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화
며느리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지진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아니, 생각해 보니 결혼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이긴 하지.’
이제 글렌도 엄연히 작위를 물려받은 가주이니 아내를 맞이하고 후계를 낳는 것이 옳다.
겨우 정신을 다잡은 그가 나디아를 향해 물었다.
“그, 그래, 반갑구나. 어느 가문의 누구이더냐?”
으레 하는 인사말이 아니라 정말 궁금했다.
주요 가신들이나 주변 영주들의 여식 중에 저런 얼굴을 본 기억은 없었던 것이다.
침대맡으로 쪼르르 걸어온 갈색머리 여자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발라지트 공작가의 장녀, 나디아입니다.”
“뭐?!”
그만 놀라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었다. 그의 입이 다시 쩌억 벌어진다.
“바, 발라지트?”
“예, 발라지트 공작님이 제 부친 되시지요.”
“…….”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윈터펠과 발라지트 사이에 혼사가 이루어질 수 있었단 말인가?
‘아들놈아, 이 상황에 대해 나를 납득시켜 보아라.’
설명을 바라듯 아들을 쳐다보았지만 글렌은 그저 슬쩍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그러더니 웅얼거리듯 한마디를 덧붙인다.
“이것도 설명 드리자면 깁니다. 일단 몸을 추스르시면 차차 설명 드리겠습니다.”
“아니, 대체…….”
아무리 세상일이라는 게 급변한다지만 이건 빨리 바뀌어도 너무 빠른 것 아닌가?
얼떨떨해하는 아이작에게 아들이 약탕을 건네주며 말했다.
“그럼 푹 쉬십시오. 저희가 생각이 짧아 부산스레 몰려온 것 같군요.”
“……다시 머리가 아파오는구나. 네 말대로 조금 쉬는 게 낫겠다.”
글렌은 아버지가 약을 마시는 걸 확인한 후에야 병실을 빠져나왔다.
선후작님께는 아직 휴식이 더 필요하다며 주치의가 사람들을 내쫓았기에, 다른 이들도 함께 글렌의 뒤를 쫓아야 했다.
그가 닫힌 병실의 문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버지께 설명 드릴 일이 많겠군.”
“그래도 나쁜 소식은 없지 않습니까? 차근차근 설명 드리면 그분도 이해하실 겁니다.”
“그래야겠지…….”
부디 새로운 갈등이 생기지 않으면 좋으련만.
난처한 듯 한숨을 내쉬는 그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아까부터 커다란 알을 들고 있던 기사였다.
“영주님, 이 알은 어떻게 할까요?”
“아.”
꽤 무게가 나가는 것을 계속 들고 있다 보니 안색이 창백하다. 그는 다른 이에게 대신 들어주라고 명한 뒤 말을 이었다.
“나디아에게 주기로 했으니 내가 결정할 일은 아니지.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어라, 제가 정하는 건가요?”
졸지에 결정권을 넘겨받게 된 나디아가 눈을 깜박였다.
저걸 대체 어떡한담?
문제의 알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글렌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그걸 몇 번 반복한 그녀가 마침내 결정지었다.
“희박한 확률이지만 정말 깨어날 수도 있으니 따뜻하게 보관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안채의 창가에 놔두려고요. 볕이 잘 드니까 따뜻하겠죠.”
사실 드래곤 알이 달걀처럼 따뜻해야 부화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해츨링이 껍질을 깨고 나오면 신기한 일이고, 아니면 말고. 그녀는 큰 기대를 걸지 않기로 했다.
기사 한 명이 농담하듯 말한다.
“정말 알이 깨면 어쩌죠? 드래곤을 키워야 하는 겁니까?”
“어쩌면 길들일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되면 드래곤 라이더가 되는 건가요? 아니, 드래곤 테이머인가? 하하하!”
“와, 그런 걸 타고 다니면 어떤 기분일까…….”
“너희들, 괜한 기대 그만 해라. 그냥 와이번 알일지 어떻게 알아?”
“하지만 그런 것치곤 너무 곱게 보관이 되어 있었다고요. 보는 순간 확신했습니다. 아 저건 용의 알이구나, 하고요.”
