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군.’
결국 그는 묘한 기분을 억누른 채 다시 맡은 업무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똑똑.
곁에서 시중을 들던 하인이 재빠르게 달려간다. 열린 문틈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건 바로 기사단장 지스카르였다.
글렌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아, 지스카르 경. 여긴 웬 일인가?”
“레어 탐사대에서 보낸 중간보고입니다. 레어 입구로 추정되는 통로를 발견한 모양입니다.”
“무사히 입구를 찾았다니 다행이군.”
“그것 외에는 특이 사항은 없었지만 시간 되실 때 한번 검토해 보시지요.”
지스카르가 가까이 다가와 책상 위에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그 뒤 바로 돌아가려는 그를 붙잡은 것은 나디아의 목소리였다.
“아, 참. 잠시만 기다려 봐요, 지스카르 경. 제가 전에 따로 시킨 것은 어떻게 되었나요?”
“그 부분은 마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수행했습니다.”
“일전에 시킨 것?”
글렌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나디아가 지스카르에게 따로 명령한 일이라니, 처음 듣는 이야기다.
나디아가 설명했다.
“바쁜 것 같아서 나중에 얘기하려고 했어요. 별 건 아니고, 알테어 백작이 드워프 노예들을 착취하고 있으니 그들의 행방을 찾는 일을 시켰거든요.”
“드워프 노예라니…… 아인종을 노예 삼는 건 불법일 텐데.”
“하지만 알테어 백작은 그런 걸 신경 쓸 자가 아니죠.”
“그건 그렇군.”
그 말엔 글렌도 동의했다.
알테어 영지의 철제 무구는 질이 좋기로 소문이 자자했는데, 여태껏 그는 철 생산량이 많으니 제련 기술이 발달한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왕실에서 엄격히 금한 아인종 납치와 노예 매매를 저지르고 있었을 줄이야.
‘하긴 동족인 영지민들도 착취하는 놈이 다른 종족이라고 대우해 줄 리가 없지.’
하지만 의아한 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글렌이 물었다.
“그런데 그 사실은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건가?”
“정확히는 제가 아니라 제 아버지가 알아낸 거예요. 전에 말했죠? 아버지는 자기 적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약점을 수집한 자료를 가지고 있다고.”
“그렇다면 윈터펠의 약점도 그 자료 속에 들어 있겠군.”
“아,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윈터펠에는 첩자를 들여보내기 힘들었는지 주요한 내용은 없더라고요. 제가 그 첩자 역할을 수행하길 바라며 결혼을 허락해 준 거겠죠.”
알테어 백작이 노예 삼은 드워프들을 감금하고 착취한다는 건 측근 몇 명만이 아는 극비였다.
그렇기에 나디아는 발롱 성을 점거하자마자 지스카르에게 감금된 드워프 노예들을 찾아볼 것을 명해 두었다.
허겁지겁 달아난 알테어 백작이 따로 노예들을 챙겨 줄 리 만무했으니, 그들이 굶주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지스카르가 말했다.
“마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정말 드워프들이 감금되어 있더군요. 만일 발견하는 것이 더 늦어졌더라면 개중 몇 명은 정말 위험했을지도 모릅니다. 탈수 증세로 정신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지금은 몸 상태가 어떤가요?”
“모두 기력을 회복했다고 합니다.”
“정말 다행이네요.”
만일 한 명이라도 죽었다면 그들을 설득하는 것이 곤란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제가 당부한 것처럼 최고의 대우를 해 주었겠지요?”
“예, 그들 모두에게 성의 손님방을 하나씩 내주었습니다. 식사와 시중 역시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잘했어요.”
“만일 그들이 우리 영지 내에서 아사했더라면 드워프들과 마찰이 일어날 뻔했습니다. 역시 영민하시군요.”
“…….”
그 말에 글렌이 기이한 것을 바라보듯 지스카르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한테 그녀를 믿지 말라고 열변을 토하지 않았었나?’
이 자리에 나디아가 있지만 않았더라면 분명 그리 따져 물었을 것이다.
아무리 후작 부인의 명령이었다 해도 그걸 영주인 자신에게 보고하기도 전에 수행하다니.
그녀의 입 발린 말에 속아 넘어가지 말라고 충고하던 사람과 동일 인물이 맞나 싶다.
