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아, 미리 말해 두는 것을 잊어먹었군. 선두에서 나와 함께 입성하게 될 거다.”
“그렇게 말씀하실 것 같아서 미리 얘기하려고요. 전 마차에 타고 입성할 거예요.”
“뭐?”
“굳이 화려한 마차가 아니어도 돼요. 행진 도중에 제가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그렇지만…… 그대는 이번 영지전의 최대 공로자인데.”
“그러니까 하는 말이에요! 제가 승리에 기여했다는 소식이 퍼지면 안 돼요! 저는 어디까지나 후작님께 눈이 멀어 전쟁터까지 쫓아온 철없는 여자가 되어야 한다고요.”
“?”
글렌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칭송받아 마땅한 공로를 세우고도 왜 악명을 자처하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그의 의문을 눈치챈 듯, 나디아가 빠르게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아버지는 아직 저를 본인의 아군이라고 믿고 있어요. 그런데 제가 후작님과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당당하게 귀환했다는 소식이 퍼지면 아버지가 저를 의심하지 않겠어요?”
“…….”
“이중 첩자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언젠가 아버지가 저를 신뢰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용하게 사용할 날이 올 거예요. 조금 욕먹는 게 두렵다고 가지고 있는 패를 버릴 수는 없죠.”
“…….”
그는 잠시 동안 그녀가 방금 무슨 말을 한 건지 머릿속으로 정리해야 했다.
발라지트 공작은 나디아를 자기 수족이라고 믿고 있다. 그랬으니 그녀를 북부로 시집보내는 것에 동의했겠지.
그런데 사실 나디아는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다.
여태껏 그녀가 보여 준 모든 행동, 그러니까 윈터펠을 부강하게 만든 노력들이 그 근거였다.
하지만 그녀는 친정인 발라지트 공작가에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한 적은 없었다.
물론 글렌 역시 나디아가 그런 일까지 하며 제 진심을 증명하길 바라는 건 아니다.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그로서는 때로는 원수보다 못한 가족이 있다는 걸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윈터펠의 고초를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진실한 사랑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그러니 그녀에게 함께 자라 온 가족의 등에 칼을 꽂는 짓까지 강요하고 싶진 않았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발라지트 공작과 내가 정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어쩌면 지금처럼 조용히 경쟁 구도를 유지하기만 할 수도 있는 일이고…… 무엇보다 그건 그대에게 이건 너무 잔인한 일…….”
“아니요.”
나디아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머지않은 미래에 큰 싸움이 일어나게 될 거예요. 사실은 후작님도 짐작하고 계시잖아요.”
“…….”
사실 그건 글렌 역시 본능적으로 어렴풋하게 짐작하고 있는 미래였다.
언젠가 남부와 북부는 크게 부딪히게 될 것이다. 그건 나디아가 남편과 아버지 중 한 명을 선택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된다면 나를 선택하겠다고…….’
그 순간 무언가 명치 깊은 곳에서 벅차오르는 듯한 감각이 느껴진다. 그는 울렁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기 위해 한동안 입을 꾹 다물어야 했다.
마침내 글렌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를 위해서…… 가족을 저버릴 각오를 다진 건가? 오로지 나를 위해서?”
나디아는 생각했다.
발라지트 가를 배신하는 건 맞는데, 딱히 그쪽을 위해서는 아니라고.
‘여기서 아버지든 동생이든 다 지옥에나 떨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하면 너무 미친 여자처럼 보이겠지?’
아무리 사랑에 눈이 멀었다는 설정이라 해도 지킬 선이 있는 법이다.
과거에 나디아의 가족들이 그녀를 얼마나 처참하고 모욕적인 방식으로 죽였는지 저쪽에선 알지 못할 테니 말이다.
고민 끝에 그녀는 망설이듯 시선을 아래로 내리 깔았다.
그러고는 손끝으로 글렌의 옷자락을 살짝, 아주 살짝 붙잡으며 말했다.
“되도록이면 그런 일이 없길 바라지만……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잖아요.”
“…….”
“저는 이제 윈터펠 가의 사람인걸요.”
“…….”
그 말대로 그녀는 이제 윈터펠 가문의 식솔이다.
그리고 그건 나디아가 글렌이 지켜야 할 제 울타리 안의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새삼스레 그 사실을 깨달은 그의 눈빛이 여러 가지 감정으로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시선을 정면에서 받고 있는 나디아는-
‘너, 너무 많이 나갔나……?’
제 언사가 너무 과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알을 도르륵 굴리는 중이었다.
아무리 사랑에 미쳤다는 설정이라도 방금 그건 좀 이상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겨우 윈터펠 가 사람들의 신뢰를 얻었는데 방금 일로 다시 의심을 사는…….
덥석.
“……!”
그런데 그때, 무언가 그녀의 어깨를 당하게 붙드는 감각이 느껴졌다. 바로 글렌의 손길이었다.
불시에 그녀의 양 어깨를 붙잡은 그가 감정이 북받친 듯 먹먹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이제는 그대의 말이 진실이라는 걸 신뢰하고 있다.”
