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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50/142)

제50화

그레이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지스카르가 발라지트의 딸을 감쌀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탓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 지스카르가!

“방금…… 뭐, 라고?”

“마님께 말이 너무 심하신 것 아니냐고 했습니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예의를 지키시지요.”

“허…… 허!”

예의를 지키라고? 지금 내가 예의 없이 굴었단 말인가?

귀족적인 태도로 나디아의 잘못을 지적했다고 믿는 그녀로서는 눈이 뒤집힐 만한 발언이었다.

직설적이다 못해 무례하기까지 한 태도에 그레이스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스카르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게다가 마님께선 단 한 번도 저희에게 방해된 적이 없었습니다. 잘 처신하셨으니 부인은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신혼부부이니 한시도 떨어지기 싫으셨겠지요. 영주님도 마님이 찾아와 주셔서 내심 기쁘셨을 겁니다.”

“맞습니다.”

거기에 더해 다른 기사들까지 은근슬쩍 가세하니 더 이상 할 말이 있을 리 만무했다.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방해된 적 없었다고 변호하는 와중에 저 혼자 비난해 봤자 우스운 꼴만 되리라.

결국 그녀는 조카인 글렌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다.

“두 분 사이가 이렇게나 화목할 줄은 몰랐군요. 그간 걱정이 많았는데, 이 늙은이의 마음이 이제야 놓이는 듯합니다.”

발라지트 가의 여식과 글렌의 사이가 화목할 리가 없으니 분명 그렇지 않다는 대답이 돌아오리…….

“남편을 보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에서 충동적으로 행한 일일 뿐입니다. 고모님께서는 너무 탓하지 말아 주십시오.”

“?!”

얘가 미쳤나? 남편을 보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

‘그럴 리가 없잖아!’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그레이스 하나뿐인 듯했다. 다들 글렌의 말에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저 말의 어디에 공감할 만한 부분이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단체로 세뇌라도 당한 건가? 그녀가 너무 당황한 나머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긴 여정으로 피곤하니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고모님.”

“자, 잠깐!”

“다음에 한번 자리를 마련하지요.”

글렌은 그리 말하고는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의 뒤를 나디아가 쪼르르 따라붙는다.

그녀가 멍하게 서 있는 그레이스를 스쳐 지나가는 순간, 두 여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기죽은 듯 울상을 짓고 있던 나디아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진 건 그 순간이었다.

“풋.”

그레이스 부인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저 요망한 계집이 자신을 비웃는 소리를.

“……!”

찰나의 순간이 흐르자마자 나디아는 다시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글렌의 뒤로 따라붙어 버렸다.

그 덕에 그레이스 부인은 그저 노기로 온 몸을 부들부들 떨기만 해야 했다.

여기서 방금 저 여자의 표정을 보았느냐고 난동을 부려 봤자 제 평판만 깎아먹는 짓이 될 터이다.

“저, 저……!”

건방지기 짝이 없는 것 같으니라고!

고상했던 노부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온갖 빛깔로 변해 간다.

머리끝까지 분노한 그녀는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가는 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 우뚝 선 채로 파르르 떨어야 했다.

그때, 이름 모를 시종의 목소리가 그녀의 정신을 현실로 끄집어 올렸다.

“저어, 노부인.”

“…….”

“자택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마차를 준비해드릴까요?”

그레이스 부인은 침착하게 생각하고자 애썼다.

‘뭔가 잘못됐어. 틀림없이 무언가 잘못됐어.’

조카인 글렌이 발라지트의 딸을 감싸면서 자신에겐 망신을 주다니.

저 사특한 계집이 무언가 다른 수를 쓴 게 틀림없다.

‘하지만 오늘은 내 독대를 받아 주지 않겠지.’

마침 오랜 여정 때문에 피로가 쌓였다는 핑계도 있으니 말이다.

괜히 독대를 청했다가 거절당하기라도 한다면 제 체면이 더욱 깎여 나리라.

그녀는 하릴 없이 이번 한 번만은 물러서야 했다.

“그래, 마차를 준비해 주렴.”

하지만 목소리엔 어쩔 수 없는 초조함이 가득 묻어 나왔다.

어느 틈에 윈터펠 가의 식솔들을 제 편으로 만든 것이지? 대체 무슨 수로?

‘이대로라면 조만간 완전히 주도권을 빼앗기게 될지도 몰라.’

까득. 그녀의 입가에서 이 갈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 * *

귀환 행렬에는 출발할 때만 해도 없던 인물이 몇 존재했다.

개중 하나가 발롱 성에서 구출된 드워프들이었는데, 나디아는 그들에게 함께 윈터펠로 돌아갈 것을 권유했고, 그들은 나디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녀가 본성에 도착하자마자 한 일은 바로 그들을 착실하게 부려먹는 것이었다.

드워프들과 내성의 행정관들, 그리고 영주인 글렌까지 참석한 회의.

나디아는 우선 기존에 쓰던 농기구의 개조를 명했다. 쟁기에 흙을 갈아엎는 부분을 추가하는 방식이었다.

미리 글렌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부분이기에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농기구 제작엔 드워프 장인의 기술력까진 필요하지 않으니, 영지의 대장장이를 지휘해 대량 생산하도록.”

그때, 미아르가 손을 들어 물었다.

“그럼 판금 갑옷의 생산은 미뤄지는 겁니까?”

“마을에 갔던 드워프들이 다시 돌아올 때가 되었지. 그들이 돌아오면 함께 작업을 재개하도록 해.”