자신이 한동안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던 탓도 있으니, 글렌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서, 이제 그들을 다시 마을로 돌려보내줄 건가? 드워프족과 좋은 연을 맺어 둘 수 있어서 다행이군.”
“고향으로 돌아가길 원하는 자가 있다면 물론 곧장 돌려보내 줘야지요. 하지만 저는 그 전에 그들을 설득시켜 보고 싶네요. 이곳에 남아 일을 하는 건 어떻겠느냐고요.”
“……?”
그 말에 다들 난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들이 과연 이곳에 남으려고 할까?”
“애초에 노예로 잡힌 드워프들은 인간 세상을 경험해 보고 싶어서 마을을 나섰다가 납치된 거잖아요.”
“그…… 건 그렇지.”
마을에서만 지냈다면 노예상들에게 납치될 일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답답한 드워프 마을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은 여전할 거예요. 저희가 좋은 조건을 약속해 준다면 일부는 저희와 손을 잡지 않겠어요?”
“하지만 그들은 이미 인간에게 호되게 당한 경험이 있다. 과연 우리를 쉽게 신뢰할지 모르겠군.”
“괜찮아요. 사용인들에게 이런 저런 소문들을 많이 들려주라고 말해 뒀거든요. 그들도 갑자기 자기들이 풀려나게 된 사정이 궁금했을 거 아녜요?”
나디아가 살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최근에 이곳 발롱에서 가장 뜨거운 이야깃거리가 뭔지 아시잖아요.”
“……!”
현재 이곳에서 가장 뜨거운 화제, 그건 바로 피터 빌즈와 열 개의 금괴에 대한 것이었다.
내성 바깥으로 나서는 것도 딱히 제지하지 않았으니 드워프들은 필히 그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으리라.
또한 새로운 영주가 이곳 주민들에게 내건 조건이 무엇인지,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이야기 역시도.
글렌이 감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 염두에 둔 거군.”
“일거양득이라고들 하죠.”
나디아가 생각해 둔 일을 실현시키기 위해선 드워프들의 기술력이 필요하다.
아직 인간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그들만의 발전된 기술이.
하지만 나디아는 알테어 백작이 그랬던 것처럼 드워프들을 협박하여 착취하고 싶진 않았다.
드워프들은 자존심이 강한 종족.
강압적인 방식으로는 그들의 진짜 실력을 이끌어낼 수 없다.
그들이 알테어 백작의 휘하에선 절대 신식 기술을 알려 주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나디아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얘기가 나왔으니 이참에 드워프들을 만나 보는 것은 어때요?”
* * *
알테어 백작은 물러났지만 드워프들은 완전히 안심할 수 없었다.
왜냐? 그들은 아직 윈터펠 후작가의 보호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다. 말이 보호지, 드워프들 입장에선 감시로 받아들이는 것도 당연했다.
‘지금은 도움을 주고 있지만 언제 태도가 바뀌어 우리들을 노예 삼을지 모르는 일이야.’
드워프들의 기술을 탐내는 건 어느 영주건 마찬가지 아닌가?
그래서 노예로 잡힌 드워프들 중 가장 연장자인 미아르는 최대한 저자세를 보이기로 했다.
“저희 모두의 목숨을 구해 주신 점은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그동안의 생활 역시 만족스럽다 못해 분에 넘칠 정도였지요. 더 이상 폐를 끼치는 것이 죄송스러울 정도입니다. 하여…….”
드워프 처소까지 직접 발걸음한 영주부부의 눈치를 살피며, 미아르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몸이 전부 회복되는 대로 성을 떠나는 게 낫지 않을까 합니다. 현재로서는 성주님의 도움에 보답해 드릴 수 있는 것이 없어 죄송스럽군요. 보시다시피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터라…….”
“딱히 보답에 대해 부담가질 필요는 없다.”
“물론 보답을 바라고 구해 주신 건 아니겠지만 드워프는 은원을 확실히 끝맺는 종족입니다. 무사히 마을로 돌아간다면 당도하는 즉시 저희의 보물을 선물로 보내 드리려고 합니다.”
인간이 드워프를 납치하여 노예 삼는 목적이야 뻔하다.
‘우리가 만드는 물건이 탐이 난 게지.’
