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화
“하면 그 범인이 가문 내부에 있다는 건 어떻게 짐작하셨습니까?”
“사고가 일어났던 날, 글렌만이 늦게 출발하는 바람에 불미스러운 일을 면했다고 들었어요.”
“예, 그랬지요.”
“그렇다는 건 원래 계획대로라면 글렌까지도 함께 죽이려 했다는 의미예요. 영주 부부와 후계자까지 함께 죽여서 얻을 수 있는 이익…… 작위나 재산 같은 것들을 누가 물려받게 될지 생각해 보면 추론할 수 있는 일이죠.”
“그렇…… 군요.”
지스카르가 참담한 신음을 흘렸다.
윈터펠의 가장 강대한 적은 발라지트 공작과 그 꼭두각시 역할을 하는 왕실이다.
그 탓에 그는 암살의 배후가 외부의 적이라는 오판을 한 채 수사를 진행하고 말았다.
사실 지스카르만을 탓할 수는 없었다. 그 당시 모두들 발라지트 공작이 후작님을 죽이려 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는 영주님을 찾아가 제안했어요. 덫을 파놓고 사냥감이 걸려들길 기다려 볼 생각은 없냐고요. 만일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 결백을 증명할 수 있으니 그레이스 부인으로서는 나쁠 것 없는 일이지요. 이렇게 간단히 걸려들 줄은 몰랐지만요.”
“……후작 부인의 지모가 또 한 번 저희들을 부끄럽게 하는군요.”
그녀가 아니었더라면 지척에 원수를 두고도 영영 찾지 못할 뻔했다.
대체 몇 번씩이나 나디아에게 도움을 받는지 이젠 일일이 세기도 힘들 지경이다.
하지만 그녀는 차분하게 고개 저을 뿐이었다.
“아니에요. 저야 아버지가 암살을 시도하지 않았다는 확신이 있으니 할 수 있었던 거예요. 그보다는 글렌이 절 믿어 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했겠죠.”
나디아는 그리 말하곤 글렌을 돌아보았다.
그는 여전히 차갑게 굳은 얼굴이었지만 방금 전보다는 마음을 정리한 듯했다.
“이제 진정이 좀 돼요?”
“……명백한 진실을 눈앞에서 보고도 부정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겠지.”
글렌이 한탄하듯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말을 잇는다.
“지스카르 경, 자세한 심문은 경에게 맡기겠다. 갑작스레 아버지의 용태가 나빠졌다는 건 달리 수를 썼다는 뜻이지. 어떤 수를 썼는지 알아낸다면 해독약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몰라.”
“관련된 이가 단 한 명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철저히 조사하겠습니다.”
“믿겠다.”
그는 그러고는 다시 나디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우물쭈물 할 말을 고르는가 싶더니, 조심스레 입을 연다.
“그대에겐 또 한 번 빚을 졌군.”
“그럴 필요 없어요. 이건 저에게도 득이 되는 일이니까요.”
“……?”
글렌의 표정에 의아함이 퍼져 나갔다. 내부의 배신자를 잡아낸 것이 그녀에게도 득이 되는 일이라고?
물론 가문 내의 경쟁자인 그레이스 부인을 제거했다는 점에서 간접적인 이득이 있긴 하다.
그 부분을 말하는 건가? 그렇게 지레짐작한 그가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이제 당신이 저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가 한 가지 줄어들었잖아요.”
“아…….”
“저는 이제 어머니를 죽인 원수의 딸이 아닌 거죠?”
이것으로 가문 내에서 그녀의 발언권을 제한하는 요소는 다 제거했다고 봐도 좋았다.
거기다 배신자를 잡아 낸 데에는 그녀의 공이 크니, 입지가 더욱 단단해지리라.
하지만 담백하게 사고하고 있는 나디아와 달리, 글렌의 머릿속은 온갖 감정의 파도로 일렁이고 있었다.
믿었던 이의…… 아니, 생각해 보니 그리 신뢰하거나 의지했던 것 같지는 않다.
여하튼 가까운 혈육의 배신으로 참담한 와중에도 다행스러운 점이 하나 존재했다.
이제 더 이상 애써 나디아를 거부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
더 이상 그녀의 마음을 받아 줘선 안 되는 이유가 없다…….
그가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른 채, 나디아는 그저 생글생글 웃고 있을 뿐이었다.
* * *
선대 후작 부부의 마차 사고에 그레이스 부인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은 윈터펠 가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녀는 가문의 웃어른 중 하나였던 것이다.
누군가는 무언가 착오가 있는 건 아니냐고 했고, 누군가는 누명을 썼을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린우드 가의 심복들이 하나둘씩 죄를 인정하고 실토하자, 모두들 내부에 배신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윈터펠 가문의 식솔들은 아연실색했다. 제 남동생과 조카를 해치면서까지 원했던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당주의 자리가 탐이 났다더군요. 내 아들을 대영주로 만들고 싶었다…… 라고 실토했습니다.”
“아들이라면…… 아, 그 칠푼이?”
제 사촌을 떠올린 글렌이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런 것도 제 자식이라고 좋은 것을 안겨 주고픈 모양이야.”
“원래 부모 마음이란 게 그렇습니다. 뭐, 그렇다고 면죄부가 생기는 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보좌관은 그리 말하고는 주인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처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세상에 사연 없는 악인이 어디 있겠나? 죗값에 맞는 벌을 받을 뿐이다. 연관된 이는 모두 죽이고 그린우드 가의 재산은 환수한다.”
