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화
그가 결혼한 이후 깨달은 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그의 불가사의한 아내는 결코 말을 허투루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그녀가 또 무슨 생각을 해낸 것인가? 글렌뿐만 아니라 다른 기사들도 귀를 쫑긋 기울였다.
“그게 무슨 뜻이지?”
“판금 갑옷은 화살과 창의 공격에 강해요. 그건 적의 궁수 부대를 두려워할 필요가 적어진다는 뜻이죠.”
나디아가 말을 이었다.
“중갑기병을 이용한 기마 충격 부대를 만들 거예요. 기사들이 그 역할을 수행해 주는 게 알맞겠죠.”
“기마부대를 이용한 충격 전술이라…….”
글렌이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았다.
전신을 판금으로 감싼 채 돌격하는 기마부대. 적진에서 날아오는 화살도 그들을 저지할 수는 없으리라.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기사들이 적진의 보병을 타격한다. 말과 갑옷의 무게, 그리고 돌진하는 속도가 합쳐진다면 그 충격량은 일반 병사들로서는 견뎌 낼 수 없다.
그런 충격량이 적진에 그대로 돌격한다면-
‘아…….’
글렌의 상상이 그 순간 멈췄다. 그녀의 말에는 문제점이 존재했던 것이다.
실제로 갑옷을 입고 말에 탄 채 싸워 본 적 없는 자라면 간과하기 쉬운 문제점.
그의 눈빛에 난처함이 서리기 시작했다.
‘이걸 어떻게…… 기분 상하지 않게 돌려서 얘기해야 하지?’
무거운 갑옷을 입고 싸우는 것, 오러를 다룰 수 있는 자에게는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 갑옷을 입은 채로 말을 타는 것, 이것도 훈련만 열심히 하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갑옷을 입고 말 위에 탄 채 돌격하여 적진에 부딪힌다? 그건 자살행위였다.
적진에 충돌하는 순간 반발력을 못 이기고 말에서 굴러 떨어지리라. 낙마한 기병만큼 해치우기 손쉬운 먹잇감도 또 없는 법이다.
“왜들 그래요?”
“어, 마님, 그러니까 그게…….”
다들 글렌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른 이들 역시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 이, 이거 어떡한담.’
‘엄청 야심차게 계획을 짜신 것 같은데…….’
‘불가능하다고 하면 매우 실망하실지도.’
그러면서 주군을 힐끔거리듯 바라보는데, 그 눈빛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영주님이 어떻게든 잘 돌려서 말해 보세요.’
이런 의리 없는 놈들 같으니라고.
결국 글렌은 무언의 압박을 못 이기고 나서야 했다. 그가 큼큼 헛기침을 몇 번 한 후에 입을 열었다.
“나디아, 윈터펠의 발전에 기여하고픈 그대의 마음은 잘 알겠다. 충분히 이해해. 하지만…….”
“하지만?”
“저 갑옷을 걸친 채 말 위에 올라타서, 충돌의 순간을 버텨 낼 수 있는 기수는 그리 흔치 않을 거다. 적진에 돌격하는 것보단 창을 던지는 편이 낫…….”
“물론 그에 대한 대비책도 세워 놨어요.”
“-겠군. 뭐?!”
무덤덤하게 내던져진 말에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놀란 것은 글렌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대화를 듣고 있던 모두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개중에서 여전히 평온한 것은 나디아 한 명뿐이었다.
그녀가 서류철을 든 하인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기수가 충격을 버티도록 도와주는 도구를 만들라고 지시했거든요. 아직 견본품이 완성되진 않았지만, 형태만 봐도 대충 감이 잡히실 거예요. 이게 그 의뢰서랍니다.”
하얀 손이 서류 더미 사이에 끼인 종이를 하나 꺼내든다. 그러고는 글렌 앞에 그것을 내밀었다.
“……?”
그 위에는 처음 보는 물건의 형태가 그려져 있었다.
* * *
그건 나디아가 회귀하기 전, 첫 번째 생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어릴 때부터 말이라는 동물에 막연히 환상을 품고 있었던 그녀는, 생일선물을 묻는 약혼자에게 승마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말 타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요?”
“네! 생일선물 대신 승마하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공작님께 말씀드리면 승마 선생을…… 아, 이거 공작님이 아시는 일입니까?”
