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화
“……!”
그건 나디아가 섬세한 안목을 가지고 있다는 것보다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드워프들이 입을 떡 벌리며 경악한다.
“그 물건을 어떻게……!”
풀무는 화덕 안에 공기를 불어넣을 때에 사용되는 도구였다.
쇠를 달구거나 녹이기 위해 사용되는데, 철을 더욱 섬세하게 다루기 위해선 발전된 양식의 풀무가 필수적이다.
드워프 마을에선 십여 년 전부터 사용된 물건이지만, 그것이 인간 세상에 전해지는 건 미래의 일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저 귀부인이 신식 풀무의 존재를 알고 있단 말인가?
경악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드워프들에게 나디아는 그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다 아는 수가 있죠.”
미래에서 회귀하면 알 수 있답니다. 그녀는 할 수 없는 말을 목구멍 뒤로 삼켜야 했다.
계획한 일을 실현하기 위해선 드워프들의 신식 풀무가 필요하다.
이곳에선 어떻게든 그들을 설득할 필요가 있었다.
“드워프들의 기술까지 전수하는 건 바라지 않아요. 향후 10년 동안 저희가 주문하는 대로 최선을 다해 만들어 주기만 하면 됩니다. 아직도 제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나요?”
“아, 아닙니다, 부인.”
“다행이군요.”
그제야 드워프들 사이에서 안도한 기색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나디아가 특유의 부드러움으로 그들을 안심시켜 주었으니 이제 글렌의 차례였다.
이곳에 당도하기 전 미리 입을 맞춰 놨던 대로, 이번에는 글렌이 입을 열었다.
“자세한 내용은 이걸 읽어 보도록. 조율하고 싶은 점이 있다면 편하게 의견을 내도 좋다.”
하인들이 드워프들 앞으로 계약 조건을 적은 종이를 한 장씩 나눠주었다.
처음엔 쭈뼛쭈뼛 눈치를 보던 드워프들이 하나둘씩 제 앞에 놓인 종이를 집어 든다.
잠시 종이조각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만이 울려 퍼지던 식당은 곧이어 그들이 질문하는 목소리로 요란스러워졌다.
“휴가를 내고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건은 저희가 마음대로 시기를 정할 수 있는 겁니까?”
“윈터펠측에서 의뢰하는 물건에 대한 비밀 유지 조항…… 이건 당연한 부분이지요.”
“한 달치 보수가…… 허억, 저희는 이, 이렇게 많은 금액이 필요 없습니다!”
계약 조항에 대한 몇 가지 질문과 대답, 그리고 조율이 이어졌다.
그들의 목소리가 잦아들었을 때, 글렌이 좌중을 훑어보며 물었다.
“더 질문 있나? 아니면 다른 요구 사항이라도.”
“…….”
그들을 이곳에 붙잡아 놓기 위해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여기서 더한 것을 요구한다면 그건 양심도 없고 생각도 없는 놈이다.
아니나 다를까 글렌의 말에 발언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없는 것 같군. 그럼 이번에는 내가 질문하겠다. 이중에서 일단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자가 있는가?”
“아…….”
“우리 영지에서 일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강제로 가둬 놓지는 않을 테니 안심해라.”
고향으로 돌아가길 원하는 이는 일곱 중 다섯이었다. 나머지 두 명은 임시로 이곳에 남기로 했다.
드워프 마을에 인간 세상을 구경하고 싶다는 이가 있다면 윈터펠 영지를 소개시켜 주기로 합의하기도 했다.
나디아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다들 만족하시나요?”
“예, 구해 주신 것만 해도 감사한데 과분한 호의를…….”
“그럼 그 밑에 서명을 하시면 됩니다.”
“예?”
“지장을 찍으셔도 돼요. 법적 효력이 더 강력해지니까요. 아, 인주가 있으려나?”
이렇게 갑자기? 미아르가 당황하여 눈을 껌벅였다.
‘보통 하루쯤 더 생각해 보라고 시간을 주지 않나?’
