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142)

제46화

글렌이 가신들의 의견을 하나씩 귀담아 들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친김에 그는 머릿속에 있는 구상을 모두 쏟아내기로 했다.

여럿이서 의견을 주고받다 보면 더 그럴 듯한 그림이 나오리라는 데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

“흉갑에 창대를 받쳐주는 걸쇠를 다는 건 어떻게 생각하나?”

“그것도 꽤나 유용할 듯합니다, 후작님. 만드는 게 그리 어려울 것 같진 않으니 드워프들에게 새 견본품을 만들라고 지시하지요.”

“어, 있는 견본품에서 덧대도 상관없지 않을까요? 미아르랬나? 그 드워프 피곤하다고 드러누웠던데요.”

“어차피 언젠가는 양산해야 되니 미리 만들라고 해.”

대화가 길어진다 싶더니 아예 선 채로 회의가 열려 버린다.

나디아는 사내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다행히도 어느 정도 머리를 굴릴 줄 아는 사람들이네.’

모든 부분을 나디아가 일일이 컨트롤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녀가 큰 청사진을 그려준 이후엔 다른 이들이 빈자리를 채워 넣어 줘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복수의 파트너들은 유능할 필요가 있었다.

다들 1인분은 하려는 모습을 보니 계획이 틀어질 일은 없을 것 같아 다행이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힌트를 줄 필요가 있겠지.’

이지호의 고향에서는 기마충격전술이 오래 전부터 사용된 것 같았다.

그 말인즉 그는 이미 대응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미리 귀띔을 해 줄 필요가 있으리라.

나디아는 한창 열렬히 토론 중인 기사들 사이에 끼어들어가 입을 열었다.

“저, 글렌.”

“음?”

작게 목소리를 내자마자 말소리가 멎는다. 다른 가신들의 시선까지 제게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대화를 끊어서 죄송해요. 하지만 한 가지 언질 드려야 할 부분이 있어서요.”

이번에는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글렌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까지 마님의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그녀가 결코 허튼 말을 하지 않는다는 건 여태까지의 경험으로 습득한 명제였던 것이다.

“물론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약점이 없는 병종이란 존재하지 않아요.”

“그 말이 옳다. 만일 그런 게 존재했다면 군대는 하나의 병종으로 이뤄져 있겠지.”

“저희가 새로 만들 부대 역시 마찬가지예요. 강점이 있다면 약점 역시 존재하기 마련이죠. 적들은 처음엔 당황하겠지만 언젠가 아군을 막을 방법을 생각해낼 거예요.”

나디아가 그를 올려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만일 후작님이 중장기병 부대를 적으로써 맞이해야 된다고 가정하면, 어떤 방식으로 맞서 싸우시겠어요? 가상의 적의 입장에서…… 그래, 후작님이 남부 영주들의 입장이라고 생각해보세요.”

“남부군? 내전이 일어난 상황을 가정한 건가?”

“예를 들자면 그렇다는 말이죠.”

글렌은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적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는 나디아의 지적이 일리가 있다고 여긴 것이다.

적장이 어지간한 멍청이가 아닌 이상, 한 번 당한 이후에는 그에 대한 대비책을 세울 것이다.

그렇다면 그 대비책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는 것이 그의 역할이리라.

‘화살도, 창도 들지 않는 갑옷으로 무장한 기병대의 돌격을 막아내야 한다, 라…….’

같은 기병으로 반격하는 건 자살 행위였다. 왜냐하면 글렌의 적인 남부군의 기병은 북부군보다 약세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남부군의 지휘관이라면 필히 다른 방법을 모색하리라.

“나라면 기존의 장창보다 더 긴 창을 사용하는 중무장 보병부대를 만들겠다.”

한참 고민하던 그가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사람과 달리 말은 전신을 갑옷으로 감쌀 수가 없지. 아주 긴 창으로 기수 대신 말을 노린다. 낙마의 충격 때문에 기병은 한동안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하지. 그 순간을 노린다면 충분히 해볼 만하다고 생각되는군.”

같은 병종을 키워서 대응하겠다는 식의 대답이 나오지 않아 천만다행이라고 나디아는 생각했다.

복수의 파트너가 그렇게 멍청하면 앞으로의 일이 매우 곤란해진다.

글렌이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남부군은 말처럼 그리 쉽게 보병 부대를 운용할 수 없을 것이다.”

“어째서요?”

“우선 첫째, 보병들 대다수는 훈련이 부족한 농민군이다. 기병의 돌격에도 흐트러지지 않고 전열을 유지하는 보병 부대를 만드는 데에는 시간과 돈이 필요하지. 정예병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야.”

그가 손가락을 하나 더 치켜세우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둘째, 기병은 귀족이고 보병은 평민이다.”

“…….”

