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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54/142)

제54화

“왜냐하면…… 그건 마님의 부친 되시는 분 때문입니다.”

“예?”

“선대 후작님과 후작 부인께 일어난 참사는 알고 계시겠지요?”

“네, 물론.”

마차가 산등성이에서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후작부인은 사망하고, 선대 후작은 중상을 입어 아직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글렌 역시 부모와 함께 사고를 당할 뻔했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따로 출발한 덕에 참사를 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가…… 마님의 부친이라는 것 역시도 알고 계시지요?”

“음, 그렇죠.”

“영주님은 지금 많이 고뇌하고 계실 겁니다. 부모를 죽인 원수의 딸과 연인이 되는 것이 옳은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요.”

“…….”

“그러니까 영주님이 아직 마님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것은, 마님께 부족함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마님의 잘못이 아니에요. 어제 했던 말씀도 분명 진심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러니 본인을 탓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

진심으로 걱정하는 이 앞에서, 나디아는 차마 마음속의 말을 하지 못했다.

‘그거…… 내 아버지가 한 짓 아닌데.’

진짜로 아니다. 정말로.

선대 후작 부부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이 수도로 전해졌을 때, 발라지트 공작은 이런 말을 했다.

‘쯧쯧, 후작가 내부에도 적이 있는 모양이구나. 어느 가문이나 그렇긴 하지만.’

‘어머, 그 말씀은…… 이번 사고의 배후는 아버지가 아니라는 말씀인가요?’

‘뭐?’

그때, 그는 진심으로 화를 내며 펄쩍 뛰었다.

‘이런 어설픈 흉계를 내가 꾸몄을 것 같으냐! 내가 했으면 둘 다 확실하게 죽였다! 둘 중 하나라도 숨이 붙어 있지 못했어!’

정적을 암살했다는 누명을 썼다는 사실보다, 제 능력이 의심받는 게 더 짜증 난다는 어투였다.

‘아무튼 아버지가 꾸민 일은 절대 아냐.’

가주가 죽으면 그 재산과 영토가 아들에게 고스란히 상속될 뿐이다.

잠시 혼란이 있긴 하겠지만 윈터펠 영지의 전력에는 거의 손상을 입힐 수 없었다.

게다가 그 사건 이후 북부 영주들은 더욱 똘똘 뭉쳐 남부 세력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셈이 빠른 아버지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은 짓을 꾸몄을 리가 있겠는가?

아버지의 말대로 후작가 내부에 범인이 있을 가능성이 더욱 높다.

‘근데 내가 범인은 아버지가 아니라고 해 봤자 설득력이 있을 리가 없고…….’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아버지를 두둔한다는 오해나 사겠지.

공작의 결백을 주장하는 것보다는 진짜 배후를 알아내는 쪽이 차라리 더 가능성 높아 보였다.

‘이건 조금 있다가 생각해 보기로 하고.’

우선은 눈앞에 닥친 오해부터 풀어야겠지. 나디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파비안 경.”

“네, 말씀하세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저는 정말로 신경 쓰지 않아요. 기분 상한 적도 없고요. 제가 울적해 보였다면 그건 착각이거나 다른 이유 때문일 거예요.”

“……예?”

파비안의 표정이 희한하게 변해갔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다.

그의 의문을 풀어 주고자, 그녀는 즉석에서 짜낸 변명을 읊어나가기 시작했다.

“사람의 겉모습으로 반하는 건 진정한 사랑이 아니에요. 진정한 사랑은 외모가 아닌 저라는 인간 자체를 좋아하게 되는 것! 그러니 저는 글렌의 말에 상심하지 않았어요.”

“…….”

파비안이 생각했다.

‘아니, 그럼 마님은 우리 영주님의 뭘 보고 첫눈에 반하신 건데요? 당연히 얼굴 아니었어요?’

대화를 나눠 본 적도 없는 남자와 첫눈에 운명적인 사랑을 느꼈다기에 당연히 얼굴에 반한 거라고 생각했다.

영주님의 외양이 정말 매력적이라는 건 기사단 모두가 인정하는 바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니!

대체 후작 부인은 왜 저렇게 영주님께 매달리는 건가, 하는 문제에 대해 조만간 다시 토론이 벌어지게 생겼다.

호위기사가 느끼고 있는 혼란을 짐작하기나 하는지, 나디아는 그저 꿈같은 이야기를 늘어놓을 뿐이었다.

“글렌이 저라는 인간 자체에 매력을 느끼게 될 그날까지, 저는 기다릴 수 있답니다.”

“예에……, 그렇군요.”

“그러니 어제 안색이 안 좋았던 이유가 몸살 때문이 아니라면, 하루빨리 복귀해 주길 바란다고 전해 줬으면 해요.”

걱정했던 것만큼 약골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이제 안심하고 소처럼 부려먹을 수 있겠다.

“내일 시찰이 예정되어 있거든요. 취소되면 일주일치 스케줄을 모두 바꿔야 하니까요.”

“그,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부탁할게요.”

파비안은 허리를 살짝 숙여 보인 후 바깥으로 나섰다. 나디아가 말한 것을 전하기 위함이리라.

조용해진 집무실 안에서, 그녀는 펜대를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선대 후작 부부에 대한 암살 시도……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긴 했지.’

지난 생에 선대 윈터펠 후작이 어떻게 죽었는지 전해 들은 기억이 있었다.

‘온 몸이 딱딱하게 굳은 채 서서히 죽어 갔다고 했어.’