“당연히 아버지 몰래 하는 거죠. 아마 허락 안 하실걸요. 그러니 지호 경에게 부탁하는 거잖아요.”
“…….”
“설마 공작님께 일러바칠 건 아니죠?”
“하아…….”
이지호가 짧게 한숨을 내리며 얼굴을 쓸어내린다.
“제게 모시는 주군을 기만하라는 말을 웃으면서 하시는군요.”
“이 정도 일탈은 여신께서도 눈감아 주실 거예요. 그래서 가르쳐 주실 거예요, 말 거예요?”
발라지트 공작은 굉장히 보수적인 인물로, 자기 딸들이 방안에서 얌전히 수나 놓으며 살길 바라는 자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평판을 유지하여 정략결혼에 써먹을 수 있길 바랐다는 쪽이 옳겠지만 말이다.
그런 아버지에게 귀족 영애가 말을 타고 돌아다닌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나디아가 만일 아버지에게 승마 선생을 붙여달라고 요청한다면 마차는 뒀다가 어디에 쓸 거냐는 대답만 돌아오리라.
결국 그녀는 만만한 약혼자를 붙잡고 늘어질 수밖에 없었다. 무뚝뚝한 것 같으면서도 자신이 해달라는 대로 다 맞춰주는 사람이었으니까.
한숨을 푹푹 내쉬던 이지호가 이윽고 입을 연다.
“나디아 양이 위험할 것 같으면 곧바로 그만둘 겁니다. 말이라는 거 생각보다 큰 동물이라고요. 떨어지면 다칠 수도 있습니다. 아니, 다칩니다.”
“그 정도쯤은 알아요.”
“그걸 감안하고도 꼭! 반드시! 승마를 배우고 싶다면 시간될 때 제 자택으로 오십시오. 아, 바지는 챙겨 오세요.”
“네!”
그리하여 며칠 후, 나디아는 약혼자와 만나고 싶다는 핑계를 대며 그의 집으로 향했다.
따라온 하녀는 당연히 마차를 세워 둔 곳에 마부와 함께 남겨뒀다.
아가씨가 약혼자와 둘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는데 억지로 따라붙을 만큼 용감한 하녀는 흔치 않았다.
그녀가 바지로 갈아입은 다음 뒤뜰의 공터로 나갔을 때, 이지호는 말에 안장을 씌우고 있는 중이었다.
‘저게 내가 탈 말이구나.’
나디아는 침을 꿀꺽 삼키며 커다란 백마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러던 중, 이상한 점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비록 말에 직접 타 본 적은 없지만 말을 탄 기수들은 자주 본 그녀였다.
하지만 안장 아랫부분에 달려 있는 고리는 난생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밑에 달려 있는 그건 뭔가요?”
“무엇인 것 같습니까?”
“음…… 발받침?”
“예, 맞습니다. 어느 정도 익숙해지기 전까지 이걸 사용하십시오.”
가죽을 꼬아 만든 줄을 원형으로 만들어 묶은 뒤, 안장 아랫부분에 달아놓았다.
나디아는 발받침 역할을 하는 가죽 매듭을 밟고 비교적 쉽게 말에 오를 수 있었다.
“와!”
안장 위에 자리를 잡은 그녀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약혼자가 말했던 것처럼 생각보다 높았던 것이다.
하지만 발밑에 받쳐 주는 것이 있으니 균형을 잡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금방 달리는 것까지 배울 수 있겠는데?’
나디아가 볼을 상기시키며 물었다.
“이런 발받침을 만들 생각은 어떻게 하셨어요? 말을 탄 사람들은 많이 봤지만 이런 물건을 사용하는 사람은 못 봤어요!”
“제가 생각해낸 건 아니고, 제 고향에서 사용하는 물건입니다. ‘등자’라고 부르지요.”
“이거 되게 편한데요? 말 위에선 다리 힘만으로 버텨야 한다고 해서 겁을 좀 먹었거든요.”
그녀는 편한 자세를 찾기 위해 안장 위에서 이리저리 몸을 비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정하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발밑에 받쳐주는 도구가 있는 덕분이리라.
나디아가 감탄하며 물었다.
“지호 경의 고향에서는 흔히 사용되는 물건인가요?”
