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화
“영주님, 안색이 안 좋으신데요.”
“어라, 정말이네. 혹시 불편한 곳이 있으신가요?”
그의 얼굴색은 멀리서 보기에도 정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손사래를 치며 걱정하는 말을 물릴 뿐이었다.
“그럴 리가. 착각이다.”
“하지만 정말…….”
“오전 내내 바깥바람을 쐰 탓일지도 모르겠군. 신경 쓸 것 없다.”
진심이 아닌 말을 상대가 들었을까 봐 안절부절 못하는 중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글렌은 염려하는 시선을 뒤로 하며 자리에 가 앉았다. 그러자 나디아 역시 옆자리에 착석한다.
그녀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정말 괜찮아요? 식사해도 되겠어요?”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 걱정할 것 없어.”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나디아가 다행이라는 듯 웃으며 식기를 들어올린다.
글렌이 생각했다.
‘걱정해 주는 걸 보니 어쩌면 못 들었을지도.’
불안했던 가슴이 조금쯤 안정되는 기분이다.
하지만 안도했던 것도 잠시, 바로 다음 순간 그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게 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으음…….”
그건 바로 나디아가 어두운 표정으로 음식을 깨작거리는 모습이었다.
포크로 샐러드를 뒤적이기만 할뿐, 제대로 음식을 입에 넣지 않는다. 언제나 식사는 든든히 해야 한다는 신조를 가진 그녀답지 않았다.
쿠쿵. 머리 위로 바위가 떨어지는 듯했다.
‘역시 들었구나!’
하긴 못 들을 거리가 아니긴 했다. 눈치가 비상한 여자이니 제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 역시 빠르게 알아챘으리라.
사랑하는 남자에게 네 외양은 취향은 아니라는 말을 들었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상처를 주고 싶진 않았는데…….’
그녀의 고백을 받아 주지 못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당장이라도 진심으로 했던 말이 아니라고 실토하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왜 마음에 없는 말을 했느냐는 반문이 돌아올 것이다. 그때 뭐라고 대답해야 한단 말인가?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의 관자놀이에 맺힌 땀방울이 점점 굵어져 갔다.
한편, 남편이 온갖 번뇌와 고민에 시달리는 동안 나디아는 이런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아, 오렌지 드레싱……. 신 건 싫은데.’
먹지도 못하는 걸 많이도 뿌려 놨다. 나디아는 드레싱이 안 묻은 야채만 골라내어 조금씩 입에 넣었다.
싱그러워야 할 야채에 오렌지 특유의 신 맛이 묻어나온다. 절로 안색이 어두워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녀는 절반도 먹지 못한 채 식기를 내려놓아야 했다.
그러고는 무심코 고개를 돌리는데,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글렌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가 깜짝 놀라 외쳤다.
“세상에, 글렌! 식은땀을 왜 그렇게 많이 흘려요? 정말 어디 아픈 거 아녜요?”
최근 들어 그를 너무 혹사시킨 탓인가? 나디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로 다가갔다.
사용인들 역시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하나둘씩 모여든다.
“후, 후작님…… 실례지만 정말 얼굴색이 안 좋으세요.”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저희는 정말 걱정되는 마음에…….”
다들 같은 말을 하는 걸 보니 정말 제 눈이 잘못된 건 아닌가 보다. 나디아는 그를 의자에서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아픈 걸 참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에요. 쯧, 하여간 남자들의 허세란……. 일단 침실로 돌아가세요.”
“아니, 이건 몸이 안 좋은 게 아니라…….”
“그런 얼굴로 멀쩡하다는 말 해 봤자 설득력 없답니다. 한동안 안 괴롭힐 테니 푹 쉬기나 하세요. 얘, 너는 어서 가서 의원을 불러오렴.”
“예, 마님.”
“얼굴을 보니 식사는 무리겠어요. 일단 침실로 가시면 제가 미음을 준비해 올리라고 시킬게요.”
그러더니 주방을 향해 총총 걸어가 버린다. 제 몸 상태를 해명할 틈도 없었다.
“…….”