하지만 여태껏 받은 융숭한 대우 때문에 토를 달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어쨌거나 저쪽은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 아닌가?
드워프들이 당황한 걸 눈치챈 듯, 나디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뭔가 문제라도?”
“아, 그게…… 이렇게 갑자기 진행될 줄은 몰랐던 터라…….”
“이왕 이렇게 모여 주신 거 빠르게 처리하죠, 뭐.”
“예에…….”
인간들은 원래 이렇게 성격이 급한 것인가? 그의 표정에 의아함이 서렸다.
‘어쩌면 문화 차이일지도 모르지. 우리보다 수명이 짧은 탓도 있겠고.’
미아르는 대충 납득하기로 했다.
그가 막 펜대를 집어 드는 순간, 나디아가 다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참, 계약서에 서명을 마치고 나면 고용 관계가 성립되는 거니까, 앞으로는 저도 말을 낮출 거예요.”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본래 아인종에게 말을 높이는 고위 귀족은 보기 드물었다. 비록 제 쪽이 연장자이긴 했지만 미아르는 그 점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었다.
미아르를 비롯한 네 명의 드워프들이 계약서 위에 서명을 한다. 그 순간 나디아의 입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됐다!’
이것으로 갖추어야 할 조건은 모두 갖춘 셈이다.
일이 순조롭게 풀리니 절로 마음이 너그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나디아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오늘의 계약을 후회하지 않도록 최고의 대우를 약속하지. 그런 의미에서 지금 사용하는 손님방은 몸이 다 낫고 난 뒤에도 계속 사용해도 좋아.”
“하지만 그 방은 지나치게 호화스럽습니다.”
“아니, 최고의 대우를 약속한 것은 우리니까. 편히 생활하면서 컨디션을 유지하는 게 고용주 입장에서도 좋지. 참, 그리고 몸은 많이 회복되었다고 했나?”
“신경 써 주신 덕분에 조만간 원래 컨디션으로 돌아올 것 같습니다.”
“그거 잘됐군.”
“예?”
평범하게 안부를 묻는 것 같으면서도 방금 전에 비해 뉘앙스가 달랐다.
미아르가 떨리는 눈빛으로 나디아를 바라보았다. 빙그레 미소 짓고 있는 나디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일단 대량 생산에 앞서서 견본품을 받고 싶은 물건이 있거든.”
“…….”
그건 노동자를 바라보는 고용주의 미소였다.
어쩐지 ‘밥값은 해야지?’ 라고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고, 미아르는 생각했다.
* * *
슬슬 본진으로의 귀환 명령이 떨어질 때가 됐는데도 이상하게 소식이 없었다.
의아하게 여긴 기사들이 웃전에 건의를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이것뿐이었다.
“마님께서 발롱 성에 좀 더 머물길 바라신다.”
“아니, 왜요? 이곳도 어느 정도 안정된 것 같은데 슬슬 돌아가는 것이…….”
“자세한 건 나도 모르지만 다른 할 일이 있다고 하시는군. 뭐 그럴 만한 일이 있겠지.”
“다른 할 일이요?”
마님께서 또 무언가 일을 벌이고 계신다. 이번에는 대체 무얼 하시려는 계획인가?
원터펠에서 온 가신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드워프들에게 뭘 만들라고 지시했다던데…….”
“오, 드디어 우리도 드워프제 무기를 쓸 수 있는 건가? 마침 이 지역에는 철광석도 많다며.”
“벌써부터 헛물 들이켜지 마라, 이놈아.”
“아니, 그치만 드워프들에게 시킬 일이라는 게 뻔하잖아. 설마 그림을 그리라고 하진 않을 거 아냐?”
“우리 상상력으로는 생각지도 못한 일을 벌이실 수 있어.”
“음…… 그건 그렇군.”
다행스럽게도 그들의 기다림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평화로운 오후, 기사단 휴게실에 찾아온 단장 지스카르가 마님의 명을 받아왔다.
