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8/142)

제58화

그 말에 나디아가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얘들이 못하는 말이 없네. 이만 들어가서 자기나 해. 나도 슬슬 정리할 생각이니까.”

“남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조금 애를 태울 필요가 있다고요.”

“리사 말이 맞아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꽤나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사랑에 빠진 여자처럼 행동하는 것은 매우 번거롭고, 또 매우 민망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적당히 마음이 식은 척하면 그 과장된 연기를 하는 것만은 그만둘 수 있다.

잠시 고민해 보던 나디아가 이내 포기했다.

‘그렇게 되면 윈터펠을 위해 헌신하는 이유가 사라져 버려.’

그녀가 잠자리에 들기 직전까지 업무를 보는 걸 주변에서 의아하게 여기지 않는 것도 다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서’라는 명분이 있기 때문 아닌가?

최종 목표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러니 다소 번거롭더라도 현재의 모습을 고수할 필요가 있었다.

“너희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렴. 일부러 튕기는 척을 했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부끄러워서 얼굴을 어떻게 든단 말이야?”

“그렇지만…….”

그렇게 말했음에도 하녀들이 입을 삐죽거렸다. 내심 나디아를 안쓰럽게 여기는 마음이 있었던 모양이다.

“사내들이란 참 멍청해요. 자길 순수하게 좋아해 주는 여자는 우습게 본다니까요.”

“맞아, 맞아.”

“후작님도 참 매정하셔라. 이쯤 되면 마님의 마음을 받아 줄 때도 됐지 않아요?”

나디아가 생각했다.

‘아니, 받아 주면 곤란하지. 엄청 곤란해지지.’

하지만 곧이곧대로 그리 말할 수야 없는 노릇이다. 나디아가 서글픈 표정을 지어 보이며 한탄하듯 말했다.

“그러게나 말이다. 어디 사랑의 묘약이라도 하늘에서 뚝 떨어졌으면 좋겠어.”

“정말 그런 게 있다면 좋을 텐데요.”

그때, 사랑의 묘약이란 단어에 아이딘의 눈이 살짝 반짝였다. 눈치를 살피던 그녀가 조심스레 입을 연다.

“마님, 혹시 천년나무의 전설에 대해 아세요?”

“아니, 처음 들어보는데.”

“성의 북문 쪽에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있다는 건 들어보셨죠? 그 나무가 천년나무거든요. 실제로 천년을 살았는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지만요.”

“아아.”

그러고 보니 윈터펠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 집사가 설명해 주었던 것이 기억난다.

이 성이 세워지기 전부터 존재했던 나무라고 했던가.

정령이 깃들었다는 영험한 나무를 차마 베어낼 수 없어서, 성벽의 설계까지 바꾸었다고 한다.

타지인인 나디아는 몰라도 이곳 사람들에게는 꽤 유명한 이야기인 듯했다.

다른 하녀들이 익히 알고 있다는 듯 설명을 거들었다.

“봄철에 딱 하루, 그것도 밤에만 꽃을 피우는 나무예요. 그러고 보니 이맘때네요.”

“벌써 꽃봉오리가 열리기 시작했대요. 꽃봉오리가 열린 뒤 사흘 후에 활짝 개화하거든요. 보러 가실래요?”

나디아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나는 딱히……. 꽃구경하는 취미는 없어서.”

“네?”

그러자 아이딘이 당황해하며 덧붙였다.

“천년나무의 꽃에 소원을 빌면 사랑하는 이와 연인이 된다는 전설도 있다고요! 1년에 딱 하루 있는 기회인데…… 정말 안 보러 가실 거예요?”

“그건 윈터펠에 내려오는 미신이니?”

“미신이라고 치부하기엔 성사된 커플이 많답니다.”

“그건 그래요. 당장 재작년만 해도 있었거든요.”

“어차피 내성 안이니까 그리 멀지도 않잖아요. 마님도 속는 셈치고 천년나무에 소원을 빌어 보세요. 영주님의 마음이 돌아설지 어떻게 알아요? 네?”

유명한 미신이긴 한지 다른 하녀들까지 아이딘의 말에 맞장구를 친다. 흥미로운 주제에 그녀들의 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나디아가 입을 열었다.

“사실은 그냥 너희들이 그 꽃을 구경하고 싶은 거지?”

“어머, 어떻게 아셨어요?”

“작년에 몰래 숙소를 빠져나와서 구경했는데 얼마나 예뻤는지 몰라요!”

“하지만 야밤에 저희들끼리 숙소를 벗어나면 하녀장님께 혼쭐이 날 테니까……. 저희도 좋고, 마님께도 좋은 일이잖아요? 네? 일조이석이랍니다.”

“일석이조겠지.”

“아.”

꺄르르, 그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나디아가 귀엽다는 듯 픽 웃으며 말했다.

“좋아. 보러 가자. 사흘 뒤의 밤이랬지?”

“네, 마침 사흘 뒤가 보름달이에요! 운도 좋으시지. 달빛 아래에서 보는 천년나무 꽃이 그렇게 예쁘대요.”

사실 꽃이 아름다워 봤자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녀는 들뜬 하녀들의 장단에 어울려 주었다.

“좋아, 그럼 사흘 뒤 밤이야. 잊어먹는 일이 없도록 해.”

“감사합니다, 마님!”

* * *

후작 부인의 측근 하녀들에겐 두 명당 침실 하나가 배정되었다.

