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142)

제55화

내성 밖, 제1지구.

성 안에 출입하는 관리들, 작위를 가진 귀족들, 그리고 윈터펠의 친인척들이 거주하는 장소였다.

개중에서 가장 커다란 저택은 그린우드 남작부부의 것……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그린우드 남작 부인이 것이었다. 그린우드 남작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니.

본래 주인이 세상을 뜬 지 오래되었음에도 커다란 저택에는 낙후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남편이 죽은 후 줄곧 저택을 관리한 노부인의 성격이 보이는 부분이었다.

대저택의 새 주인이자 글렌의 고모, 그리고 윈터펠 가의 최고 어른인 그레이스 부인은 현재 은밀하게 서재에 틀어박혀 있는 중이었다.

다시 말해, 듣는 귀가 없는 장소에서 수족이 물고 온 정보를 전해 듣고 있었다.

“글렌이 정말 그런 말을 했다고 하더냐?”

그레이스 부인의 상체가 살짝 앞으로 기운다. 전해들은 정보에 흥미가 생겼다는 반증이리라.

“예, 저희측 아이가 연무장을 지나치다가 똑똑히 들었다고 합니다. 발라지트의 딸과 연인이 된다면 죽은 후 저승에 가서 어머니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거라고요.”

“호오…….”

말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조금 과장이 생겨나긴 했지만 어찌 됐든 본질은 변치 않았다.

‘그 계집애한테 완전히 홀린 것 같아 보여도 파고 들어갈 틈이 있었군.’

본래 의심의 불길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되기 마련이다.

심지어 그것이 친애하는 부모의 죽음에 관련한 내용이라면?

의심이 씨앗이 되기에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비로소 가문 내의 권력구도를 원래대로 되돌릴 희망이 보이는 듯하다. 노부인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맺혔다.

눈치 빠른 하인은 주인의 얼굴에 맺힌 미소를 놓치지 않았다.

최근 들어 저조했던 주인의 기분을 띄워 주기 위해, 그는 듣기 좋은 말을 속삭이기 시작했다.

“부인께선 후작님의 혈육이자 웃어른이신걸요. 원수의 피와 평민의 피가 반씩 섞인, 그런 근본 모를 계집과 비교할 바가 못 됩니다.”

“네 말이 맞다. 나는 윈터펠의 최고 어른이야.”

글렌이 자신의 개입을 성가셔 하면서도 내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 아닌가?

하인은 내친김에 더욱 기분을 맞춰 주기로 했다.

“후작님도 참 너무하시지요. 여태껏 부인께 집안일 관리를 맡겨 왔으면서 아내가 생기자마자 돌아서다니!”

“그 여자의 외모에 홀린 게지. 하여간 사내들이란……. 단순하고 멍청하기 그지없어.”

“부인, 설마 이대로 물러날 생각이십니까? 대(大) 윈터펠 가문이 발라지트의 손에 놀아나는 꼴을 두고만 봐야 합니까?”

“걱정 마라. 내게 다 생각이 있단다.”

비록 나디아가 가주와 가신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지만, 지난 몇 년간 가문 내부의 일을 관리해 온 그녀의 영향력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나디아도 사용인들 중 일부가 그레이스의 눈과 귀라는 건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개중에서 누가 내 사람인지 알 수는 없지.’

아무런 명분도 없이 사용인들을 심문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런 짓을 했다간 그간 쌓아 온 평판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리고 만다.

나디아로서는 알면서도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잠시만 기다려라. 내가 다음 지시를 할 때까지 눈에 띄는 짓일랑 하지 말고.”

“예.”

그레이스 부인은 그리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랍장으로 다가갔다.

서랍장 안에서 꺼낸 종이에 무어라 휘갈기듯 전언을 써낸다. 그러고는 그것을 하인에게 전해 주며 말했다.

“이것을 아이들에게 전해라. 물론 내용을 확인하는 즉시 태워 버려야 한다.”

* * *

측근 하녀들의 하루일과는 주인이 잠자리에 들 때가 되어서야 끝난다.

리사, 아이딘, 그리고 유리, 세 하녀는 마님의 침실에 불이 꺼지는 걸 확인한 후에야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암, 졸려 죽겠다. 어서 우리도 자러 가자.”

“욕실에 물이 남아 있으려나? 좀 씻고 싶은데.”

“그냥 자고 일어나서 내일 아침에 씻…… 어라, 아이딘? 너 어디 가니?”

기지개를 켜던 리사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절친한 동료들 중 하나인 아이딘이 사용인 숙소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거긴 반대쪽인데?”

“아…… 배가 좀 출출해서. 주방에 가서 남는 음식이 있는지 물어보려고.”

“이 시간에 무슨 야식이야? 그냥 가자.”

“너, 너무 배고파서 잠이 안 올 것 같아서 그래. 너희들 먼저 들어가. 안 깨게 조심해서 들어갈게.”

“밤에 많이 먹으면 살찐다, 너? 아무튼 빨리 돌아와.”

“응, 그래.”

주방에서 남는 잔반을 사용인들에게 나눠 주는 건 흔히 있는 일이었다. 리사와 유리는 큰 의심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쉰 아이딘이 발소리를 죽인 채 걸어가기 시작했다.

주방이 있는 방향으로 향하는 척하면서 다시 반대편으로 방향을 꺾는다. 후원으로 향하는 뒷문이 있는 쪽이었다.

한밤이 된 성의 복도에는 돌아다니는 이가 거의 없었다. 있더라도 후작 부인의 측근 하녀가 성내를 돌아다니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누구도 그녀를 눈여겨보지 않으리라.

끼익.

