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화
“……별이요?”
너무나 뜬금없는 대답에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쏟아질 듯한 별무리가 보인다. 굉장히 아름다운 광경이긴 했다.
이 와중에 웬 신선놀음을 하느냐는 생각부터 들어서 그렇지.
병사들이 당황해하는 걸 눈치챈 듯, 이지호가 변명하듯 덧붙였다.
“경치 구경 하러 온 게 아니라, 별의 움직임을 기록하러 온 거다.”
“……예?”
“…….”
하지만 그는 곧장 자신의 선택을 후회해야 했다. 수하의 표정에 서린 의아함이 더욱 짙어졌던 것이다.
‘하긴, 이 시대 평민들에게 천문학이란 익숙지 않은 학문일 테니까.’
이지호는 자세한 걸 설명하길 포기했다. 어차피 그에겐 자신의 움직임을 일일이 수하에게 납득시켜야 하는 의무가 없다.
그가 짧게 한숨을 내쉰 뒤 입을 열었다.
“됐다. 이만 돌아가지.”
“예? 아아, 예. 조심해서 내려오십시오.”
그러나 걱정이 무색하게도 높다란 바위를 단숨에 뛰어내리는 움직임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더없이 안정적인 착지다.
오러를 다루는 기사들의 능력은 대단하구나. 수색조는 소리 없이 감탄하며 기사의 뒤를 따랐다.
* * *
발라지트 공작가에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동시에 도착했다.
좋은 소식은 그의 수하 이지호가 독룡 가다비라를 토벌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것이고, 나쁜 소식은 적대 가문이 영지를 넓히는 데에 성공했다는 것이었다.
“뭐? 윈터펠 후작이 발롱 성을 점령해?!”
발라지트 공작이 들고 있던 펜대를 내던지며 노성을 토해냈다. 숫제 입에서 불이라도 뿜을 듯한 노기다.
소식을 전한 보좌관은 잘못한 것도 없이 바짝 엎드려야 했다.
“그 등신 같은 놈은 대체 무슨 짓을 벌였기에 천혜의 요새를 빼앗긴단 말이냐!”
“서, 성 아래에 굴을 파서 화약을 터트렸다고 합니다. 성벽 한 면이 통째로 무너진 모양입니다.”
“빌어먹을!”
쾅! 공작이 책상을 내려치며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발롱 성 인근의 레이나 지역은 나라에서 가장 풍요로운 땅 중 하나이자, 남부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이 되어 주는 땅이었다.
그런 곳이 북부 세력의 소유가 되었다는 건 정말 크나큰 문제였다. 남부에 비해 생산력이 약하다는 게 북부의 약점 아니었던가?
‘게다가 얼마 전에는 막대한 빚마저 해결한 상황이지.’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정적의 세력을 착실하게 꺾어나가고 있었다.
딸을 적진의 중심부에 밀어 넣는 데에 성공했을 때만 해도 승리를 거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순간에 다시 상황이 뒤집어지다니. 역시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다.
공작이 혀를 쯧 차며 물었다.
“나디아에게선 아직 아무 소식이 없느냐?”
“예, 첫째 아가씨로부터 온 연락은 아직 없습니다.”
“하긴…… 그 애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지.”
힘없는 귀부인인 그녀가 전장의 상황을 어떻게 방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제 아랫사람들에게 유능함을 요구하는 자였지만 불가능한 걸 가능하게 만들라고 떼를 쓰진 않았다.
본인의 품격도 품격이거니와 억지를 부린다고 안 되는 일이 가능해지진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상황이 초조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그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역시 나디아를 그쪽으로 시집보낸 건 잘한 선택이었군.’
최소한 북부에서 군사를 움직일 준비를 한다면 미리 알아차릴 수는 있을 테니 말이다.
공작이 한참동안 입을 다물고만 있자, 침묵을 버티지 못한 보좌관이 열심히 알랑방귀를 뀌기 시작했다.
“그래도 지호 경이 가다비라 토벌에 성공한 건 희소식이지 않습니까? 요즘 수도의 저잣거리에는 칼라아이 원정의 윈터펠 후작 대신, 그가 더 화젯거리라고 합니다. 드래곤 슬레이어 아닙니까, 드래곤 슬레이어! 하, 하하…….”
“……그놈이라도 제 역할을 해 줘서 다행이지.”
지난 개선식 이후 세인들이 윈터펠 후작을 찬송하는 소문이 어찌나 거슬렸던지.
역시 그 이방인을 제 편으로 끌어들인 건 탁월한 선택이었던 듯싶다.
그 자가 가져온 희소식마저 없었다면 지금쯤 화병이 도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작은 희소식만으로 만족하기엔 너무나 욕심이 많은 성정이고 말았다.
공작이 아직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보좌관을 향해 입을 연다.
“편지지를 가져와라. 오래간만에 딸의 안부나 물어야겠다.”
