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41/142)

제41화

“어…… 영주님의 검을 백 걸음 바깥으로 옮기는 자에게는 금괴 열 개를 내리겠다는데?”

“그게 뭔 소리야?”

그러고 보니 포고문이 걸린 곳으로부터 몇 걸음 떨어진 장소에 웬 검이 한 자루 꽂혀 있었다.

햇빛 아래에서 매끄러운 검신을 자랑하는 은색 검.

무지렁이 농민들이 보기에도 보통 물건이 아니었다. 게다가 검자루에 새겨진 문양은 성탑 깃발에 그려진 문양과 똑같다.

검을 빙 둘러싼 영지민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저게 영주님의 검이라고? 하긴 엄청 비싸 보이긴 하네.”

“그런데 저런 귀한 물건을 왜 저기에 던져 놓은 거지?”

“방금 포고문 내용 못 들었나? 저걸 백 걸음 바깥으로 옮기면 금괴를 주겠다잖아!”

“검 하나를 옮기면 금을 받을 수 있다고? 그게 말이 돼?”

사람들 사이에서 경악한 음성이 퍼져 나갔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쇠로 만들어진 만큼 꽤 무겁긴 하겠지만 팔다리가 전부 달린 성인 남성에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백 걸음이란 거리도 그리 머나먼 거리가 아니다.

거저먹기나 다름없는 일에 금괴를 건다고? 의심부터 드는 게 당연한 이치였다.

“틀림없이 무슨 다른 의도가 있을 거야…….”

“내 말이 그 말이요.”

“대, 대체 뭘 하시려는 거지?”

“그냥 새 영주님이 괴짜이신 거 아닐까? 정말 금 열 덩이를 뿌리려는 의도일지도…….”

그때, 한 아낙이 나서서 입을 열었다.

“내 말을 들어 봐요. 포고문 안에 힌트가 있잖아요.”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그냥 검이 아니고 후작님의 검이잖아요. 귀족가에선 가주에게만 대대로 내려오는 보검이 있다고 들었어요. 제 예상이 맞는다면 저건 윈터펠 후작가의 가보겠죠.”

“그, 그럼 엄청 귀한 물건 아냐? 누가 훔쳐 가면 어쩌려고 저걸 저기에…….”

“네, 바로 그거예요. 영주님은 우리가 감히 당신의 것에 손을 대진 않을지 시험하시는 거라고요!”

“허억!”

듣고 보니 그럴 듯했다. 발롱 성은 본래 알테어 백작의 영지였다.

그러니 윈터펠 후작의 입장에선 새로 얻은 영지민들이 제 통치에 불만을 품진 않을지, 혹여나 반란을 일으키지는 않을지 경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새 영지민들이 얼마나 제게 철저하게 복종하는지 시험해 보려는 속셈이라 할 수 있었다.

“만일 금괴를 탐낸 누군가 저 검에 손을 댄다면…….”

“보, 본보기로 처형당하겠군.”

감히 천한 것 주제에 귀족 가문의 가보에 손을 대다니. 그런 무도한 놈은 죽어 마땅하다!

-라며 목을 칠지도 모른다. 그리고 금을 탐낸 자의 목은 성벽 위에 본보기로 걸리게 되리라.

참혹한 장면을 떠올리는 사람들의 표정이 창백하게 질려 갔다.

“역시 귀족놈들은 참 무섭다니까…….”

“지, 진짜 손을 댔다간 큰일 날 뻔했네.”

금괴라는 말에 혹했던 이들은 남 몰래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촌장이 나서서 겁에 질린 사람들을 다독여 주었다.

“자, 자, 너무 떨지들 마시게나. 저 검에 손끝 하나 대지 않는다면 문제가 일어날 일도 없지 않겠나? 만일 우리가 영주님께 철저하게 엎드리는 모습을 보여 준다면 그분께서도 자비를 베푸실 걸게.”

“어쩌면 세율이 낮아질지도 모르겠네요.”

“그리 된다면 참 좋겠지. 자, 다들 각자 일 보러 가세.”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이튿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나흘이 흐른 후에도 영주의 검은 그 자리에 우뚝 서 있기만 했다.

“꿀꺽.”

마을 사람들은 성문 앞을 지나갈 때마다 목울대를 삼켜야 했다.

금괴 열 덩이. 일반적인 농민으로서는 평생 소처럼 일해도 손에 쥘 수 없는 금액이다.

영주님의 검을 눈에 담을 때마다 금괴에 대한 욕심은 더욱 커져만 갔다.

공고문이 내걸린 지 닷새째 되던 날, 마침내 도전자가 나왔다.

“에잇, 난 해 볼 거야.”

가장 먼저 목숨을 걸어 보겠다고 나선 이는 괄괄한 성질머리로 유명한 마을의 청년, 피터 빌즈였다.