대부분의 사용인들이 6인실을 사용한다는 걸 감안한다면 파격적인 특례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좀 더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었다. 여섯 명이서 한 방을 쓰다 보면 밤중에 소음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날은 여느 때와는 달랐다.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이 깬 리사가 천금 같은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올렸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창틈 사이로 햇살이 들어오는 것이 보인다. 아주 이른 시각에 깨어난 것은 아닌 모양이다.

부스럭거리는 소음의 정체는 룸메이트인 아이딘이 옷을 갈아입는 소리였다.

리사가 눈을 비비적거리며 물었다.

“으음…… 아이딘, 일찍 일어났네.”

“응, 눈이 일찍 떠져서.”

그리 대답하는 목소리는 어딘가 조급하게 들렸다.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순식간에 잠이 깬 리사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 있어? 너 아침잠 많은 편이잖아.”

“가끔 일찍 일어날 수도 있지.”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가 아는 아이딘이라면 조금이라도 더 침대에 누워 있고 싶어서 미적거리지, 먼저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을 사람이 아니었다.

“어디 갈 곳이라도 있어? 왜 이렇게 일찍 준비해?”

“그냥 먼저 식당에 가서 식사하려고. 오늘은 나 먼저 갈게. 배가 많이 고파서 그래.”

“일찍 가 봤자 준비도 덜 되었을 텐데…….”

왜 저렇게 서두른대? 리사가 의아한 눈으로 친구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허둥지둥 앞치마를 두른 아이딘이 실내복을 수납장 안에 쑤셔 넣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딘가를 잘못 건드린 것인지 비좁은 수납장 안에서 주머니 하나가 흘러내렸다.

찰그락!

“아!”

땅에 부딪힌 충격으로 주머니의 매듭이 풀어졌다. 벌어진 입구 사이로 번쩍거리는 무언가가 물결처럼 쏟아져 내렸다.

“……!”

깜짝 놀란 아이딘이 허리를 숙여 허겁지겁 쏟아진 물건을 주워 담는다.

하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었다. 금화를 목도한 리사의 눈이 접시처럼 커다래졌다.

“그거…… 금화 아냐?”

“마, 맞아.”

“엄청 많아 보이는데? 그거 다 어디서 난 거야?”

일개 하녀의 봉급으로 저만한 돈을 모은다는 게 말도 안 된다는 건 자명하다.

“너 뭐 돈 되는 부업이라도 물었어? 근데 우리는 부업 뛰면 안 되는 거 알지? 무슨 일이야? 솔직히 말해 줘라. 응? 마님이나 하녀장님께는 비밀로 해 줄게.”

“부업 아냐. 빌린…… 돈이야.”

“빌린 돈? 왜 빌렸는데? 누구한테서? 어디에 쓰려고?”

캐물으려는 의도가 아니라 정말 순수하게 궁금했다.

저 돈을 어디에 쓰려는 생각으로 빌린 건지, 대체 어느 정신없는 부자가 저런 거금을 턱하니 빌려준 건지, 어떻게 빚을 갚을 생각인지 등등…….

“야, 사실대로 말해 봐.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돈 되는 부업이지? 친구 좋다는 게 뭐냐? 나도 소개시켜 주면 안 돼?”

“부업 아니라니까? 아무튼 난 먼저 갈게. 너도 얼른 준비하고 나와.”

하지만 아이딘은 대답 대신 서랍장을 단단히 걸어 잠군 뒤 침실을 나설 뿐이었다.

쾅!

리사가 요란하게 닫힌 문을 삐딱한 눈으로 응시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너머에 있을 친구를 삐딱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비밀 부업 맞네, 뭐.’

돈 앞에서는 친구고 뭐고 없다는 건가?

제일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저만의 착각일지도 모르겠다. 서운함에 아침잠이 깨끗하게 날아가 버린다.

그녀는 꾸물꾸물 침대에서 내려와 하녀복과 앞치마를 걸쳤다. 씻는 일이야 아침 식사를 한 뒤 간단히 세수만 하면 될 일이다.

설렁설렁 식당에 걸어가니 아직 한적했다. 이른 시각이라 그런 듯하다.

아침잠이 많은 친구 때문에 늘 빠듯하게 식당에 도착하는 리사로서는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그녀가 식탁에 자리를 잡으며 물었다.

“마샤, 오늘 식사 당번이에요? 아이딘은 벌써 먹고 갔나 봐요?”

“응? 아이딘?”

마사라고 불린 중년 하녀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답한다.

“오늘 본 적 없는데? 그러고 보니 너 왜 혼자니? 늘 아이딘이랑 같이 먹으러 오더니.”

“걔가 배고프다면서 먼저 나갔으니까요. 제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어요.”

“그래? 이상하네. 계속 여기 있었지만 본 적 없는데…….”

이른 시각이라 아직 식당에 도착한 사용인은 몇 없었다. 아이딘을 봤다면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리사가 의아한 듯 다시 물었다.

“정말 안 왔어요?”

“일단 내 기억에는 없어. 헤이즐! 오늘 아이딘이 식사하러 온 거 봤어? 왜, 그 마님의 측근 하녀 말이야!”

그러자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못 본 것 같은데!’ 하는 대답이 돌아온다.

마사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다른 사람도 못 봤다고 하네.”

“이상하네…….”

두 사람이나 같은 말을 하는 걸 보니 아이딘이 식당에 오지 않았다는 건 확실한 듯했다.

‘그럼 아침부터 대체 어딜 간 거지?’

무언가 숨기는 태도도 그렇고, 그 돈에 관련된 일인 걸까?

친구를 떠올리는 그녀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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