“옳으신 결정입니다.”
“물론 그 전에 아버지를 해한 방식을 알아내야겠지. 그것도 자백을 받아 냈나?”
“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보좌관은 그리 말한 뒤, 문가로 가서 그것을 들고 오라고 말했다. 이윽고 사용인 두 명이서 커다란 액자를 이고 들어온다.
글렌은 금방 그것의 정체를 알아챌 수 있었다.
“이건…… 아버지의 병실에 걸려 있던 그림이군.”
하늘의 신의 가호를 받은 천사가 지하의 신을 빛의 창으로 쫓아내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사람이 죽으면 지하 신의 사도가 그를 지하 세계까지 인도한다는 민간설화가 존재했다.
그 때문에 병자의 방에 지하 신을 몰아내는 그림을 다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레이스 부인이 빠른 쾌차를 바란다며 이 그림을 선물했을 때 그 누구도 의심할 생각을 못했다.
보좌관이 그림을 가리키며 말한다.
“여길 봐 주십시오. 물감의 질감이 다른 것이 느껴지십니까? 물감에 가루를 섞은 모양입니다.”
“독인가?”
“사람을 계속 수면 상태에 빠지게 하는 약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굉장히 미량이라서 건강한 사람에겐 해를 끼칠 수 없습니다만…….”
“아버지처럼 몸이 약해진 경우에는 치명적이겠군.”
“예, 계속 잠에 빠진 채로 쇠약해지다가 점차 몸이 굳어 죽게 되겠지요. 참으로 간교하고 악랄한 방법이지요. 하루라도 빨리 알아차리게 되어 천만다행입니다.”
수많은 명의들을 데려와 진찰하게 했지만 다들 하나 같이 ‘왜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는지 알 수 없다’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그 원인이 드디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글렌이 가장 궁금했던 것은 아버지를 해한 방식이 아니다.
중요한 건 밝혀진 사실을 토대로 아버지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가 조급하게 물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용태는 어떻다고 하더냐? 회복하실 수 있겠나?”
“확답드릴 수는 없지만 현재로서는 매우 안정적인 상태라고 합니다. 자세한 건 더 시일을 두고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마냥 긍정적으로만 생각할 상황은 아니지만, 그래도 전에 비하면 훨씬 희망적인 상황이었다.
“용태에 변화가 있다면 언제든 즉시 전해 주게.”
“예!”
의학을 모르는 그로서는 아버지의 병세에 대해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관련자들을 잔혹할 만큼 엄격하게 처벌하여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방지하는 것뿐.
보좌관으로부터 보고서를 건네받은 글렌의 표정이 무섭게 굳었다.
이제 칼자루를 휘두를 시간이다.
* * *
선후작을 해하려 했던 흉계가 발각되고, 관련자들의 처벌이 모두 끝난 어느 날.
연이은 처형과 유배로 흉흉했던 윈터펠 후작가에 좋은 소식이 도착했다.
“와…… 저게 다 얼마야?”
“눈이 부시다. 눈이 부셔.”
“근데 저걸 왜 저렇게 모은 걸까? 드래곤이 금은보화를 모아서 어디다 써?”
“반짝이는 걸 좋아하는 종족이래.”
성 내의 빈 공터.
번쩍거리는 금화와 보석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드래곤 레어를 조사하러 갔던 탐사대가 드디어 돌아온 것이다. 막대한 양의 금은보화와 함께한 채.
“으앗! 조심해!”
묵직한 자루를 옮기던 하인이 휘청거리다가 쓰러지기도 했다.
흥겨운 난장판을 바라보던 상인이 작게 중얼거렸다.
“어마어마하군요. 여기 있는 걸 모두 정리하려면 시간이 한참 걸릴 겁니다. 한번에 물량이 풀리면 가격이 떨어질 테니 시간을 두고 천천히 처분하십시오. 금덩이가 도망가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탐사대가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디아가 급히 부른 북부 상인 연합회의 웨인이었다.
글렌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관련된 일은 모두 자네들에게 맡기겠네. 수수료는 조금 더 쳐 주지.”
“감사합니다.”
죽은 드래곤의 둥지에서 발견한 것은 금은보화뿐만이 아니었다.
천 년 전 존재했던 고대 왕국의 유물, 해석할 수 없는 고문서 등도 심심치 않게 발견되었다. 경매에 붙이면 유물 애호가들에게 비싼 값에 팔 수 있으리라.
하지만 개중에서 가장 특이한 물건은 따로 있었다.
“영주님, 이걸 좀 봐 주십시오.”
“음?”
저를 부르는 기사의 목소리에 글렌이 고개를 돌렸다.
탐사대와 함께 했던 기사 한 명이 정체 모를 무언가를 든 채 지척에 서 있었다.
자신을 부른 기사의 얼굴보다 그 정체불명의 물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가 떨떠름하게 물었다.
“대체 그게…… 무엇이냐?”
크기는 다 큰 고양이가 세 마리가 웅크린 채 모여 있는 것만 하다.
색깔은 옅은 아이보리 색이었다. 거기다 각진 부분 하나 없는 둥근 형태.
이건 마치…….
“레어의 끝자락에서 이런 물건을 발견했습니다. 제 예상이 맞다면 이건…….”
“마치 알처럼 보이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