* * *
어느덧 윈터펠 영지로 귀환하는 날의 아침이었다.
글렌은 부기사단장인 요한을 임시 성주로 임명한 뒤 귀환 준비를 지시했다.
영주의 명령이 실제로 이행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채 이틀이 지나기도 전에 모두 행장을 꾸린 것이다.
이곳에 올 때와는 달리 전리품이 그득그득 쌓인 행렬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글렌은 어디선가 비슷한 광경을 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신부의 지참금을 실은 행렬이었지, 아마.’
그때만 해도 그 결혼이 자신을 구해 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한 번 나디아에 대한 것을 떠올리자 계속해서 그녀에 관한 생각이 꼬리를 물듯 이어졌다.
그녀는 대체 자신의 어떤 점에 반한 것일까?
어떻게 하면 멀리서 몇 번 마주친 게 전부인 사람에게 그토록 열렬하게 헌신할 수가 있는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제정신이 아니라고 여기기엔 나디아는 너무나 영리하다.
‘천재와 미친 자는 종이 한 장 차이라더니 그런 맥락인가…….’
심지어 그녀는 적대 가문의 사내를 돕기 위해 자기 친아버지마저 배신하는 중이었다.
이쯤 되면 몸과 마음을 헌신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인생을 통째로 갖다 바치는 수준이다.
“글렌, 여기 있었네요.”
“……!”
그때, 그의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듯 갑자기 다가온 나디아가 말을 걸었다.
글렌이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딴 생각에 너무 깊이 빠져 있었던지라 지척까지 다가오는 걸 눈치채지도 못했다.
“출발 전에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나디아는 여성용 행장 위에 두꺼운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어두운 색의 옷과 대조된 탓인지 깨끗하고 하얀 피부가 더욱 빛이 나는 듯했다.
단정한 눈썹 아래로 자리 잡은 녹색 눈동자. 작은 코 밑으로는 혈색이 보기 좋게 도는 입술이 움직이고 있다.
“윈터펠 성에 도착하면 내성까지 행진을 할 거 아녜요, 그 일 말인데…….”
두꺼운 로브를 걸쳤음에도 가늘어 보이는 체구는 북부의 겨울바람 한 번이면 날아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연약해 보였다.
확실히 미인은 미인이다. 아버지와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는 미인.
물론 처음 본 순간부터 예쁜 얼굴이라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 사실이 지금처럼 이렇게 마음 깊이 와 닿은 적은 처음이었다.
왜 지금까지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글렌은 홀린 듯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했다.
“……을 드러내는 일은 없도록 하는 것이 좋겠어요.”
그러던 어느 순간부터 심장이 빠르게 쿵쿵 뛰는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거기다 그녀와 오래도록 시선을 마주하고 있으니 몸에 열이 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눈을 똑바로 마주치는 것조차 힘이 드는 것 같다. 그는 나디아의 시선을 피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가만히 서 있는데도 심장이 쿵 내려앉고, 얼굴에 열이 몰리면서, 특정 인물과 시선을 마주치기 힘들다.
잠시 제 몸 상태에 대해 의문에 빠졌던 글렌은 오래 지나지 않아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든 정황이 명확하게 한 가지 결론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죄책감이구나!’
자신을 몇 번이나 구해 준 여자의 고백에 긍정적으로 화답해 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부채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리라.
거짓으로 나 역시 그대와 같은 마음이라고 받아 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건 그녀에게도 예의가 아니리라. 만일 나디아가 진실을 깨닫게 되면 어마어마한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물론 글렌은 그녀의 마음 깊이 감사하고 있다. 그녀가 타지에서 평안히 생활할 수 있도록 무엇이든 지원할 의향이 있었다.
단, 고백을 받아 주는 것만 빼고.
그건 고마운 마음을 품고 있는 것과 별개의 문제였다. 사람의 마음이, 특히 이성에게 사랑을 느끼는 것이 의지대로 되는 일이 아니…….
“제 말 듣고 있어요?”
그때, 뾰로통한 나디아의 목소리가 그의 의식을 현실로 끄집어 올렸다.
“으, 응?”
“거 봐. 안 듣고 있었잖아요.”
정신을 차리니 가늘게 눈을 뜬 나디아가 자신을 올려다보는 모습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다고 했지. 잠시 동안 무언가에 홀려 다른 세상에 다녀온 듯한 기분이었다.
분명 말소리가 귀에 들어오긴 했는데, 뇌에까지 닿지는 못한 듯했다. 겨우 정신을 차린 그가 대답했다.
“미안하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여러모로 생각하실 게 많을 테니 제가 봐드릴게요. 성으로 들어갈 때 귀환식 말이에요, 그때 제 위치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사실 귀환식이라고 해 봐야 큰 행사는 아니었다. 돌아온 군대가 내성으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 사람들이 모여드는 정도?
하지만 이런 일이 처음인 그녀로서는 신경 쓰일 수밖에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