단순히 사고의 후유증이라고 하기엔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았다.

세인들은 이번에도 발라지트 공작의 짓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정작 선후작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은 발라지트 공작은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 병석에 누운 후작에게 손을 쓴 모양이구나. 그놈도 안타깝게 되었지. 자기 가문 내부 사람의 손에 죽게 되다니.”

“아버지, 그걸 어떻게 아신 건가요?”

“척하면 척이지. 내가 하루이틀 이런 꼴을 본 줄 아느냐?”

아버지의 지시가 없었으니 남부 영주들이 독자적으로 흉계를 꾸몄을 가능성은 적었다.

그러니 배후는 윈터펠 후작이 아군이라 생각했던 이들 중에 있다.

접근이 철저하게 제한된 선후작의 침실에 접근할 수 있을 만큼 믿었던 아군 중에.

‘온 몸을 굳게 만들면서 서서히 죽어가게 만드는 독이라…….’

그녀는 독에 대해 잘 모른다. 그렇기에 선후작의 암살에 어떤 독이 사용되었는지 알기 위해선 따로 사람을 부려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윈터펠 가의 사람들이 그녀가 독에 대해 알아봤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후작 부인이 조사해 보라 지시한 독의 효능과 선후작이 죽어 가며 보인 증상이 일치한다는 게 알려진다면…….

‘지금껏 공들여 지은 탑이 와르르 무너지겠지.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어.’

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비단 죽어 가는 이를 방관할 수 없다는 도의적인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부모를 해한 원수의 자식이라는 건 쉽게 지워지는 기억이 아니다.

물론 나디아는 글렌이 그 죄를 자신에게 묻진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극한의 대립 상황, 예를 들어 전시 상황까지 치달았을 때 해결하지 않았던 문제가 제 발목을 어떻게 붙잡을지는 예상할 수 없다.

전쟁을 앞두고는 모두가 예민해지는 법. 자그마한 불신의 씨앗이 그녀의 행동반경을 제한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찌 됐든 진범을 밝혀야 할 필요는 있어. 후환이 될 만한 싹은 내전이 일어나기 전에 잘라 둬야 해.’

하지만 어떻게?

미래에서 선후작이 어떻게 죽었는지 보고 왔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어디서부터 꼬리를 밟아 나가야 하는가?

고민하는 그녀에게 집사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님.”

“응?”

“수도에서 전령이 온 모양입니다. 발라지트 공작님의 서신을 가지고 온 듯한데, 만나 보시겠습니까?”

“서신만 전달해 달라고 해. 아버지가 내게 전하고픈 말이 있다면 편지에 담았겠지.”

“예, 그럼 그리 전하겠습니다.”

흑사병이 창궐할 때쯤 전해진 서신 이후로 처음 받는 연락이었다.

사실 이 시점에 아버지에게서 연락이 올 이유란 뻔했다.

‘지금쯤 배 아파서 죽을 지경이겠지.’

겨우 세력을 줄였다고 여긴 정적이 보란 듯이 날개를 달고 있으니 말이다.

발롱 성은 북부가 남부로 나아가는 발판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풍족한 농경지와 철광산까지 얻게 되었으니 여간 초조한 것이 아니리라.

“이리 주렴.”

나디아는 하녀가 건네 준 편지봉투를 찌익 찢었다.

녹색 눈동자가 위아래로 빠르게 움직인다. 서신의 내용을 모두 훑은 그녀의 입에서 짧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어머.”

“왜 그러십니까, 마님?”

하녀의 물음에 나디아는 여상하게 대답했다.

“별거 아니야. 아버지가 보낸 편지치곤 너무 세심해서 감탄했지 뭐니? 원래 이렇게 다정한 분은 아니었거든.”

“따님을 멀리 시집보냈으니 걱정이 되나 봐요. 아버지들은 다 그렇답니다.”

“그럴까?”

그럴 리가 없었다. 절대 그럴 리 없다는 데에 나디아는 어머니의 유품까지 걸 수 있었다.

서신의 내용은 별것 없었다. 그저 네가 집을 떠나서 많이 적적하니, 편지라도 자주 보내 달라는 말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 속에 함축된 의미를 모를 만큼 눈치가 느리진 않았다. 의미 없는 일상생활을 나열하지 말고 도움 되는 정보를 전하라는 뜻이리라.

문제는 그 속내를 눈치챈 이가 나디아 하나뿐만이 아닐 것이라는 점이었다.

‘내가 눈채챘다면 다른 이들도 눈치챌 수 있다는 소리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나디아는 글렌에게 아버지로부터 오는 편지와 답신의 내용을 모두 살펴봐도 좋다고 허락했다.

자신이 친정과 내통하는 첩자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쯧.”

그녀가 편지지를 살짝 구기며 짧게 혀를 찼다.

대놓고 이런 편지를 보낼 정도라면 아버지도 많이 애가 탄 모양이다.

아직 집안 정리가 완전히 끝나지 않은 시점에서 이런 서신이라니. 괜히 트집이나 잡힐 수…….

“아, 그렇지.”

“네?”

갑작스러운 마님의 탄성에 하녀가 고개를 든다. 나디아는 손을 휘휘 저으며 대답했다.

“별 것 아니야. 갑자기 생각난 게 있어서. 그나저나 간단한 간식거리를 준비해 줄래? 입이 심심하네.”

“예, 마님. 새 편지지도 함께 가져다 드릴까요?”

“아니, 됐어. 답신은 천천히 쓸 거란다.”

옛말에 공격은 최선의 방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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