“용이 죽은 이후로 오랜 시간 방치된 레어였다며. 설령 진짜 드래곤의 알이더라도 지금까지 살아 있을 리가 없지.”
“에이, 그냥 희망 사항인 거죠. 신기하잖아요?”
그때,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사람들 틈으로 집사추가 고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굉장히 묘한 목소리였다.
“이거 참 공교롭군요.”
“음?”
글렌이 옆을 돌아보았다. 그곳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의 고든이 서 있었다.
“뭐가 말인가?”
“방금 수도에서 도착한 소식인데, 선후작님이 깨어나신 바람에 전하는 것이 늦었습니다. 남부의 독룡 가다비라가 토벌되었다고 하는군요.”
“잘됐군. 남부 지역 주민들을 괴롭히는 골칫거리 아니었던가?”
“예, 그런데…….”
집사가 말끝을 흐리며 잠시 머뭇거린다. 하지만 나디아는 고든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을 알고 있었다.
“발라지트 공작의 수하, 이지호 경이 그 드래곤 슬레이어라고 합니다.”
“그자가?”
결국 그쪽 일은 과거에서 일어났던 그대로 진행된 모양이다.
나디아가 시선을 내리깔며 과거의 일을 상기했다.
칼라아이 원정으로 어느 정도 명성을 얻긴 했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떨치게 되는 건 독룡 가다비라를 토벌한 이후였다.
‘거기다 악마족과의 전쟁에서 영웅이 되지.’
그건 지금으로서는 미래의 일.
앞으로 일어날 일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는 그녀의 귀에 착잡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신이 났겠군.”
“후작님의 명성에 대항할 대응자가 탄생한 셈이니까요. 어떻게든 그를 영웅으로 치켜세우려 할 겁니다.”
“예견된 수순이지.”
실제로도 발라지트 공작은 수하의 영웅담을 부풀리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직접적으로 윈터펠에 해가 되는 일은 없지만 정적에게 호재가 생겼다는데 축하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그가 수도에서 공작이 벌이는 짓을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영지의 힘을 기르는 것뿐. 쯧, 하고 혀를 찬 글렌이 말을 이었다.
“그쪽에서 무슨 짓을 벌이건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면 된다. 각자의 본분에 충실하도록.”
“예!”
하지만 일이 그리 간단치만은 않을 거라는 걸, 그 역시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 * *
“이거, 이거, 가다비라 토벌의 주역 아니신가? 용을 토벌한 영웅께서 이런 누추한 자리까지 찾아와 주다니 이거 참 영광이군.”
“장난은 그만둬 주십시오, 공작님.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발라지트 저택의 그레이트 홀.
산더미처럼 쌓인 노획물 앞에서 공작이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이 과장된 환희는 독룡의 토벌에 오래간만에 들려온 희소식이기 때문이라.
실제 공적보다 더욱 부풀림으로써 자신의 체면을 세운다. 흔히 쓰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지호는 그런 속셈 따위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듯 가슴에 주먹을 올려 예를 표했다.
“토벌대 27인, 공작님께 귀환을 알립니다.”
“잘 돌아왔네.”
발라지트 공작이 기분 좋다는 듯 연신 웃음을 터트렸다.
과장되게 기쁜 척을 하고 있긴 하지만 실제로도 그는 꽤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자신이 후원한 기사의 성공은 제 안목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증거이며, 세력을 넓힐 발판이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홀 안에 가득 쌓여 있는 금은보화는 또 어떻고.
‘발롱 성 인근에서 빈 레어가 발견되었다고 했을 때 어찌나 속이 쓰리던지.’
무혈 입성한 윈터펠에 비하면 약간의 희생이 있었지만,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명예를 얻었으니 이쪽이 처지는 모양새는 아니다.
흐뭇하게 웃은 그가 이지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고생이 많았겠군.”
“아닙니다. 공작님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이뤄내지 못했을 겁니다.”
빈말은 아니었다. 병사들과 레인저, 그리고 자금을 지원한 건 그의 가문이었으니.
“어디 보자……. 뭐 바라는 건 있나? 국왕 폐하께 청을 드려 귀족 작위를 하사해 주면 되겠나? 원하는 건 뭐든 말해 보게.”