“으음…… 그럼 판금 갑옷의 제작과 농기구 개량을 함께 진행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잘 알아들었네.”

그러자 경악한 음성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진다.

“아니, 잠시만요! 이거 계약할 때와 이야기가 다르지 않습니까! 일주일에 두 번은 휴일을 주신다면서요!”

“이, 이 작업량이라면 이틀은 고사하고 일요일 하루 쉬는 것도 아슬아슬합니다!”

“어머, 그 밑에 있는 조항은 못 읽어 보았나 봐.”

나디아가 안타깝다는 듯 눈썹을 늘어트리며 책장으로 걸어갔다. 마침 회의실 안이라 계약서 사본이 지척에 존재했던 것이다.

나디아는 드워프들에게 그들이 손수 서명한 계약서를 들이밀며 설명해 주었다.

“이거 봐. 3번 조항 밑에 추가적인 조건을 달아 놨잖아. 일주일에 이틀의 휴일을 보장하되, 불가피한 상황에서는 추가 근무를 요구할 수 있다. 그 대신 추가로 근무한 시간에 대해서는 두 배의 보수를 지불한다.”

“하지만 그, 그건 불가피한 상황일 때의 이야기잖습니까?”

“영지민들이 당장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농기구 개조가 왜 급한 일이 아니지? 거기다 그대들 둘이서 모든 작업을 하라는 것이 아니잖아. 인간 대장장이들을 얼마든지 부려 먹…… 아니, 지휘해도 좋아.”

“그럼 판금 갑옷을 만드는 일은 왜 급합니까? 당장 전쟁이 일어나는 것도 아닐 텐데요.”

“북부에는 원래 예기치 못한 몬스터 웨이브가 종종 일어나. 설마 알지 못했나?”

“…….”

“몬스터를 토벌하며 새 기병부대의 위력을 시험할 생각이야. 그러기 위해서는 미리 훈련을 거칠 필요가 있지.”

할 말이 없어진 드워프들이 입을 꾹 다물어야 했다. 나디아는 한 술 더 떠서 덧붙였다.

“아 참, 등자 제작도 그대들의 일인 건 알고 있겠지?”

“예에? 그건 저희들의 기술력이 필요한 일이 아닌…….”

“그렇긴 하지만 등자의 존재는 소수의 인원만 아는 기밀이잖나. 어중이떠중이 같은 기술자들에게까지 누설하고 싶진 않아. 드워프들은 신의를 잘 지키기로 유명한 종족이잖아.”

“무,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그래, 그러니 그대들에게만 맡기고 싶은 거야. 그렇게 한다면 최소한 제작 과정에서 말이 흘러 나갈 염려는 없을 테니까.”

“큼, 크흠.”

대놓고 띄워 주는 말에 드워프들이 민망하다는 듯 헛기침을 한다.

하지만 입꼬리가 실룩거리는 모양새가 기분이 나쁘진 않아 보였다.

“큼, 후작 부인께서 저희를 믿어 주신다니 그것 참 영광입니다.”

“부디 내 기대에 부응해 줬으면 좋겠군.”

“거참……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끝내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요.”

그러더니 제 발로 노동 지옥에 들어가 버린다.

그 모습을 지척에서 지켜보던 행정관들은 마음 깊이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띄워 주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어마어마한 일감을 다 떠넘기다니.

‘자기 종족에 대해 자부심이 남다르다더니 금방 넘어가 버리네…….’

‘참 다루기 쉽다, 쉬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들이 기술직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리도 다행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들이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였다. 드워프들에게 일감을 떠넘긴 나디아가 그들에게도 시선을 던졌다.

“그럼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지.”

“예?”

이상하다. 왜 마님이 우릴 보며 말씀하시지?

묘한 공포감이 등허리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다.

개중 눈치 빠른 몇몇은 금세 알아차렸다. 농기구를 개조하는 안건만 논할 생각이었다면 굳이 자신들을 부르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을.

“기존의 작부 체계를 조금 개선하고 싶은데…… 우리가 제작한 농기구를 농민들에게 나눠주는 문제와는 달라. 기존에 익숙하던 농사 방식을 바꾸라고 명령하면 불만이 쌓이는 건 당연한 수순이겠지.”

같은 작물을 여러 해 연속으로 재배하면 지력이 소모되어 수확량이 점차 떨어진다.

이를 막기 위해 농민들은 농지를 세 등분하여 2/3에만 식량을 재배하고, 1/3은 농사를 한 해 쉬는 방식을 택해 왔다.

이미 정착된 방식을 뒤엎는 것은 위험을 수반한다. 높은 분들이 제안한 새 작부 체계를 도입했을 때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고 누가 확신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먼저 성과를 보여 주면 돼.”

“일부 농지에만 그대가 제안할 방식을 도입할 생각인가?”

질문한 이는 글렌이었다. 나디아가 그에게 시선을 옮기며 대답했다.

“네, 성공 사례를 보여 준다면 다들 자발적으로 따를 테니까요.”

“……그 정도로 성공을 확신하나?”

“네, 백 퍼센트요.”

새로운 영토를 얻었다지만 아직은 남부의 풍요로운 평야와는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없는 땅을 만들어 낼 수는 없으니, 생산 효율을 높일 수밖에.

“현재는 매해 농경지의 1/3은 농사를 쉬어야 한다는 것, 후작님도 알고 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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