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49/142)

제49화

윈터펠 성의 안채, 개중에서도 가장 개인적인 장소인 서재 안.

주인이 자리를 비운 공간에서 두 인물 간의 신경전이 팽팽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집사, 자네 정말 이럴 건가?”

“죄송합니다, 부인. 하지만 안주인의 인장을 함부로 넘길 수는 없습니다.”

“그거 참 섭섭한 말이군. 누가 들으면 내가 외부인이라고 착각하기라도 하겠어.”

물건을 내놓으라고 억지를 부리는 쪽은 글렌의 고모인 그레이스 부인, 내놓지 못하겠다고 배짱부리는 쪽은 집사장 고든이었다.

아무리 선대 때부터 가주 일가를 모셔온 자라 할지라도, 집사의 신분은 일개 사용인에 불과했다.

고작 사용인 따위가 제 명령을 완강히 거절하다니.

뻣뻣하게 고개를 든 모습을 노려보는 그레이스의 눈초리가 점점 매서워졌다.

하지만 무조건 권위를 내세우며 윽박지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화를 가라앉힌 그녀가 고상하고 귀족적인 태도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이보게, 고든.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안살림을 관리했던 것은 나였네. 정확히 말하자면 자네와 나였지. 그런데도 나를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

“부인께서 많은 도움을 주셨던 점은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때와는 달리 지금 윈터펠 가문엔 엄연히 안주인이 존재하지요. 마님의 허락 없이 인장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

그레이스 부인의 입에서 픽 하고 웃음이 터졌다.

“정말 지금 이 성에 안주인이라는 사람이 있긴 한가?”

“……!”

의문형 문장이었지만 고든은 그녀가 정말 사실을 몰라서 묻는 거라고 믿을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저 의기양양한 표정을 보라. 저건 이미 나디아가 성 안에 없다는 걸 확신하고 있는 표정이다.

‘누군가 정보를 흘린 건가…….’

전대 후작 부인이 작고한 이후, 그레이스 부인은 성의 안살림에 깊게 관여했다.

그러니 아직까지 성 안에 그녀의 끄나풀이 남아 있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리라.

고든은 놀란 기색을 갈무리하며 입을 열었다.

“……발뺌하는 건 의미가 없겠지요. 이미 다 알고 오신 것 같으니.”

“하늘을 손바닥으로 덮을 수는 없지. 며칠 내도록 후작 부인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며 사용인들이 동요하고 있거든.”

그리 말한 그레이스 부인이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모든 일을 원칙대로 처리할 수밖에 없는 저쪽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한다.

그가 자신에게 맞서는 것도 윈터펠 후작가를 향한 충성심이 너무 지나치기에 생긴 일.

그러니 우리는 지금 서로 싸울 때가 아니며, 진정한 적은 따로 있다는 걸 일깨워 주면 순순히 제게 협력하리라.

“자네는 발라지트의 딸이 어디로 향했다고 생각하는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래, 말할 수 없겠지. 어디로 갔는지 모르니까!”

“……자세한 건 말씀드릴 수 없지만 그건 아닙니다. 마님께서는 조만간…….”

“이해가 안 되는군. 왜 그리 그 계집을 감싸는 건가?”

“후작 부인에게 계집이라니요. 아무리 사적인 자리라지만 말을 조심하십시오.”

“뭐?”

그레이스 부인의 눈썹이 실룩였다. 조심?

아쉬운 처지이기에 자존심도 굽히고 손을 내밀었건만 저토록 건방지게 굴 줄이야.

그녀는 말을 잇기 전 부글부글 끓는 속을 가라앉혀야 했다.

“그 계집…… 그래, 자네 말대로 호칭에 신경 쓰지. 후작 부인이 우리 가문을 배신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필이면 글렌이 성을 비웠을 때 후작 부인이 사라진 게 너무 공교롭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

“그녀는 의도를 가지고 우리 가문에 온 것이고, 감시가 허술해진 틈을 타 도망친 거겠지. 틀림없이 영지에 무슨 변고가 있을 거다. 혹은 무언가를 훔쳐 달아났을지도 모르지.”

고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내심 동요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녀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말을 이어 나갔다.

“글렌 그 아이가 돌아오길 하염없이 기다리며 시간 낭비할 틈은 없네. 어서 내게 장부와 안주인의 인장을 넘기게. 영지 내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조사해 봐야 할 것 아닌가?”

우리는 같은 편이라는 걸 인식시키는 동시에 위기감을 심어 준다.

이쯤 했으면 저 놈도 제게 안주인의 권한을 맡겨야 할 당위성을 납득-

“안 됩니다.”

“뭐?!”

……하기는커녕 고민해 보는 기색조차 없었다.

그쯤 되니 분노를 넘어서 가슴이 답답해질 지경이다. 참다못한 그녀가 체면도 잊고 고함을 질렀다.

“지금까지 내 말을 귓등으로 들은 건가! 글렌이 오기 전에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니까!”

“그럴 일은 없습니다. 이건 정말 말씀 안 드리려고 했는데…….”

한숨을 깊게 내쉰 고든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마님께서는 현재 후작님과 함께 계십니다. 그러니 혹여 그분께서 흉계를 꾸미고 도망친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랬으면 자진해서 후작님 곁으로 가지 않으셨겠지요.”

“그, 그 여자가 글렌의 곁에 있다고? 대체 언제부터…….”

“애초에 마님께선 후작님을 뵈러 간다는 서신을 남기고 가셨습니다. 호위인 파비안 경도 함께 대동하셨고요.”

“글렌에게?”

그레이스 부인의 눈동자가 접시만큼 커다래졌다.

나디아가 설마 글렌에게 갔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다.