“목숨이 붙어 있어야 호사도 누를 수 있는 거지! 진짜 죽으면 어쩌려고 그러는가?”

누군가는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듯이 그를 말렸고-

“어차피 전 부모님도 일찍 돌아가셨고, 형제자매도 없습니다. 설령 제가 죽는다 해도 슬퍼할 사람은 없을 테죠.”

“우, 우리까지 벌을 받을 수도 있잖아! 영주님께서 연대 책임을 물으시면 어떡할 거야!”

누군가는 겁에 질려 그를 손가락질했다.

그 말에 피터가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영지민들을 다 죽일 리가 있나? 죽어도 나 혼자 죽어. 말릴 생각 말아.”

가난한 농사꾼의 인생이란 뻔하다. 평생 고된 노동에 시달리다 골병에 들어 죽는다.

하다못해 사랑하는 가족이라도 있다면 가족을 보며 인내하련만, 그에게는 그마저도 존재하지 않았다.

‘평생 이렇게 살 바에는 도박 한번 해 보는 게 낫지……!’

그는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 거꾸로 꽂힌 검의 검자루를 잡았다. 조금만 힘을 주니 검이 쉽게 빠져나온다.

“으휴, 한순간의 욕심에 목숨을 거는군!”

마을 사람들은 안타까움에 혀를 차기도 했고, 그의 어리석음을 헐뜯기도 했고, 연대 책임을 묻진 않을지 겁에 질리기도 했다.

온갖 감정이 뒤섞인 시선을 받으며 피터가 마을 중심가를 걸어 나갔다. 한 손에는 영주의 검이 들린 채였다.

제발 무고한 이에게까지 불똥이 튀는 일만은 없기를. 마을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각자의 일터로 뿔뿔이 흩어졌다.

영주성에서 나온 기사가 피터의 집에 찾아온 것은 그날 오후였다.

기사님이 직접 발걸음하셨다는 소식에 마을 사람들은 남몰래 그 광경을 힐끔대기 시작했다. 나무 뒤에 숨어서 몰래 지켜보는 자도 있었다.

“자네가 영주님의 검을 옮긴 피터 빌즈인가?”

“예에……, 그렇습니다.”

올 것이 온 건가?

피터의 목울대가 꿀꺽 넘어갔다. 마을 사람들 앞에선 당당하게 행동하긴 했지만 그라고 겁이 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저, 정말 내 목을 치려는 셈인가?’

기사의 허리춤에 매달린 검이 유난히 더 눈에 잘 들어오는 듯했다.

지금이라도 엎드려서 싹싹 빌어볼까 하는 생각이 든 순간, 기사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

“피터 빌즈는 무릎을 꿇고 영주님이 내리신 상을 받으라!”

“?!”

말이 떨어지자마자 뒤에 서 있던 병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덜컹.

병사 두 명이 함께 들고 있던 궤짝을 땅에 내려놓았다. 열린 궤짝 속에 한가득 들어 있는 것은…….

“으어억?!”

눈이 부시도록 빛나는 황금이었다.

* * *

-세율은 최대 4할로 제한한다.

-의무 노동일은 일주일에 이틀로 한한다.

-양민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선 설령 귀족이라도 정당한 재판을 거쳐야 한다.

-알테어 백작의 통치 기간 내에 영지에서 도망친 자가 다시 돌아온다면 죄를 묻지 않는다.

-이주민에게도 같은 규칙을 적용한다.

“간결하고 알아보기 쉬워서 좋네요.”

나디아가 만족스레 웃으며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마을 각지에 내걸린 포고문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지금쯤 피터 빌즈의 일확천금과 새 영주님이 내건 공문으로 쉴 새 없이 떠들고 있으리라.

나디아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참, 글렌. 검은 돌려받으셨죠?”

“진작 돌려받았다. 검 한 자루로 뭘 하려나 했더니, 우리에 대한 신뢰를 심어주려는 거였군.”

“그래야 통치가 쉬워지거든요.”

평민들은 귀족의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 귀족들에게 ‘아랫것과 한 약속’ 따위는 길바닥에 뒹구는 조약돌보다 가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영주가 실제로 금괴를 하사한 이유를 단순한 변덕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새 영토를 얻은 영주님이 기분이 좋아 재물을 뿌린 것 아니겠느냐고.

포고문을 가지고 나온 행정관들이 이런 말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떻게 피터 빌즈가 일확천금을 얻을 수 있었는가? 그건 그가 영주님이 하신 말씀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검 한 자루를 옮기는 대가로 금괴를 얻을 수 있는 행운은 어제로 끝이다.”

“허나 저 포고문을 보라! 저것 역시 영주님께서 그대들에게 내건 약속이다. 그분께선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권리를, 그리고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체계를 약속하셨다.”

