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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64/142)

제64화

“그러니까 그 발라지트 공작의 딸이…… 흑사병이 돌 것을 예상해 치료제를 사들여 되팔고, 발롱 성을 점령할 계책을 내고, 점령지를 안정화시키고, 드래곤 레어의 위치를 찾고, 새 발명품을 기병에 도입하고, 농기구를 개량시키고, 새로운 농법을 고안해 냈으며, 그레이스의 죄목을 밝혀냈다는 뜻이냐?”

하나하나 일일이 말하자니 숨이 찰 정도였다. 살짝 숨을 헐떡이는 아버지에게 글렌이 대답했다.

“깔끔하게 잘 정리하셨습니다.”

“허어…….”

직접 듣고도 믿기지가 않는다.

글렌의 설명을 듣는 내내 그는 제대로 말하고 있는 게 맞느냐고 몇 번이고 되물어야 했다.

한 명의 귀족 여인에게 그만한 재주가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더 놀라운 건 그녀가 정적의 딸이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 모든 일을 해냈던 이유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예.”

글렌이 민망하다는 듯 시선을 피한다. 그 틈을 타 집사가 얼른 끼어들었다.

“도련님…… 아니, 영주님께 첫눈에 반했다고 합니다. 하긴 우리 영주님이 미남이긴 하지요.”

“제 어미를 닮은 게지.”

제 아들이지만 겉모습 하나만큼은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하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이해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글렌은 민망한 나머지 괜히 헛기침을 해야 했다.

“아무튼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나디아는 절대 발라지트의 첩자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녀는 윈터펠의 절대적인 아군이니 경계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구박이라도 할까 봐 미리 선수를 치는 것이렸다?”

“그런 게 아니…….”

발끈하여 반박하려던 글렌이 말끝을 흐렸다.

나디아가 괜히 상처받는 일이 없도록 방비하는 게 이 기나긴 설명의 목적 아니었던가? 그런고로 아버지의 표현이 딱히 틀린 것은 아니다.

“하아…… 젠장, 예. 맞습니다.”

“아버지 앞에서 욕지거리라니 이 고얀 놈 같으니라고.”

선후작, 아이작이 킬킬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나디아 쪽이 먼저 매달렸다고는 하지만, 지금 보니 짝사랑은 아닌 모양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똑똑.

한적한 방 안에 노크 소리가 들려온다. 세 사람의 시선이 문가로 돌아갔다.

“고든, 가서 확인해 보도록.”

“예.”

고든이 문을 향해 걸어갔다. 열린 문틈 사이로 방문객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방금까지 화제에 올랐던 나디아였다.

“들어오너라.”

조심스레 걸어 들어온 그녀가 글렌과 아이작 앞에 선다. 나디아는 살짝 무릎을 굽히며 인사했다.

“몸은 이제 괜찮으신가요?”

“이전보다는 많이 나아졌다. 다 네가 그레이스의 악행을 밝혀 준 덕분이지. 그래, 무슨 일로 찾아온 게냐?”

“이걸 보여 드리려고요.”

“……?”

나디아가 내민 것은 다름 아닌 장부였다. 자금의 흐름이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는 장부.

아이작은 장부를 휘리릭 훑어보다가 다시 그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걸 왜 제게 주느냐는 듯한 시선이다.

나디아가 얼른 대답했다.

“그동안 윈터펠 가의 상황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궁금해하실 것 같아서 가져왔어요. 살펴보시고 의아한 부분이 있다면 언제든 물어보셔도 괜찮아요.”

“아, 잘했다. 마침 궁금하던 차였거든.”

아들에게서 재정 상태가 양호하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선뜻 믿기지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아는 윈터펠은 부유함과 백만 광년 정도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당주일 때도 그러했고, 그의 아버지가 가주의 자리를 지킬 때도 그러했다.

이 척박한 땅에 원정과 흉년까지 겹쳤는데 돈이 남아돌 리가 없…….

“으음?”

장부를 살피던 선후작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아니…… 이럴 리가 없는데?’

이 가문의 장부에서 절대 존재할 리가 없는 숫자가 적혀 있다. 그는 눈을 비비고 다시 장부를 살펴봐야 했다.

몇 번을 다시 봐도 숫자가 그대로다. 심지어 앞에 마이너스(-)가 붙어 있지도 않았다. 빚이 아니라는 뜻이다.

‘저, 정말 이게 우리 가문 재산이라고?’

믿을 수가 없는 현실 앞에서 그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경악에 찬 눈이 부릅뜨인다.

그런 아버지의 반응을 지켜보던 글렌이 말했다.

“믿기 힘드시면 지금 창고로 가 보시지요. 금은보화가 그득하게 쌓여 있을 겁니다.”

“허, 허허…….”

너무 놀란 나머지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그가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이건…… 이건 정말…….”