“이중에서 궁술에 자신 있는 자는 손 들어 봐라.”
“궁술이라면 저랑 루크죠, 단장님. 한데 무슨 일이십니까?”
“마님이 궁수 두세 명만 데리고 오라더군. 정확도는 크게 필요없고 힘만 세면 된다 하신다.”
“엥?”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지? 선발된 네 명 이외에도 다른 기사들 역시 지스카르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잠시 후 목적지에 도착한 그들이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연무장 한 켠에 서 있는 후작님과 후작 부인이었다.
그리고 연무장 반대편에 웬 갑옷이 서 있었다. 갑옷을 입은 사람이 아니라, 말 그대로 갑옷이 서 있었다.
단단한 나무 받침대가 갑옷이 쓰러지지 않도록 뒤를 받치고 있다. 모여든 기사들이 그 광경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근데 저거 좀 이상하게 생긴 것 같은데…….”
“그러게.”
연무장에 서 있는 갑옷이 매우 생소한 형태였던 것이다.
우선 갑옷의 전체가 매끄러운 판금으로 덮여 있었다. 그러면서도 관절 부분이 휠 수 있도록 절묘하게 만들어진 구조였다.
“엄청 신기하게 생겼네.”
“마님께서 드워프 장인에게 시켰다는 일이 저거인가?”
이 시대 기사들은 일반적으로 사슬 갑옷을 사용했다.
판금 갑옷을 만드는 데에는 좀 더 발전된 기술력이 필요했는데, 아무리 나디아가 먼저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한들 드워프 장인쯤 되는 실력이 아니라면 이렇게 단시간에 뚝딱 만들지 못했으리라.
정신없이 희한한 갑옷을 살피는 그들에게 나디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마침 왔네요. 도착했으면 말을 하시지.”
“죄송합니다. 처음 보는 형태의 갑옷이라 구경을 하느라…….”
“견본품의 성능을 시험해 봐야 될 것 같아요. 두 명씩 조를 지어서 여기에 서 보세요.”
“예? 아, 넵. 알겠습니다.”
각각 활과 화살 두 개가 손에 쥐어진다. 그들은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나디아의 말을 착실히 따랐다.
“두 명이 동시에 갑옷을 향해 활을 쏘세요. 그 뒤에 즉시 다음 조가 활을 쏘면 돼요. 2조가 활을 쏘는 동안 1조는 다시 준비하시고요.”
“정확히 어디를 맞추면 됩니까?”
“어디든 상관없으니 그냥 갑옷을 맞추기만 해요.”
“넵!”
그야 딱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윽고 네 개의 화살이 연속적으로 허공을 가른다.
팅- 팅-!
하지만 시원하게 공기를 갈랐던 기세와는 달리, 화살은 판금의 방어력 앞에 맥없이 꺾이고 말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디아와 글렌이 동시에 중얼거렸다.
“역시.”
“성공이다. 안 뚫리는군.”
사슬 갑옷의 약점이라면 창과 화살 같은 찌르기 공격에 취약하다는 것이었다.
사실 1:1 결투가 아닌 실제 전장에선 베는 공격보다 찌르는 공격이 더 자주 사용되곤 한다.
판금을 이용한 갑옷을 만든다면 그런 약점을 보완할 수 있으리라.
그가 옆에 서 있는 나디아를 힐끔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어떻게 해낸 거지?’
대체 이 여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어쨌거나 그녀가 또 한 번 공을 세웠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글렌이 감사를 표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대체 언제부터 이런 발상을 한 건가?”
“예전부터 생각은 했는데 기회가 없었죠. 발롱 성 근방에는 철광산이 많으니까 마침 잘됐다 싶었어요.”
“언제 어떻게 해낸 발상이든 그대의 공이 매우 크다. 보급될 수만 있다면 부대의 방어력을 대폭 상승시킬 수 있어.”
“그뿐만이 아니에요.”
나디아가 살짝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철광석이 풍부한 땅을 차지하려 한 건 단순히 방어력을 보완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