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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60/142)

제60화

‘……미친 건가?’

궁지에 몰리다 보니 이성을 놓아 버린 건 아닐까?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온다고?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역시 제정신이 아닌 계집이었구나. 네가 어떤 짓을 했는지 알기나 하는 게냐?”

“아, 죄송해요.”

나디아는 폭소가 터져 나오는 걸 참기 위해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앙다문 입술 사이로 계속해서 피식피식 웃음이 터져 나온다. 간신히 진정한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부인의 말씀은, 제가 선후작님을 해하고 수도로 돌아가고자 아버지께 서신을 보냈다는…… 그런 뜻이로군요.”

“증거가 명백하니 사실대로 실토하는 것이 좋을 거다.”

“흐음…….”

나디아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콧소리를 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네요. 저는 후작님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께 보내는 편지를 썼는걸요. 글렌, 당신이 말해 봐요. 제가 편지지에 과일즙으로 암호를 적는 모습을 목격했나요?”

“……!”

이건 또 무슨 소리지? 그레이스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진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어!         

그녀는 똑똑히 보았다. 선후작에게 인사를 올리라는 권유를 하러 갔던 날, 나디아가 홀로 편지를 쓰고 있던 모습을.

“거짓말, 거짓말이다! 당장 위기를 모면하고자 더 큰 화를 자초하는구나!”

“그건 영주님께 물어보면 될 일이죠. 어떻게 생각하나요, 글렌?”

그레이스의 고개가 꺾어질 듯 빠르게 뒤로 향했다. 글렌이 서 있는 자리였다.

“!”

그녀는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조카의 살기등등한 눈빛이 줄곧 향했던 방향은, 나디아가 아닌 자신이라는 것을.

“그, 글렌…….”

“그녀의 말이 맞습니다. 저와 함께 이야기하며 답신을 썼지요.”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딘은 그런 사정에 대해 제게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레이스의 시선이 나디아 곁에 서 있는 아이딘에게로 향했다.

어두운 데다 아래로 고개를 내리깔고 있기에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멍청한 계집!’

그 자리에 글렌이 함께 있었다면 그렇다고 말을 해 줬어야지!

중요한 이야기는 빼놓고 편지만 전해 주면 어쩌자는 건가?

멍청한 하녀의 어리석음 때문에 제 계획이 틀어졌다고 생각하자 도무지 표정을 관리할 수가 없었다.

그레이스의 눈가가 경련하듯 파르르 떨린다. 입술과 볼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주변 상황은 그녀가 오래도록 다른 생각에 빠질 만큼 녹록치 않았다.

글렌이 싸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연다.

“고모님…… 대체 왜 그러셨습니까?”

“이건…… 이건 오해다. 누군가의 음모야! 나, 나도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구나. 일단…….”

“고모님 스스로 편지를 조작하고, 아버지를 위독하게 만들고, 야밤에 이런 소란까지 일으켜 놓고선 누명이라 주장하시는 겁니까?”

너무 당황한 나머지 사고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무어라 변명을 해야 하는데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듯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녀는 고장난 인형처럼 입만 뻐끔거려야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조카의 분노는 더욱 불이 붙고 있었다.

글렌의 차가운 목소리가 이어진다.

“제 아내에게 아버지를 해친 죄를 뒤집어씌웠다면 진실은 영영 묻히게 되었겠지요. 그것 또한 고모님이 원하신 바였습니까? 고모님이 마차 사고의 배후이기 때문에?”

“아니야! 아니다. 정말 아니야! 아이작은 내 남동생이다! 내가 하나 남은 가족을 해칠 리가 없지 않겠니?”

“진정 아버지를 가족이라고 여겼다면 무고한 이에게 누명을 씌우는 대신, 진짜 범인을 찾고자 했을 것입니다. 아버지를 해치면서 동시에 경쟁자까지 제거하려 들다니, 정말 기막힌 책략이군요.”

“이, 이건 나를 음해하려는 함정이야. 나는 정말 그러지 않았어……! 자세히 조사해 보면 반드시 내 결백이 드러날 거다.”

“예, 고모님 말대로 저도 이 사건에 대해 자세하게 조사해 볼 생각입니다.”

그가 경비병들을 향해 말했다.

“끌고 가서 가둬라.”

누구를 지칭하는지는 물어볼 것도 없었다. 병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그레이스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얼굴에 공포와 분노가 동시에 스쳐 지나갔다.

“이 무례한 놈들! 감히 누구의 몸에 손을 대는 거냐! 글렌, 글렌! 나는 정말 결백……!”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만 같았다. 대체 어디서부터 틀어진 걸까? 무엇이 실수였을까?

절망감과 무력감이 머릿속을 완전히 메우려는 찰나, 섬광 같은 것이 그레이스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에게 나디아의 편지를 전해 준 건 측근하녀 아이딘이라는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절망적인 상황에 한 줄기 희망이 내려오는 것 같았다. 그레이스가 끌려가지 않으려 버티며 외쳤다.

“글렌, 저 검은 머리 하녀다! 내게 조작된 서신을 가져다준 건 저 계집이야! 저 하녀를 심문하면 내게 누명을 씌우려 한 배후를 알아낼 수 있을 거다!”

아이딘은 나디아의 측근 하녀다.

게다가 아이딘이 제게 나디아의 편지지를 가져다준 것은 엄밀한 사실이니, 그 점을 잘 활용한다면 이 난항을 돌파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그녀의 조카는 그리 소리 지르는 고모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대신 반응한 것은 나디아였다. 가까이 다가온 그녀가 부드럽게 어깨 위에 손을 올린다.

