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5/142)

제45화

애초에 구조가 매우 간단한 물건인 만큼, 드워프들이 철제 등자를 만드는 데에는 하루면 충분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견본품들이 모두 완성된 날, 기사단 전원이 연무장에 모여 시연을 관람하기로 했다.

시연자는 기사단 최연소이자 나디아의 호위인 파비안 녹스였다.

말에 올라탄 채 연무장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던 그가 투구 덮개를 올리며 말했다.

“이거 진짜 편한데요? 이런 쇳덩이를 걸쳤는데도 아주 안정적입니다.”

위로 올린 투구 덮개 아래로 경탄의 미소가 보인다. 기사단에서 가장 어린 그가 첫 타자로 선정된 이유는 이러했다.

근력이 가장 약한 파비안이 반발력을 버틸 수 있다면 다른 기사들도 충분히 견딜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 섰던 것이다.

그리고 둘째 이유.

“조금 긴장 좀 해 보지 그래. 까딱 잘못하면 크게 다칠지도 모르는데.”

“에이, 제 뼈는 통뼈라서 괜찮습니다. 영주님도 참 별 걱정을.”

어려서 그런지 겁대가리라고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다는 것.

“설령 다치더라도 금방 나아요.”

“……그래, 그럼 네 마음대로 해 보든가.”

“감사합니다.”

파비안이 씨익 웃으며 다시 투구 덮개를 내렸다.

그러고는 말머리를 돌려 연무장 서쪽을 향한다. 임시로 만든 방해물이 위치한 방향이었다.

“저 언제 돌격하면 되나요?”

“준비 신호 같은 것은 없고, 마음의 준비가 되거든 달려라.”

“예!”

누군가 그에게 창을 던져준다. 파비안을 창대를 앞세운 채 곧장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

처음엔 걷듯이 말을 몰다가 점차 속도를 올린다. 최고 속력에 다다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스카르가 신음하듯 말했다.

“후작님, 저 녀석 속도 안 늦추고 그대로 들이받을 생각인가 본데요? 말려야 되는 것 아닙니까?”

“……어차피 여기서 소리쳐 봤자 들리지도 않을 거다.”

말이 전속력으로 달릴 때 나는 소음은 생각보다 시끄럽다.

적병들에게 위압감을 주는 효과가 있긴 하지만 신호를 주고받는 데에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몇몇 선배 기사들이 무의식중에 위험하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파비안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콰아앙!

요란한 굉음과 함께 창끝이 방해물과 부딪혔다. 단단하게 고정해 두었던 방해물이 마치 종이처럼 쉽게 찢어져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비안은 여전히 말 위에 앉아 있었다. 낙마의 기미라고는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말을 관중들 쪽으로 돌려 세운 파비안의 창대에는 철갑이 여러 겹 꿰뚫려 있었다.

글렌이 주먹을 불끈 움켜쥐며 생각했다.

‘상상 이상이군.’

오러의 파괴력에 속도와 무게까지 더해진다면 일반 병사의 피륙 정도는 종잇장처럼 허물어지리라.

예상 이상의 살상력에 놀란 나머지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파비안이 가까이 걸어오는 말발굽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경악의 침묵이 감도는 그때, 들뜬 여자의 목소리가 연무장의 공기를 울렸다.

“실전에서는 효과가 더 대단하겠어요!”

“…….”

이 자리에 있는 여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바로 나디아였다.

꼭 움켜쥔 양손과 발그레하게 상기된 양 뺨은 마치 달콤한 디저트를 처음 먹어보며 감탄하는 소녀처럼 앙증맞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짝사랑하는 남자 앞에서 당사자보다 업무 이야기에 저리 들뜨는 건 아무래도 좀 이상하지 않느냔 말이다.

뭔가 좀 이상하긴 하지만 평소 여자를 접할 기회가 많이 없었던 글렌은 의아해하면서도 끝내 의심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그건 다른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나디아를 힐끔거리며 생각했다.

‘우리 마님…… 정말로 영주님을 마음 깊이 사모하시는가 본데?’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마님은 발라지트 공작이 보낸 첩자가 아니야. 설령 첩자 역할을 시키기 위해 결혼시켰다 할지라도 그 말에 따를 사람이 아니야.’

‘와,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이렇게까지 하는구나.’

나디아가 후작가의 빚을 갚아 주었을 때만 해도 우리의 신뢰를 얻었다가 배신하려는 계책이 아니냐는 말이 있었다.

실제로도 그 말에 동의하는 이의 숫자는 적지 않았다.

당장 기사단장인 지스카르부터 나디아를 믿지 말 것을 열렬하게 설파하고 다녔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디아가 발롱 성의 함락에 일조하면서부터 그 의견은 설득력을 잃어 가기 시작했다.

고작 첩자 하나를 심고자 레이나 지역 전체를 가져다 바치기엔 수지타산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 그들은 드디어 확신을 얻게 되었다.

‘후작 부인의 마음은 진심이다! 개선식 때 했던 고백이 진실이었다니!’

글렌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여자…… 정말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구나……!’

이 모든 일이 고작 첩자 노릇을 하기 위함이었다면 그건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게 아니라, 뼈를 내주고 살을 취하는 꼴이다.