“…….”
내가 원하는 것? 그건 이미 당신이 빼앗아 가버렸잖아.
하지만 그리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지호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제가 받을 포상금으로 전사자들의 가족에게 위로금을 지급하는 걸 허락해 주십시오.”
“이 사람아, 그건 당연한 일이고. 그런 거 말고 자네가 받고 싶은 걸 말해 보라니까? 하여간 우직해서는…….”
정확히 말하자면 우직하고 충성스러운 척만 하는 거지만, 여하튼.
발라지트 공작이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이런 기회는 흔하게 오는 게 아니야. 시간을 줄 테니 잘 생각해 보게.”
“감사합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자네에게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네.”
“……?”
이지호의 고개가 의아한 듯 살짝 기울었다.
나디아를 대신할 영애를 연결해 주겠다더니 설마 이 자리에서 소개시켜 주려는 건가? 그런 거라면 사양하고 싶다.
하지만 그의 예상이 무색하게도 공작이 가리킨 장소에 서 있는 것은 훤칠한 남자였다.
옅은 갈색 머리카락에 푸른색 눈. 나이는 이십대 중후반쯤 되었을까? 이목구비가 묘하게 공작과 닮아 있었다.
의아해하는 그의 귓가에 정답이 들려왔다.
“내 조카 에이든이지. 올해 학술원을 졸업하고 수도로 돌아왔다네.”
아, 역시. 친척이었구나. 이지호의 시선이 탐색하듯 그를 훑는다.
딸밖에 없는 발라지트 공작이 양자로 들여 작위를 물려줄 생각이라던 조카가 이 남자인 듯했다.
갈색머리 남자, 에이든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만나서 반갑군요. 에른스트의 에이든입니다. 지호 경의 명성은 머나먼 학술원에도 전해 들었습니다.”
“이지호입니다. 부족한 몸이지만 공작님의 후원을 받고 있습니다.”
이지호가 에이든의 손을 마주잡으며 인사했다. 차기 공작이라면 잘 지내 둬서 나쁠 것 없다.
첫인상이 좋으면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법. 그가 호인 같은 미소를 지으려는 순간이었다.
“역시 듣던 대로 훌륭한 기백이군요. 공작님이 제 사촌 여동생과의 혼사를 고민하셨을 만도 합니다.”
“…….”
그가 말하는 사촌 여동생이 누구인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뻔하다.
나디아 발라지트.
한때 저와 혼사가 오갔던 여자를 떠올리는 순간, 날카로운 것이 속내를 할퀴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표정이 와르르 무너질 것만 같다. 마주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그는 안간힘을 써야 했다.
‘웃어. 웃어.’
기분이 상한 걸 숨기는 것은 그가 이 세계에 와서 가장 먼저 배운 처세술 아니었던가?
이지호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미소 지었다.
“좋게…… 봐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런 표정으로 상대의 손을 으스러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 누가 짐작할 수 있을까?
웃는 낯으로 첫 인사를 나눈 두 젊은이의 어깨를, 공작이 호탕하게 웃으며 두드렸다.
그가 유용하게 사용할 수족들이자, 먼 훗날 발라지트 가문을 견인할 인재들이다. 기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가 격려하듯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자네를 대접하기 위해 포르네아 814년산을 준비해 놓았네. 에이든, 너도 함께 따라와라.”
“포르네아 814년산이라니, 지호 경을 정말 아끼시나 봅니다.”
이지호가 마음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포르네아 814년산이고 나발이고, 지금 그에게 필요한 건 혼자 분을 삭일 시간이었다.
“지호 경, 이거 정말 보통 물건이 아니에요. 오늘 맛보시지 않으면 분명 죽을 때까지 후회하게 될 겁니다.”
“……그런 귀한 물건을 제게 주셔도 되는 겁니까?”
“경은 공작님이 가장 아끼는 가신들 중 하나 아닙니까? 자, 자. 얼른 가시죠.”
언제는 제게 선택지가 존재했는가?
이지호는 억지로 웃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러운 얼굴로 공작의 뒤를 따랐다.
윈터펠 선후작이 깨어나기 며칠 전 있었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