“저런, 그레이스 부인. 한 가지 모르고 계시는 것 같아 알려 드릴게요.”

“?”

나디아가 고개를 숙여 귓가에 입을 댔다. 그러고는 아주 나긋하게 속삭였다.

“제 측근 하녀 아이딘에게는 아픈 동생이 없답니다. 잠시 가벼운 감기를 앓았던 적은 있지만요.”

“……뭐?”

그게 무슨 말인지 일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픈 동생의 약값을 마련하기 위해 몰래 부업을 하는 위험까지 감수한 것 아니었던가?

아픈 동생이 없다면 왜 굳이 들킬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런 짓을…….

그 순간, 무심코 흘려들었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마님의 명령으로 땔감을 옮기는 중이었는데, 이 계집이 가칙을 무시하는 장면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데려왔습니다.”

마님의 명령.

제이콥이 후원을 지나치다가 때마침 일탈을 하고 있던 측근 하녀를 발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리라.

그가 그 시각에 후원을 지나가도록 설계한 것이다.

이제야 알겠다.

아이딘이 편지를 쓰는 마님의 곁에 후작님이 있었다는 말을 전하지 않은 이유를.

그건 멍청해서 전할 생각을 못한 게 아니라, 일부러 전하지 않은 것이었다.

“……!”

뒤통수를 망치로 가격하는 듯한 충격이 느껴졌다.

그레이스가 뭐라고 말도 못한 채 파르르 떨리는 눈으로 나디아를 올려보았다.

경악에 찬 눈동자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어떻게 내 움직임을 예상했지? 내가 마차 사고를 꾸몄다는 걸 알아낸 건가?’

그녀의 속내를 읽어낸 나디아가 친절히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사실 선후작님을 해한 배후가 누구인지 저도 확신은 못했어요.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부인은 미끼를 던지자마자 물더군요.”

“……!”

그렇다는 말인즉 처음부터 끝까지 저 여자의 계책에 놀아났다는 것이었다.

나디아가 분노로 새빨개진 얼굴에 대고 빙긋 웃어 보였다.

“그러게 혈육을 해하려 하지 않았다면 제 함정에 빠질 일도 없었을 것을요.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하세요.”

“천벌 받을 년! 네가 무슨 속셈으로 우리 가문에 기어들어왔는지 내가 모를 줄 알아!”

“어머, 선후작님을 해한 분께 그런 말을 듣고 싶지는 않은걸요.”

고상하게 그녀를 비웃은 나디아는 이내 숙였던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윽고 우아한 걸음걸이로 그레이스에게서 멀어진다. 마치 더 이상은 말 섞을 가치도 없다고 말하는 듯이.

후작 부인의 용건이 끝난 듯하자, 병사들이 다시 그레이스 부인을 잡아 끌기 시작했다.

“놔, 놔라!”

이대로 끝날 수는 없다. 공포에 질린 그녀가 끝까지 발버둥쳤다.

“글렌! 내 말 좀 들어다오! 이건 저 발라지트 계집의 계략이야! 나는 함정에 빠진 게다! 글레엔……!”

그녀의 조카는 끝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애타게 부르짖는 목소리가 점차 멀어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되었다.

“…….”

“…….”

그레이스 부인이 끌려가고 난 자리에는 씁쓸한 침묵과 한기만이 맴돌았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도 글렌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손으로 이마와 눈가를 감싸 쥔 채 망부석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보다 못한 나디아가 나서서 물었다.

“괜찮아요?”

“……내 두 눈으로 보기 전까진 믿고 싶지 않았다. 끝까지 믿고 싶지 않았어.”

고모에게 의지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그녀는 아버지의 누님이었다.

가문의 공금을 개인적인 용도에 몇 번 사용할지언정 칼을 겨누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측근 하녀를 포섭하려 했을 때도, 조작한 서신을 내게 가져와서 고발했을 때도…… 무언가 착오가 있는 건 아닐까 했다.”

“…….”

“생활에 부족함 없이 지원했다고 생각했는데, 왜 굳이 가족을 죽이려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

“그거야 지금부터 심문해 보면 알게 될 일이지요. ……사실 짐작 가는 이유가 있긴 하지만요.”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지스카르의 표정이 어리둥절하게 변해 갔다. 그가 입을 열어 질문했다.

“설마…… 두 분은 그레이스 부인이 이렇게 행동할 거라는 걸 미리 아셨던 겁니까?”

“함정 수사라는 거죠.”

나디아가 대답했다.

“제 아버지를 감싸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작고하신 후작 부인과 선후작님을 암살하려 한 건 아버지가 아니에요. 예전에 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하셨거든요.”

“…….”

“내가 그 두 사람을 죽이려 했다면 한 명을 살리는 실수 따위는 저지르지 않았다, 그리고 마차 사고라니 타살인 게 너무 티가 나지 않느냐…… 라고요.”

“맙소사.”

그 말에 지스카르의 표정이 아연하게 변했다.

마차 사고의 배후가 발라지트가 아니라는 데에 놀란 것인지, 공작의 인성에 놀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정적을 자연스럽게 사고사로 위장하여 죽이는 법에는 통달하신 분이거든요. 굳이 딸인 제 앞에서까지 거짓말을 할 리 없으니, 마차 사고의 배후에는 다른 이가 있다는 뜻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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