“저, 자, 잠시만요.”
“직접 가족을 해치게 된다면 평생토록 마음속에 가시처럼 남게 될 거다. 그대가 일생 동안 죄책감에 시달리길 바라지는 않아.”
어라? 이런 반응은 생각도 못했는데…….
그녀가 아차 하는 순간에도 글렌의 말소리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니 내게 도움이 되어야 하는 강박을 느끼지는 않았으면 한다. 언젠가 남부와 북부 사이에 큰 충돌이 있을 거라는 말엔 동의하지만…… 가급적 그대가 그 싸움에 직접 휘말리는 일은 없도록 하지.”
“…….”
이쯤 되니 그가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 짐작이 간다. 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생각을 정리한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사랑에 빠진 여자 역할에 충실하게.
“그,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저는 귀환식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당신을 돕고자 하는 건 누가 강요해서도, 제가 강박감을 느껴서도 아니에요.”
“…….”
“그저, 좋아하니까 도움이 되고 싶은 거죠.”
나디아는 제가 말해놓고도 부끄럽다는 듯 시선을 살짝 피했다. 부끄러운 척하는 것치곤 볼이 하나도 안 달아올라 있다.
정작 얼굴에 불이 붙은 건 글렌 쪽이었다. 그가 이를 악물며 생각했다.
‘젠장, 남부 여자들은 원래 이렇게 애정 표현에 거리낌이 없나?’
직설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말은 듣고 또 들어도 도저히 적응되지 않았다.
특히 그녀의 말이 진심이라는 걸 깨닫고 난 이후에는 더욱 낯간지럽게 느껴지는 것 같다.
겨우 열기를 가라앉힌 그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대의 뜻은…… 충분히 알아듣겠다.”
물론 여전히 시선은 마주치지 못하는 상태였다.
“원한다면 귀환식 때 마차 안에서만 있어도 좋아. 큰 공을 세웠다는 사실도 함구령을 내리도록 하지. 하지만 걱정하고 있는 그런 일은…… 되도록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방긋 웃으며 그리 말하는 모습에 퍼뜩 정신이 돌아온다. 글렌은 뒤늦게야 방금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살짝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출발할 시간이 다 되었으니 이만 마차에 올라타도록 해.”
“네, 나중에 봐요, 글렌.”
나디아가 손을 흔들며 마차가 있는 방향으로 총총 뛰어갔다. 그 뒤를 호위기사인 파비안이 졸졸 따라간다.
글렌은 마차 안으로 올라타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그 역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말이 서 있는 장소였다.
“영주님, 출발하시겠습니까?”
“준비도 모두 끝난 것 같은데 시간을 끌 필요가 있나?”
“네, 그럼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그는 출발 명령을 내린 후 말 위에 올라탔다. 말의 안장에는 발받침인 등자가 달려 있지 않았다.
며칠 전, 나디아가 신신당부한 조언 때문이었다.
“참, 제가 알려 드린 물건에 대해서는 당분간 비밀 유지를 했으면 좋겠어요. 돌격 연습은 믿을 만한 사람만 모아서 비밀리에 시켜요. 비장의 한 수는 숨기는 게 좋잖아요?”
등자는 처음 생각해 내는 것이 어렵지, 한 번 보면 누구나 따라 만들 수 있을 만큼 간단한 도구였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이 물건을 사용한다면 그것이 남부에 전해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으리라.
물론 같은 전술을 따라한다 해도 북부군만큼의 효율은 나오지 않을 테지만, 적이 예상치도 못한 한 수를 가지고 있는 게 더 유리할 것이다.
글렌은 그녀의 의견에 동의했고, 실전에서 드러내기 전까진 기밀에 붙이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그날 그녀가 넌지시 알려준 것이 하나 더 있었다. 글렌이 말에 올라탄 채 생각에 잠겼다.
‘신분에도 얽매이지 않고, 기존의 상식도 과감하게 뒤엎을 줄 아는 지휘관이라…….’
머릿속에 남부 세력 영주들의 얼굴이 하나둘씩 떠오른다.
개중에는 멍청한 자도 존재하고, 영리한 자도 존재했지만, 공통점이 없는 건 아니었다.
‘바로 고리타분하고 보수적이라는 것이지.’
가진 것이 많은 귀족 중년 사내들이 으레 그렇듯이 말이다.
게다가 큰 영토를 가진 영주가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성향일 가능성은 낮았다. 그의 기득권을 유지시켜주는 것이 바로 신분이기 때문이다.
당장 떠오르는 이들 중에선 그녀가 말한 것에 부합하는 인물은 없었다.
하지만 유약한 여인이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다 여길 만큼 글렌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녀가 틀린 말을 하지 않는다는 건 몇 번의 경험으로 숙지한 사실 아니던가?
게다가 정체모를 인물을 언급하던 순간 나디아가 지었던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그렇게나 가라앉은 표정은 처음이었지.’
그건 혹시 모를 가능성에 대비하여 신중을 기하는 게 아니라, 적진에 그런 인물이 있다는 걸 이미 확신하고 있다는 뜻이다.
대체 누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