“아버지, 잘 안 들립니다.”

그러자 웅얼거리던 목소리가 크기를 키웠다. 선후작이 우렁차게 외친다.

“예술이구나! 이건 예술이야!”

“…….”

숫자의 조합이 이런 감동을 줄 수 있다니.

너무 감동적이라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다. 이런 게 예술이 아니라면 무엇이 예술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장부를 조심스레-예술 작품이니까- 테이블에 올려놓은 후, 나디아의 양손을 덥석 붙잡았다.

“글렌에게 얘기는 들었다. 네가 이 돈을 다 벌어들였다지?”

“저 혼자만의 공은 아니고…… 모두의 협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겸양 떨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러했다. 개인 혼자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하지만 글렌에게서 나디아의 활약상을 생생하게 전해 들은 그의 눈에는 그저 더욱 기특해 보일 뿐이었다.

그런 공을 세우고도 겸손하게 행동하다니. 아들놈이 배우자 복은 있는 모양이다.

“그래도 네 공이 제일 크지 않으냐? 수고했다. 정말 수고했어.”

어느새 그녀가 철천지원수의 딸이라는 건 머릿속에서 잊힌 지 오래였다.

금고의 잔액을 저토록 예술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며느리라면 발라지트 공작의 딸이 아니라 아들이어도 받아들여야 할 판국이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요.”

한편, 차분하게 웃고 있는 나디아의 머릿속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벌써 공략 끝났네.’

평생 척박한 영지를 꾸려온 사람이니 돈이 없는 것만큼 가슴에 사무친 일이 또 없으리라.

그녀는 그리 판단하곤 그에게 장부를 가져다주었고, 결과적으로 매우 훌륭한 결정이었다.

고인물 중의 고인물을 제 편으로 끌어들였으니 이제 이 영지에서 그녀를 막을 수 있는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디아는 승리를 확신하며 마음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아이작의 다음 말이 들려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항상 내 다음 대가 걱정이었는데 이제 한시름 덜었구나. 너희들이 이리 잘해 낼 줄이야……. 허허, 이제 난 후계자가 무사히 태어나는 것만 확인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예?”

그냥 지나치지 힘든 단어에 그녀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후…… 계자요?”

“그래, 영지와 가문이 안정되려면 후계자가 있어야 하는 법이란다.”

“…….”

나디아의 난처한 표정에 아이작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저런 반응이지?’

대귀족 가문의 자제 둘이 정략결혼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아이를 낳아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게다가 나디아는 글렌을 너무나 사랑해서 머나먼 북부로 오는 걸 자청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글렌 역시 제 아내에게 마음이 없는 건 아닌 듯하니 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왜 그러느냐?”

“…….”

“…….”

“…….”

나디아, 글렌, 그리고 집사장 고든이 서로 난감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아들 부부는 결혼 첫날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같은 침대를 쓴 적이 없노라고…….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난처하게 눈알을 도륵도륵 굴리던 나디아였다.

“그게…… 아이를 낳는 건 조금 힘들 것 같습니다.”

“아니, 왜? 설마 몸이 안 좋은 것이냐? 허어, 지금 보니 너무 말랐구나. 이렇게 가녀려서는……. 식사는 제대로 챙겨 먹고 있고?”

“아뇨, 그게 아니라…….”

여기서 어영부영 넘어갔다간 정말 얼결에 글렌과 잠자리를 하게 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사실 잠자리를 하는 것까지야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아이라도 생긴다면?

말 그대로 참사 중의 대참사였다. 언젠가 그녀는 글렌과 이혼해야 할 몸 아닌가? 말이 나왔을 때 확실히 선을 그어 둘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도 이럴 때 쓰기 좋은 구실이 있지.’

나디아가 처연하게 시선을 내리깔곤 말을 이었다.

“그게…… 어떻게 된 일이냐 하면…….”

“그래, 그래. 말해 보거라. 무슨 사정이 있다고 해도 다 이해해 주마.”

“후작님께서 저와 합방을 할 의사가 없다고 하셨거든요.”

“……뭐?”

일부러 ‘후작님’이란 단어에 힘을 줘서 말했다.

아이를 안 낳는 건 네 아들 탓이지 내 탓이 아니다, 뭐 그런 의도였다.

물론 그렇다고 후계자 생각이랑 하지도 말라는 뜻은 아니다.

귀족 가문에서 후계를 보는 것은 꽤 중요한 문제였으므로, 나디아도 선후작이 아이를 독촉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그 후계자를 꼭 자신이 낳아야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후계를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첩을 들이는 수밖에…….”

그런데 그때였다.

콰직.

무언가 으스러지는 소리에 나디아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그러자 남편이 짚은 테이블의 한 구석에 금이 간 모습이 보인다.

아니, 저게 갑자기 왜 부서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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