그렇다면 원하는 걸 먼저 줘 버리는 쪽이 낫다. 귀한 드워프제 무기를 손에 쥐여 준다면 우리를 풀어 줄 마음도 생기겠지.
그런데 그때였다.
“푸흡.”
불안한 듯 덧붙인 미아르의 말에 나디아는 그만 짧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
“후, 후작 부인?”
그녀의 웃음을 잘못 오해한 드워프들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하기 시작했다.
설마 그따위 보물 몇 개로 만족할 것 같으냐고 비웃는 것인가?!
초조한 듯 눈치를 살피는 드워프들을 향해 나디아가 입을 열었다.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부러 존칭을 쓰기도 했다.
“그렇게 불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설령 그대들이 마을로 돌아간 후에 입을 싹 닫는다 할지라도 탓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보다 저는 조금 다른 제안을 하고 싶은데요.”
다른 제안? 미아르의 목울대가 꿀꺽 넘어갔다.
“말씀하십시오.”
그는 성주의 부인이 필히 목숨을 구해 준 은혜에 대한 보상을 조율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상상도 해 보지 못한 내용이었다.
“정당한 보수를 받고 우리 영지에서 일하는 건 어때요?”
“예?”
“그대들이 마을에서 뛰쳐나온 건 더 넓은 세상을 구경하기 위함이 아니었나요?”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럼 이대로 드워프 마을에 돌아가기는 조금 아쉬울 텐데요. 그렇다고 계속 인간 세상에 머물기엔 또 노예상들에게 납치당하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되겠죠.”
이쯤 되니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이 간다.
아니나 다를까 나디아의 입에서 예상했던 제안이 흘러나왔다.
“우리 윈터펠 가문에 고용되세요. 안전은 확실히 보장해 드리죠. 휴가 역시 줄 거예요. 원한다면 언제든 고향에 다녀와도 좋아요.”
“…….”
부드러운 어조에도 불구하고 드워프들 사이에서는 긴장된 기색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그럴 만도 한 것이, 납치당해 노예로 착취된 것이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고용 제안을 한다는 말인즉 저들도 드워프의 기술력을 탐내고 있다는 뜻.
지금은 상냥하게 웃고 있지만, 의견차가 생길 경우 언제 돌변하여 노예로 삼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그들의 걱정을 눈치챈 나디아가 말을 덧붙였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자는 마을로 돌려보내 줄게요. 만일 이곳에 남은 동족이 착취당하는 것 같다면 왕실에 신고하세요. 북부는 중앙 정계와 사이가 안 좋거든요. 아인종 노예는 불법이라는 거 아시죠? 저희가 드워프를 노예 삼았다는 고발이 들어온다면 왕실에선 옳다구나 달려들걸요. 저흴 공격하기에 좋은 명분이 생겼으니까요.”
“그렇게까지 저희를 배려해 주신다니 저희 입장에선 안심이 됩니다만…….”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점이 하나 남아 있다.
미아르가 솔직하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후작 부인,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괜찮아요.”
“대체 왜…… 저희에게 이런 호의를 베풀어 주시는지요?”
막말로 알테어 백작처럼 가둬 놓고 착취해도 굴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 그들의 처지 아닌가?
대가없는 호의는 없다. 그것이 미아르가 인간 세상에 나와 배운 첫 번째 교훈이었다.
“우선 아인종을 노예로 착취하는 건 불법이기 때문이죠. 알량한 도덕심 때문이라고 해도 좋아요. 하지만 여러분에게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건 그것 때문만은 아니에요.”
“…….”
“만일 우리가 그대들을 강제로 착취한다면 제 실력을 발휘하지 않을 거잖아요. 알테어 백작 밑에서 그랬듯이요.”
“그, 그건!”
드워프들이 파드득 어깨를 떨었다.
협박당해 착취당하는 상황에서 본래 실력을 발휘하고 싶을 리가 만무하다.
그들은 감시자들의 눈치를 보며 적당히 질이 낮은 물건을 제공해 주곤 했다.
후작 부인에게 품질의 미묘한 차이를 구분할 수 있는 안목이 있다는 건가?
아랫사람이 웃전의 눈을 속였다는 건 불쾌하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하지만 나디아가 지적한 점은 다른 방향이었다.
“성을 점령한 뒤에 이곳의 대장간을 살펴봤어요. 드워프 마을에서 사용하는 신식 풀무가 보이지 않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