마침내 후원까지 도달한 그녀가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아이딘은 거의 뛰다시피 후원 구석으로 향했다.

후원의 가장 구석진 장소. 덤불과 덤불 사이, 그녀가 숨겨 뒀던 바구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안에 든 것은 비단과 실, 그리고 바늘이었다. 그러니까 바느질감이었다는 소리다.

‘아무도 발견 못해서 다행이야.’

아이딘은 커다란 나무 뒤에 숨은 채, 달빛과 등불에 의지해 수를 뜨기 시작했다. 눈이 침침했지만 의뢰를 받은 이상 어쩔 수가 없다.

귀족가에서 일하는 하녀들이 부업을 달고 사는 건 매우 흔한 일이었다. 특히 짬짬이 틈을 내 할 수 있는 바느질거리가 주된 돈줄이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죄인처럼 숨어서 바느질을 하고 있는 이유는, 주인을 지척에서 모시는 측근 하녀들에겐 부업이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대신 봉급을 더 넉넉하게 주긴 하지만…….’

부업으로 한 눈 팔지 말고 주인을 모시는 데에만 충실하란 의미였다.

웃돈으로 얹어 주는 봉급이 부업으로 벌 수 있는 돈의 두 배는 되었기에 보통 측근 하녀가 되고 싶어 하는 편이었다.

그만한 추가금을 받고 있음에도 아이딘이 부업을 해야 하는 이유는…….

“너, 거기서 뭐 하는 거야!”

“헉!”

아이딘의 어깨가 펄쩍 뛰어올랐다. 너무 놀란 나머지 들고 있던 수틀을 떨구기까지 했다.

“뭐 하느라 좀도둑처럼 여기서…… 아이딘?”

거친 손길이 아이딘의 어깨를 잡아챈다. 마침내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하인의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

“누군가 했더니 너였구나! 이 밤중에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딱 오해 사기 좋게!”

“너, 너야말로 이 시간에 여긴 왜…….”

“아까 전에 마님이 난방을 더 하라고 하셨거든. 땔감을 옮기는 중이었지.”

그 말대로 그의 한쪽 손에는 장작이 든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그러는 넌 여기 뭐 하는…… 어, 수틀? 왜 수를 여기서 놓고 있어? 눈 안 좋아지게.”

“나, 난…….”

“아, 여자애들 부업으로 바느질감을 받아서 한다더니 그건가? 그걸 왜 숨어서 하고 있어?”

“…….”

아이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측근 하녀가 부업을 하는 것은 엄연히 금지된 일이었으니까.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는 동료를 의아하게 바라보던 제이콥이 이내 그 이유를 떠올려냈다.

“그러고 보니 너…… 마님의 측근 하녀였지. 이거 후작 부인께서 허락하신 일이야?”

“…….”

“하긴, 여기서 이러고 있는 꼴을 보니 허락을 받았을 리가 없겠네.”

그의 입에서 픽 하고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고작 바느질거리로 돈을 얼마나 번다고 화를 자초하는지.

그가 아이딘의 팔을 잡아끌며 말했다.

“가자. 네가 이러는 거 윗분들도 아셔야지. 당장 마님께 고할 거야.”

“지, 지금 마님은 주무시고 계신데……!”

“그럼 집사장님이나 그레이스 부인께 고하면 되겠네. 마침 성안에 계시거든.”

“잠깐, 잠깐! 말로 하자, 응? 돈 받으면 절반은 너 떼어 줄게. 어때?”

“그 돈 받았다가 나중에 나까지 덤터기 쓰게? 잔말 말고 따라와.”

여자인 아이딘이 남성의 힘을 이겨낼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녀는 짐짝처럼 질질 끌리다시피 성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제이콥의 발걸음이 향한 방향은 본채가 아닌 별채였다. 아이딘은 곧장 그가 자신을 어디로 끌고 가려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왜 그레이스 부인에게 가는 거야!”

“마님은 주무시고 계시다며? 마님의 취침 시간을 방해했다가 무슨 소리를 들을 줄 알고.”

이윽고 그는 그레이스가 머무는 처소까지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는 대답이 들리자마자 문틈 사이로 아이딘의 몸을 떠민다.

“꺄악!”

미는 힘을 이기지 못한 아이딘이 바닥 위로 넘어졌다. 다행히 카펫이 깔려 있긴 했지만 충격이 전부 가시는 건 아니었다.

쉽게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그녀의 머리 위로 그레이스 부인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이 밤중에 이게 무슨 일이냐?”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부인. 드려야 할 말씀이 있으니 잠시 시간을 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윈터펠 가의 위계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함입니다.”

“말해 보거라.”

“감사합니다.”

제이콥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마님의 명령으로 땔감을 옮기는 중이었는데, 이 계집이 가칙(家則)을 무시하는 장면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데려왔습니다. 마님의 측근 하녀인데도 바느질거리를 받아 부업을 하고 있더군요. 휴식을 취해야 할 밤중에 다른 일을 하다간 마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할 게 뻔합니다!”

“측근 하녀에게는 봉급이 더 지급될 텐데?”

“재물에 눈이 먼 게죠. 언제 푼돈에 넘어가 주인을 배신할지 모릅니다. 이참에 성에서 내쫓으시지요, 부인.”

아이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갔다. 평소 데면데면하긴 했지만 사이가 안 좋은 것까진 아니었기에,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녀가 그레이스의 발치에 기어가다시피 하며 애원했다.

“아, 아닙니다, 부인! 결코 마님의 배신할 뜻은 없었어요! 저, 전 그저…….”

“그저?”

“돈이 필요해서……. 제, 제 봉급으로는 동생의 약값을 마련할 수가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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