사실 그녀를 붙잡았더라도 할 말이 마땅히 없었지만 말이다.
망부석처럼 가만히 서 있는 그를 향해 사용인 하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영주님? 어서 침실로 돌아가서 쉬셔야죠.”
“…….”
“영주님?”
“…….”
물론 글렌의 귀에 들리진 않았지만. 나디아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절망감이 떠오른다.
대체 이 일은 어떻게 해명하면 좋단 말인가?
* * *
다음날.
본래라면 영주 부부가 마주보고 앉아 있어야 할 집무실.
늘 함께하던 파트너가 사라진 장소는 쓸쓸하기 그지없……지는 않았다.
‘원래 다른 사람들과 만나야 하는 일은 글렌이 처리하곤 했으니까.’
그가 외부인과 직접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일을 맡는 동안 홀로 집무실을 지키는 건 주로 나디아의 몫이었다.
그러므로 현재 그녀의 표정이 어두운 이유는 외로움이나 쓸쓸함 따위가 아니라는 소리다.
그녀가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건장하게 생겨서는 의외로 약하다니까. 좀 부려먹었다고 몸살이 날 줄은 몰랐네.’
여자인 자신도 멀쩡할진대 건장한 사내인 그가 병이 나다니.
글렌 본인은 몸살이 아니라고 우겼지만 하얗게 질린 채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그런 말을 해 봤자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끝까지 아프지 않다고 주장하는 그를 침대에 밀어 넣기까지 얼마나 진땀을 뺐던가?
‘아프면 솔직히 말하고 휴식이나 취할 것이지. 이래서 남자들이란…….’
쓸데없는 허세를 부리는 데에 왜 이렇게 진심인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에휴.”
절로 한숨이 터져 나온다. 벌써부터 이래서야 제가 세운 계획에 발을 맞출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일이나 하자.’
글렌이 쉬는 동안 저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라도 다 쳐내야 할 듯싶다. 나디아는 연신 한숨을 푹푹 내쉬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다른 이들 눈에 어떻게 비춰지는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방금 한숨 쉬신 거 맞죠?’
‘저도 들었었습니다. 아까부터 계속 저러시는데요. 오늘 하루 종일 표정도 어두우시고…….’
집사 고든과 파비안이 눈빛으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마님께서 기분이 상할 만한 다른 일이 있었나요?’
‘제가 아는 한에서는 없었습니다.’
‘그럼, 답은 하나뿐이네요.’
파비안의 목울대가 꿀꺽 넘어간다.
‘역시 들으신 게 틀림없어요. 저런 얼굴은 취향이 아니라는 영주님의 망언을요.’
‘아아……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집사장 고든이 저도 모르게 머리를 감싸 쥐고 말았다.
그가 영주님의 몸살에 얽힌 비화를 알게 된 건 어제 저녁의 일이었다.
아프시다는 말에 주인의 안부를 묻기 위해 찾아갔다가 기사들로부터 자세한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실상을 모두 전해들은 고든은 답답함에 가슴을 퍽퍽 쳐야 했다.
마님을 잘 모셔서 윈터펠에 평생 머무르게 만들어도 모자랄 판에, 뭐가 어째? 내 취향인 얼굴이 아니야?
‘설령 진짜 이상형이 아니라 해도 이쯤 되면 알아서 취향을 개조해야지!’
영주님 하나만 취향을 바꾸면 마님의 사랑이 이뤄진다.
그리 되면 마님이 평생 이곳에 눌러앉을 가능성도 높아지고, 따라서 윈터펠은 앞으로도 계속 무탈하게 되리라.
본래 영지민들에게서 세금을 받아먹는 자는 영지를 지키고 번창시킬 의무가 있는 법 아닌가?
영지도 번성하고, 마님도 행복해지고. 여러모로 좋은 결말인 셈이다.
그런고로 글렌이 이상형을 바꾸는 게 옳다.
‘마님이 얼마나 미인이신데! 저 정도면 취향을 뛰어넘을 만도 하지!’