만일 그녀가 고안해 낸 전투 방식이 실용화된다면 기사는 야전의 제왕으로 군림하게 되리라.

그러잖아도 기병 전력이 강한 북부군에게 날개를 달아 주는 모양새다.

경악한 가신들이 눈빛으로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넌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있기 위해서 적진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냐?’

‘아니, 난 못 해.’

‘나도 못 한다.’

‘사랑하는 여자가 모진 말 하면서 상처 줘도 꿋꿋하게 도울 수 있어?’

‘그것도 못 해…….’

‘나라면 진작 나가떨어졌지.’

‘고작 멀리서 몇 번 본 걸로 사람을 이렇게까지 열렬하게 좋아할 수 있나?’

그야말로 연극에서나 나올 법한 운명적인 사랑 아닌가?

모두의 시선이 제게 꽂히고 있다는 걸 알기나 하는지, 나디아는 생글생글 웃으며 전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들 그녀를 바라보며 넋을 놓고 있던 그때,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파비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주님, 저 털끝 하나 다친 곳 없습니다.”

“응? 아, 아아. 파비안. 무사해 보여서 다행이군. 부상 외에 문제점은 없었나?”

겨우 정신을 차린 글렌이 반문했다.

“반발력이 없는 건 아닌데 충분히 버틸 수 있는 정도입니다. 아마 다른 분들도 가능하실 겁니다. 에, 그런데 저는 다른 부분이 좀 걱정되는데요.”

“어떤 점이?”

“지금까지 기병들은 쐐기 대형을 이뤄서 움직였지 않습니까? 그래서 선두에서 전하는 명령이 전달되기 쉬웠지요.”

“그렇지.”

“하지만 적진에 넓은 범위로 충격을 주기 위해선 일렬로 밀집 방진을 이뤄 돌격하는 것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렇게 될 경우엔…….”

“서로 신호를 주고받는 데에 문제가 생기겠군.”

“예, 제 말이 그겁니다.”

말 한 마리의 질주도 요란할진대 기사단 돌격쯤 되면 말 그대로 땅이 울리는 소리가 난다.

한 번 돌격 명령이 떨어지면 그 이후엔 소리로 신호를 전달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글렌이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실전에서 사용하기 전에 좀 더 보완을 할 필요가 있겠군.”

“마침 그에 대해 말할 게 있는데요.”

“음?”

그때, 나디아가 불쑥 끼어들어 글렌과 파비안 사이에 섰다.

저보다 머리 두 개는 작은 여인이 말간 얼굴로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치고 있다. 마주친 눈동자는 싱그러운 녹색이었다.

‘지금 보니 꽤 예쁜 얼굴…… 아니,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그는 순간적으로 두근거릴 뻔한 가슴을 억지로 진정시켜야 했다.

제게 이렇게까지 열렬한 애정을 드러낸 여자는 처음이라 그런지 쉽게 진정되지 않는다. 어쩐지 얼굴이 조금 화끈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남편의 심경을 알기나 하는지, 나디아는 말간 얼굴로 할 말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저는 실전에서 직접 싸운다는 것이 뭔지 몰라요. 무기를 다루는 법을 배운 적도 없고요. 그러니 제가 미처 고려하지 못한 문제점이 필히 생길 거예요. 방금 파비안 경이 지적한 것처럼요. 혹은 제가 떠올리지 못한 더 좋은 방식이 있을 수도 있겠죠. 디테일한 부분에 대해서는 후작님과 다른 기사분들이 보완을 해 주셔야 해요. 저는 할 수 없는 일이거든요.”

“명심하지.”

글렌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윈터펠 가문의 당주씩이나 되어서 타인이 도와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얼간이가 되고 싶진 않다.

글렌이 방금 전 파비안이 보여 줬던 장면을 머릿속으로 다시 그려 보았다.

어린 기사가 창대를 손에 잡는 순간부터 말을 박차고 달려 나가는 모습, 그리고 방해물에 충돌하는 것까지.

마침내 잡힐 듯 잡히지 않을 듯 아리송했던 그림이 선명해진다. 그가 파비안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파비안, 한 번 더 해 볼 수 있겠나?”

“네, 물론이죠. 지금 바로 할까요?”

“이번에는 창대를 팔과 몸통 사이에 끼워서 고정해 봐라. 이쪽이 좀 더 안정적이지 않을까 싶은데.”

“어…… 이런 식으로요?”

“그래, 그 자세에서 창대를 좀 더 앞으로 빼라.”

파비안은 주군이 시킨 대로 충실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창대의 아래쪽을 옆구리에 밀착시키고, 다시 한번 손으로 단단히 붙잡는다.

손힘으로만 붙잡고 있던 창을 팔 전체로 지탱하니 조금 더 안정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느낀 건 파비안뿐만이 아니었는지 다른 기사들도 한 마디씩 거들기 시작한다.

“확실히 좀 더 낫네요.”

“창을 지금보다 더 길게 만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충격을 주기 위해선 더 두껍게 만드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저 자세대로라면 팔 전체로 지탱할 수 있으니 더 무거워져도 다룰 수 있을 겁니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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