“예, 이것 없이 말을 타는 사람은 드뭅니다.”
“이렇게 유용한 물건이 왜 우리나라에는 아직 전해지지 않았는지 의문이네요.”
“저 역시 그게 궁금합니다. 어쩌면 오러의 파괴력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성향 때문에 전술의 발전이 늦어지는 것일지도…….”
“예? 뭐라고 하셨어요?”
“아, 혼잣말이었습니다. 이제 제가 말을 몰 테니 힘을 빼고 말의 움직임에 몸을 맡기십시오.”
“처, 천천히 해 주세요.”
하지만 잔뜩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도 구보 정도의 속도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디아는 자신이 기마에 소질이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할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이지호의 고향에서 사용한다는 발받침, 이 물건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리라. 그녀는 오래 지나지 않아 그것의 가치를 깨달았다. 고삐를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때 그녀의 굳은 표정을 잘못 이해한 듯, 이지호가 입을 열어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힘드시면 조금 쉬었다가 할까요?”
“조금 어지럽긴 하지만 금방 적응될 것 같아요. 그보다 하나 물어봐도 되나요?”
“물론입니다.”
“고마워요. 기마를 배우는 데는 긴 연습 시간이 필요하다고 들었거든요. 어릴 적부터 오랜 기간 훈련해야 된다고요.”
“일반적으로는 그렇죠.”
그게 바로 기병이 귀한 이유이자, 기마가 귀족 남성의 전유물이라고 불리는 이유였다.
달리는 말 위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무기를 다루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등자라는 물건이 있다면 기병 양성이 훨씬 쉬워질 것 같은데요. 거기에 더해 말 위에서 상체를 움직이는 것이 더 자유로워지겠죠. 전장에서 기병이 차지하는 중요성이 더욱 커질 거예요. 그 말인 곧…….”
“…….”
“기사의 지위가 더욱 공고해진다는 뜻이죠. 그리고 지호 경은 작위를 받은 정식 기사이고요. 왜 고향의 발명품을 여태 전파하지 않으신 건가요?”
“……역시 영민하시군요.”
빈말은 아닌지 그는 꽤 놀란 눈치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이지호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 가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 물건은 저와 단둘이 연습할 때만 사용하고, 다른 이들 앞에서 사용하진 말아주십시오.”
“어째서인가요? 기사의 지위가 높아지면 그건 지호 경에게도 이득이 아니에요?”
“이 물건을 만드는 데에는 고도의 기술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처음 생각해내기는 어려울지 몰라도 한 번 보면 쉽게 따라 만들 수 있는 도구죠. 콜롬버스의 달걀이라고 할까요.”
콜롬버스의 달걀? 그게 뭔데?
나디아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는 설명해 주는 대신 말을 이어나갔다.
“북부 기병 전력은 우리보다 우위입니다. 길게 보면 이쪽이 손해일 수밖에요.”
“아…… 그렇겠군요.”
나디아는 순식간에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언젠가 두 지역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지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당장 편해지기 위해 등자의 존재를 알렸다간 괜히 적의 전력을 늘려주는 꼴밖엔 되지 않는다.
“경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는 알겠어요. 비밀은 꼭 지킬 테니 걱정 말아요.”
“반드시 그래 주셔야 합니다. 북부 기병이 사용하는 군마 품종은 남부의 것보다 덩치가 큰 데다, 북부에는 철광산까지 많으니까요.”
“철광산이요?”
“네.”
물론 북부에 철광석 매장량이 많다는 건 나디아 역시 알고 있는 바였다.
근데 그 얘기가 지금 왜 나오는가? 그녀의 표정에 의아함이 서렸다.
“그게 왜 중요한가요?”
“그건…….”
이지호는 선뜻 대답하려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장난스레 웃으며 말을 잇는다.
“제가 정답을 다 알려 주면 재미가 없겠죠. 나디아 양이 며칠 동안 혼자서 고민해 보세요. 그러고도 답이 떠오르지 않으면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치사해요. 사람 궁금하게 만들어 놓고 대답은 안 해 주다니.”
“나디아 양의 지혜라면 금방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그녀가 일부러 입술을 삐죽 내밀었지만 이지호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결국 나디아는 숙제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 생각하여 찾아내야 했다.
생일을 얼마 앞둔 여름날의 기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