“적의 주전력을 보병 부대로 상대하면 공로의 대부분이 평민들에게 넘어가는 모양새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지. 멍청한 이유 같겠지만 대다수가 귀족인 지휘관들 입장에선 무시할 수가 없는 문제야.”

“좀 한심해 보이긴 해도 충분히 그럴듯한 이유네요.”

나디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전투의 공로를 논할 때 귀족보다 평민이 앞서게 된다니, 대다수가 귀족 가문 출신인 지휘관들 입장에선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자존심이나 공로 때문만은 아니지. 여태껏 전장에서 기병을 상대하는 것은 기병이었다. 어지간해선 한 번 머릿속에 박힌 편견을 뒤집기는 힘들어.”

“흐음…….”

다른 이들 역시 주군의 의견을 거들기 시작했다.

“영주님의 말이 맞습니다. 제가 살면서 남부 귀족놈들처럼 거만한 인간은 본 적이…… 아아아, 물론 마님이 그렇다는 말은 아니고요!”

“여하튼 전공을 평민과 나누려 하지 않으리라는 건 확실합니다. 최소한 시간이 걸리겠지요.”

“게다가 보병들을 중무장시킬 무구가 하늘에서 뚝딱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요.”

그들의 의견엔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간과한 것,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 알지 못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오직 나디아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

그녀가 낮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입을 연다.

“글렌, 만약의 상황을 가정하고 제 말을 들어주세요.”

“말해 봐라.”

“만약…… 적진에 기존의 상식에도, 신분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가 있다면요?”

“뭐?”

“그 자는 우리의 새 전략을 본 순간, 장창 보병부대를 활용한다는 생각을 곧장 떠올릴 만큼 영리해요. 게다가 평민을 중히 기용하는 것도 꺼리지 않고, 기존의 상식도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는 사람이죠.”

“…….”

“그런 자가 적진에 존재한다면, 심지어 발언권이 큰 지위를 얻는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 * *

왕국 최남단의 영토. 그림자 늪지.

독룡 가다비라의 토벌이 끝날 자리는 어수선하기 그지없었다.

전사자들의 시신을 수습하랴, 드래곤 사체를 뒷정리하랴, 모두가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는 중이었다.

“거기에 손대지 마! 손대는 순간 살이 썩어나갈 거다.”

“하, 하지만 시신은 수습해 줘야…….”

“시신에서 독기가 빠져나갈 때까지 기다리면 되잖아, 이 얼간아!”

상관이 윽박지르는 소리를 무시하며 죽은 전우의 시체를 끌어안는 자도 있었다.

시신에서 묻어나온 독 때문에 살이 문드러지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사방에서 비명소리, 통곡소리, 혹은 신음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이런 난리통에서는 누구 한 사람이 사라져도 빈자리를 느끼기 쉽지 않다.

그렇기에 병사들이 이번 토벌의 주역이 어딘가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해가 완전히 지고 달이 머리 위까지 떠오른 시각, 그들은 그제야 이지호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지호 경은 어디에 가셨지……?”

“그러게 아까부터 안 보이는데.”

“치료를 받으러 가신 거 아냐?”

“그건 아냐. 의무병 막사에서 멀쩡히 걸어 나오시는 모습을 내가 봤는걸.”

이 시간이 되도록 진지 바깥에 있다는 건 그에게 다른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곧 이지호의 부대원들은 두 명씩 수색조를 짜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수색조가 그의 행방을 찾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드래곤 레어 근처의 입구 위쪽, 커다란 바윗덩이에 선 이지호를 발견한 것이다.

“지호 경! 거기서 뭘 하고 계신 겁니까?”

“응?”

이윽고 고개를 꺾어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그가 시선을 돌렸다.

높은 바위 위에 멀쩡히 서서 움직이는 걸 보니 다친 곳은 없어 보인다.

그제야 부대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여기까진 무슨 일이냐?”

“그야 이 시간까지 진지로 안 돌아오시니 무슨 문제가 생겼나 해서 찾아왔지요! 저희는 무슨 사고라도 당해서 못 돌아오시나 했습니다.”

“다들 정신없이 바빠 보여서 말해 둘 틈이 있어야지. 아무튼 걱정을 끼친 건 미안하군.”

“아닙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헌데 이곳엔 왜 오신 겁니까?”

“별 건 아니다. 그냥 살펴볼 것이 있어서.”

“예?”

살펴볼 것? 그 말에 병사들이 어리둥절해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이 어두운 밤에 뭐가 보이기는 하냐는 문제는 둘째 치더라도, 가다비라의 둥지 주변은 이미 낮에 수색이 끝난 장소였던 것이다.

“레어를 한 번 더 수색할 생각이십니까?”

“하늘을 보려고 왔다. 진지 근처는 밝아서 별이 잘 보이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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