복에 겨워서 복을 걷어찬다는 말이 이럴 때 쓰이는 것이리라.
늘 존경했던 영주님이지만 오늘만큼은 정신 좀 차리라고 쓴소리를 하고 싶었다.
보다 못한 파비안이 나디아에게로 다가갔다. 일단 마님이 문제의 그 발언을 진짜 들으신 건지 확인해야 한다.
“흠흠, 저…… 마님.”
그가 헛기침을 하며 조심스레 운을 뗐다.
“할 말이 있나요?”
“그게 말이죠, 영주님이 어제 하셨던 말씀 말입니다.”
“어떤 말이요? 안 아프다고 우겼던 거요?”
“어, 아뇨. 그거 말고…… 식당에 가기 전에 했던 말씀이요.”
“?”
나디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어제 글렌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일단 어제 오전에는 그와 만난 적이 없다. 그와 첫 대화를 나눈 건 점심 즈음이었다.
같이 점심을 들자는 말을 파비안을 통해 전했고, 식당으로 가는 길에 그와 마주쳤다.
함께 걸으며 이야기했지만 금세 식당에 도달했기에 그와 나눈 대화는 얼마 되지 않았다.
“날씨가 풀렸다는 거요?”
“아뇨, 그 이전에 하셨던…….”
“경, 지금 저랑 스무고개를 하자는 건가요?”
의아해 하던 나디아는 순간 작게 탄성을 내뱉으며 말했다.
“아, 저 같은 얼굴은 딱히 취향이 아니라는 말이요?”
그러자 허억, 하고 숨을 급히 들이마시는 소리가 돌아온다. 파비안이 희게 질린 얼굴로 대답했다.
“여, 역시 들으셨습니까.”
“그걸 어떻게 못 듣겠어요?”
바로 코앞에서 한 말이나 다름없는데.
물론 나디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못생겼다고 했으면 조금 발끈했겠지만, 제 취향이 아니라고 하는데 그녀가 뭘 어쩌겠는가?
‘사람의 취향은 모두 제각각인걸.’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나디아의 입장에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그가 이제와 고백을 받아 주기라도 한다면 몹시 난감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기 취향이 아니라고 공공연히 못 박았을 정도이니 나중에 말을 바꾸진 않으리라.
제 얼굴이 그의 취향이 아니라니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런데 그게 왜요?”
“아, 그게, 그, 그러니까…… 혹시 마음이 상하셨을까 해서…….”
“?”
그게 왜 마음 상할 일이냐고 반문하려다가 멈칫했다. 일단 그녀는 지금 남편을 열렬히 짝사랑하는 중이라고 알려져 있으니까.
짝사랑하는 상대에게서 외모가 제 취향이 아니라는 소리를 들었다면 울적해질 만도 하다.
그제야 의아함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어쩐지…… 내 눈치를 살피는 것 같더라니.’
그렇다면 어제 글렌의 얼굴색이 심상치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인가? 그리 생각하니 조금 귀엽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정말 조금도 신경 안 쓰니 이렇게까지 내 눈치 볼 필요는 없는데.’
하지만 이런 제 속내를 짝사랑하는 모습에 걸맞도록 전달하는 것이 문제였다.
나디아가 그에 대해 고민하는 사이, 파비안은 묻지도 않은 변명을 주절주절 읊어 나가기 시작했다.
“마님, 영주님은 마님을 싫어하는 게 아닙니다.”
“응?”
그건 나도 아는데? 나디아가 생각했다.
‘내가 이 영지에 해 준 게 얼만데 아직까지 미워하면 양심이 없는 거지.’
하지만 파비안이 말하는 바는 그녀가 생각하는 것과 조금 거리가 있었다.
그가 몹시 진중한 얼굴로 말을 잇는다.
“영주님께선 그저 마님의 마음을 받아 줄 수 없는 이유가 있을 뿐입니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습니다. 이건 영주님의 잘못도 아니고, 마님의 잘못도 아닙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정말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 하나도 짐작이 안 갔다.
하지만 파비안이 너무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기에 나디아까지 덩달아 진중해져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