허나 어찌 됐건 그녀가 전시 상황에 수상쩍은 행동을 보였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그레이스 부인이 끝까지 그 점을 물고 늘어졌다.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의심스럽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전장은 아주 사소한 요인 하나로도 뒤바뀔 수 있다. 그 여자가 그곳에서 무슨 흉계를 벌일지 어떻게 안단 말이냐?”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곳의 일은 후작님께서 알아서 처리하실 겁니다. 그 일과 부인이 마님의 인장을 인수받는 일 사이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단 말입니까?”

“감히……!”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질 않는다. 저 머저리 같은 놈은 이미 발라지트의 딸에게 단단히 포섭된 듯했다.

그레이스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대체 어떤 수작을 부린 거지?’

어떻게 그 단기간 동안 가신들의 호의를 얻어냈단 말인가?

특히 눈앞에 있는 집사장의 경우 세뇌를 당하기라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기에 그녀는 지나치게 집요했다. 그러니까, 생떼를 부리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정말 그 여자가 글렌에게 가긴 한 거냐? 그녀가 남긴 서신 한 통만 믿고 손을 놔 버린 건 아니고?”

“예,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글렌은 왜 여태껏 그녀를 성에 돌려보내지 않은 거냐! 틀림없이 방해하기나 했을 텐데!”

“그거야 모르지요. 곧 돌아오실 테니 직접 물어보십시오.”

“……뭐?”

집사의 입가 떠오른 미소를 본 순간, 그녀는 줄곧 자신을 경계하던 그가 왜 후작 부인의 위치를 순순히 가르쳐 주었는지 깨달았다.

그건 이미 후작 부부가 곧 돌아오리라는 사실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리라.

“후작님께서 발롱 성을 출발하셨다고 합니다. 조만간 두 분께서 함께 귀환하실 겁니다.”

* * *

“큰 승리를 거둔 것을 축하드립니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후작님.”

본성으로 들어오는 입구에는 사용인들이 일렬로 서 그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축하의 인사를 건네는 그들에게 대충 손을 흔들어준 글렌이 말 위에서 뛰어내린다.

그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은 본성의 정문 앞이었다. 희끗한 머리의 노부인이 집사와 함께 정문의 계단을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그는 그레이스 부인을 향해 까딱 묵례하며 말했다.

“다녀왔습니다, 고모님.”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다행이라는 말을 하는 것치곤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보는 눈이 많은 자리라 그런지 철모르는 조카 취급을 하는 대신 공대를 쓰긴 한다.

“운이 좋았지요.”

“운이라는 말로 폄하하기엔 너무나 큰 공을 세우셨습니다.”

고모의 표정을 살피던 글렌은 곧 그녀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알아챌 수 있었다.

너무나 노골적인 시선이라 모르는 척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녀가 이내 나디아를 향해 말을 건넸다.

“어머, 후작 부인도 함께 오셨군요. 마찬가지로 무사해 보여서 다행입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인.”

“후작 부인께서 영주님과 함께 귀환하실 줄이야. 처음에 성을 떠나 전장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깜짝 놀랐어요. 왜 그런 위험한 장소에 가신 건가요?”

그야 첩자 짓을 하려 했겠지, 뭐.

그레이스 부인이 뻔히 짐작하는 사실을 굳이 공공연히 묻는 건 나디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였다.

일개 귀부인이 몰래 성을 빠져나가 전쟁터로 향하다니, 누가 봐도 수상한 상황 아닌가?

그녀가 이런 질문을 함으로써 다들 나디아가 발라지트 공작의 첩자라는 걸 다시 한번 상기할 수 있으리라.

대체 무슨 말로 발뺌을 하나 보자.

그녀가 날 선 얼굴로 나디아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후작님이 너무 보고 싶은 나머지 하루도 잠을 잘 수가 없었거든요.”

“뭐?”

돌아온 대답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나디아가 마치 연극 속 비련의 여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아련하게 말했다.

“이러다가 정말 죽을 것 같아 실례를 무릅쓰고 그분이 계신 곳으로 향했답니다. 후작님이 돌아오시길 기다렸다간 상사병에 걸렸을지도 몰라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마터면 혼자서 연극 찍고 있냐는 고함이 터져 나올 뻔했다.

수줍은 여인을 연기하는 모양새가 어쩌면 그리도 가증스러운지.

“후작님을 그렇게 사랑하신다면 그분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셨어야지요. 후작 부인의 존재가 방해가 될 거라는 생각은 못 해 보셨습니까?”

“그건……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비록 연기라지만 기죽은 듯 시선을 내리까는 나디아의 모습에 그레이스의 속이 통쾌해졌다.

지금이 기회라고 빠르게 판단 내린 그레이스가 연신 언성을 높였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지, 후작 부인이 적군에 인질로 잡히기라도 했다면 어쩔 뻔했나요? 만일 그랬다면 오늘날 승전도 없는 일이 되었겠지요. 생각이 짧아도 너무 짧으십니다.”

“…….”

제 잘못을 알기나 하는지 고개를 푹 숙인 채 답이 없다. 그 꼴이 얼마나 속 시원하던지.

이참에 집안 어른의 권위를 보여 주마.

그녀가 막 꾸중을 이어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누군가 나디아와 그레이스 사이로 한 걸음 다가섰다.

“지스카르 경?”

다가선 이는 다름 아닌 기사 단장 지스카르였다.

그녀는 지스카르의 개입에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저 남자가 윈터펠의 충신이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

게다가 나디아가 전장에 난입하는 바람에 적잖이 방해를 받았을 테니 분명 불만이 쌓여 있…….

“마님께 말이 너무 심하신 것 아닙니까?”

저 인간은 또 왜 저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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