 아이작을 말리기 위해 나서서 입을 열었다.

“진정하세요, 아버님. 꼭 정실 소생이 아니어도 되잖아요. 일단 저부터가 적녀는 아닌걸요!”

푸욱!

그녀의 말이 화살이 되어 글렌의 가슴에 박혔다.

그의 몸이 살짝 휘청거렸다. 아까부터 쓰리던 속이 더욱 쓰려오는 느낌이다.

하지만 아들의 반응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아이작은 나디아와 대화를 이어 나갔다.

“아니, 멀쩡한 정실이 있는데 왜 첩실에게서 후계를 본단 말이냐? 남부보다는 덜하다지만 북부에서도 적서를 차별하는 기조는 남아 있다. 무엇보다 너도 다른 이의 아들을 후계로 키우고 싶진 않을 것 아니냐?”

“물론…… 저도 아쉽긴 하지만 후작님의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저는 뜻에 따르는 수밖에요.”

나디아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화살처럼 글렌에게 날아왔다.

제발 이 얘기는 그만해 달라고 매달리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의 바람이 무색하게도, 나디아는 오히려 한술 더 뜨기만 할 뿐이었다.

“원하시는 여인이 있다면 제가 알아볼게요.”

“뭐, 뭐?”

“……!”

모두의 입이 경악으로 벌어지는 순간이었다.

남편의 첩을 너그러이 눈감아 주는 게 이 시대 귀부인들에게 강요되는 미덕이긴 했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일 리 없었다.

특히나 남편을 열렬히 사랑하고 있다면 더더욱.

제게 꽂히는 경악에 찬 시선에 나디아의 눈동자가 도륵 굴러갔다.

‘음…… 마지막 말은 너무 나갔나?’

후계 문제를 제게 닦달하지는 말라는 뜻으로 한 말인데,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보였던 모습과 조금 어긋나는 것 같기도 하다.

사랑하는 남편에게 이리 덤덤하게 첩실을 권유하는 여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더 곤란한 상황이 오기 전에 자리를 뜨는 게 좋겠다.’

불리할 땐 자리를 피하는 게 최선이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장부를 야무지게 챙겨 든 후, 살짝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그럼 용건은 끝난 것 같으니,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러고는 서둘러 서재를 나서 버린다. 마치 도망치는 것 같은 태도라, 미처 붙잡을 새도 없었다.

달칵.

순식간에 방 안에는 세 남자만이 남게 되었다.

“아니, 저, 저…….”

선후작이 닫힌 문을 가리키며 채 문장이 되지 못한 단어만 내뱉는다.

착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그 누구 하나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나디아가 도망치듯 자리를 떠난 이유야 명확했으므로.

세 사람이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상심이 너무도 크시구나!’

‘서, 설마 우는 건가?’

‘심통난 걸 알아 달라는 게지!’

지금껏 가문을 먹여 살린 복덩이가 토라졌다는데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아이작이 아들에게로 홱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어쩌다 그런 말이 나온 게야?”

“그게…… 그 당시에는 정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발라지트 공작이 보낸 첩자라고 생각한 탓에……. 설마 그 말을 아직 마음에 담아 두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럼 지금은 마음이 바뀌었고?”

아버지의 질문에 그의 얼굴색이 살짝 붉어졌다.

“……예.”

“그럼 당장 가서 오해를 풀면 될 일 아니냐! 말은 저렇게 해도 정말 첩을 들이라는 뜻일 리 없다. 골이 난 걸 알아 달라는 거지. 어서 가서 상심했을 마음을 풀어 주거라.”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고든마저 고개를 끄덕이며 거든다.

“지금까지는 줄곧 마님께서 먼저 손을 내밀지 않으셨습니까?”

“…….”

“이제 후작님께서 먼저 다가가실 차례 아닌가 싶군요.”

그 말이 백 번 옳았다.

글렌은 대답하는 대신 침묵을 지켰지만, 이제는 자신의 행동이 변화해야 하는 때라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지금까지 그가 그녀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었던 건, 그녀의 아버지인 발라지트 공작이 어머니를 죽였다고 오해했기 때문 아닌가?

이제 더 이상은 그녀를 밀어내야 할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문제는, 이 꼬인 실타래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겠지.

‘일단, 피로연에서 했던 말은 의심이 풀리지 않은 탓에 해 버린 실언이라고 사과하자.’

그 당시에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니 이해해 주지 못하지는 않으리라.

그리고…… 네 얼굴은 자기 취향이 아니라고 했던 말도 절대 본심이 아니었다는 말도 해야겠지.

그런 거짓말을 했던 이유를 해명하면서, 이제는 너와 연인이 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사라졌다고 설명하면 필히 기뻐할 것이다.

앞으로 그대와 같은 마음이 되도록 노력해 보겠다는 말까지 덧붙인다면? 너무 기쁜 나머지 활짝 웃으며 안겨 들지도 모른다.

사람 마음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 법이라지만 얼굴 맞대고 살다 보면 정이 붙지 않겠는가?

‘원래 정략결혼이라는 게 다 그렇지.’

그의 부모님도 시작은 정략결혼으로 맺어졌으나 채 1년도 되지 않아 잉꼬부부가 되었다고 들었다.

부모님도, 조부모님도 했던 일을 그라고 못할 것 같지는 않았다.

뛸 듯이 기뻐하는 나디아의 모습을 상상하니 어쩐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글렌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간다.

그 모습을 발견한 선후작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웃어? 지금 웃음이 나올 상황이더냐?”

“제가 잘 말해서 해결하겠습니다. 아버지는 걱정하지 말고 몸조리에 힘 써 주십시오.”

“허어?”

이것 보게? 그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부부 사이의 일은 끼어들지 말라 이거냐?”

“두 분의 젊을 적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외조부님께서 혼사를 추진하셨을 때 어머니가 싫다고 하셨다지요. 적어도 저는 아버지보다는 나은 상황 아닙니까? 그러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일단 결혼 자체를 반대했던 어머니와 달리, 나디아는 제게 열렬하게 반해 있는 상황이니 말이다.

“이, 이놈이?”

아들의 도발에 다소 창백했던 선후작의 얼굴이 금방 붉게 달아올랐다.

아버지의 안색을 발견한 글렌이 이크,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더 앉아 있다간 불호령이 떨어지겠군.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푹 쉬시지요.”

“저, 저…… 이 건방진 놈 같으니!”

“아버지도 하셨으니 저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이……!”

등 뒤에서 욕지거리가 들려왔지만 가뿐하게 무시했다. 지금 중요한 건 아버지와 실랑이를 벌이는 게 아니다.

아버지의 고함 소리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글렌의 머리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당장 오늘 말해야 하나? 아니면 내일?’

서재를 나서는 글렌의 발걸음이 근거 없이 자신만만했다.

* * *

같은 시각.

본채 건물을 벗어난 나디아는 정원에 앉아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었다.

‘어떡하지…….’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위기였다.

일단 오늘은 글렌이 과거에 했던 말로 얼렁뚱땅 넘어갔지만 같은 방법이 또 통하리라는 법은 없었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으니 마음이 바뀌었다고 하면 거절할 명분이 없는 것이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 위기를 넘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디아가 한숨을 푹 내쉬며 생각했다.

‘그냥 솔직히 털어놓아야 하나…….’

개선식 때 그에게 고백했던 것은 아버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연기했던 것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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