“그대들이 영주님을 신뢰하고 충실히 생업에 종사한다면, 금괴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욱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평생 알테어 백작의 폭정에 시달렸던 그건 매우 신선한 충격이었다. 다들 한동안 새 영주님에 대해 떠드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입을 통해 이 소식이 멀리 퍼져나가리라. 나디아가 바라는 바는 바로 그것이었다.

외부에까지 퍼져 나간 소식을 듣고, 농민들이 다시 발롱 성으로 모여드는 것.

“글렌.”

“응?”

“마음의 준비를 하세요, 조만간 매우 바빠질 테니까요.”

나디아의 예언은 오래 지나지 않아 실현되었다.

* * *

“마님, 화전민 마을의 촌장이 다시 돌아오길 청한다면서 성문 밖에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잘됐네. 적당히 사죄 받는 시늉을 한 뒤에 그들을 받아주도록 해. 아 참, 전에 찾아온 유민들은 어떻게 되었지?”

“땅을 다시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을 수용할 곳이 있나?”

“일단 임시로 천막을 쳤습니다. 그간 방치되었던 폐가를 수리하여 사용할 계획입니다.”

피터 빌즈의 일이 널리 퍼진 이후, 발롱으로 유민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러잖아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 나디아가 더욱 바빠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쉴 새 없이 일하는 건 그녀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나디아가 퀭한 얼굴로 토지 대장을 뒤적이고 있는 글렌에게 말했다.

“글렌, 바쁜 건 알지만 잠깐 시간을 내서 화전민 마을의 촌장과 만나도록 해요. 죄를 묻지 않겠다고는 했지만 사죄를 받는 모습은 보일 필요가 있어요.”

“아, 그러지.”

“고마워요.”

나디아는 해야 할 말만 전하고 다시 제 할 일에 몰두했다.

그런 그녀의 옆모습을 힐끔거리는 시선이 하나 있었다. 바로 글렌이었다.

그가 나디아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생각했다.

‘전생에 영주 한번 못 해 보고 죽은 게 한이 된 건가…….’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올려 묶은 그녀가 행정관들을 향해 일일이 업무를 지시하고 있었다.

요 며칠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피부가 거칠어 보였지만 특유의 생기는 여전했다.

얼핏 보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저건 해야 할 업무니까 피곤해도 억지로 참고 일하는 게 아니다. 진심으로 지금 이 순간을 즐거워하는 얼굴이었다.

영주인 그에게도 서류 업무는 그저 ‘해야 할 일’에 불과했다. 귀찮은 업무지만 의무감에 수행할 뿐이다.

‘대체 왜 윈터펠의 일에 이토록 발 벗고 나서주는 건지…….’

그녀에게 남의 영지 개발에 이토록 열렬한 이유를 묻는다면 분명 이런 대답이 돌아오리라.

‘왜 자꾸 같은 질문을 하시나요?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그렇다니까요!’

그는 나디아의 사랑 고백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쯤 되니 그녀는 늘 진실을 말한 게 아닐까 혼란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자신의 신뢰를 산 뒤 배신하려는 목적이라고 하기엔 그녀가 윈터펠에 해 준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북부의 약점이라면 군사력이 강한 대신 남부보다 생산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윈터펠에 온 이후 빚 문제가 해결되었고, 거기에 더해 풍요로운 농경지까지 얻게 되었다.

살을 내주고 뼈를 얻는 것도 정도껏이지, 이건 과해도 너무 과하다.

물론 나디아가 순수하게 제게 반했을 뿐이고, 사랑하는 남자의 근심을 덜어 주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거라면 지금의 행동이 설명되긴 한다.

근데 그렇다고 하기에는-

‘나한테 너무…… 관심이 없지 않나?’

방금도 딱 해야 할 말만 전하고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리지 않았던가?

쑥스러워서 일부러 관심 없는 척 하는 게 아니다. 그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나디아는 남편보다 일을 더 사랑하는 것 같았다.

글렌의 의아함에는 일리가 있었다. 요 며칠 내내 같은 집무실을 사용하는 동안, 그녀는 정말 업무에만 진심이었던 것이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부끄럽다는 듯 웃는다든가, 외양을 신경 쓴다거나 하는 행동도 없었다.

그저 거추장스러운 긴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묵고 미친 듯이 일에만 몰두할 뿐이었다.

그때, 나디아가 글렌의 시선을 눈치챈 듯 옆을 돌아보았다.

“할 말이 있으세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피곤하면 잠깐 바람 좀 쐬고 와도 돼요.”

그렇게 말하더니 다시 시선을 돌린다.

“…….”

핑크빛 기류 같은 건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삭막한 태도였다.

그렇다고 그녀에게 날 정말 좋아하는 게 맞느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녀의 말이 진실일 리 없다고, 발라지트의 딸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주변인들에게 신신당부한 것이 바로 글렌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갑자기 말을 바꾸기엔 그에게도 사회적 체면이란 게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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