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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40/142)

제40화

“아드리안 경 외 스물두 명이 오늘 아침 성을 떠났습니다. 예정대로라면 보름 후에 돌아올 겁니다.”

“수고했다.”

가신이 들려주는 보고를 들으며 글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 레어를 탐사하기 위한 탐사대가 오늘 아침 남쪽으로 여정을 떠났다.

예정대로라면 2주일 후에 돌아오지만 산속을 헤매다 보면 그보다 시간이 더 걸릴 가능성이 높다.

그 기간 동안 탐사대가 돌아오길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일.

글렌은 점령한 영토를 재정비하기 위해 바쁘게 뛰어다녀야 했다.

오늘은 발롱 성 인근 마을의 시찰이 있는 날. 그는 야트막한 언덕 위에 올라 농토를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윈터펠의 토양과는 달리 땅이 검다. 땅이 검은색을 띤다는 건 표토에 부식이 많다는 뜻이었다.

생산력이 가장 높은 흑토 지대, 그러니까 체르노젬이다.

검은 땅을 바라보고 있자니 글렌의 가슴 속에 생경한 감정이 벅차올랐다.

척박한 농토를 가지고 아등바등 영지 살림을 꾸려 나가야 했던 건 역대 모든 윈터펠 당주들의 한이었다.

‘그런데 이토록 풍요로운 땅이 손에 들어오게 되다니…….’

솔직히 말해서 엄숙한 표정을 유지하는 게 힘들 정도였다. 지금 당장이라도 가신들과 얼싸안고 기쁨을 나누고 싶다.

글렌이 큼큼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성에 남아 있던 토지 대장은 살펴봤나?”

“예,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농토에 비해서 영지민들의 수가 매우 부족합니다. 땅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농민이 없어 몇 년째 노는 농토가 있을 정도지요.”

“그거 참 놀라운 일이군.”

윈터펠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놀란 기색을 숨기지 않고 되물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대책을 세우지 않고 뭘 한 거지? 유민들을 받아들이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백작이라고 손 놓고 있었겠습니까? 사람을 받아들여 봤자 다시 도망가 버리니 일손이 부족해지는 거지요.”

“자세히 보고해 보게.”

그간 행정관들이 파악한 영지의 실상은 이러했다.

영주는 농민들에게 자기 땅을 빌려주고 그에 비례하는 세금을 걷어간다.

여기까지는 어느 영지나 그러하니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그 세율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에 있었다.

농토가 넓으니 한 사람당 맡아야 할 농사일은 많다. 1년 내내 몸을 갈아 일해야 할 정도였다.

그런데 정작 수확철이 되면 손에 쥐는 것은 얼마 없는 것이다. 춘궁기가 되면 굶어 죽는 사람이 나오기도 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못 버티고 영지를 탈주하는 이들이 나오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사람의 수가 줄어드니 한 명에게 몰리는 노동량은 더욱 늘어나게 된다.

그 결과 영지민들이 빠져나가는 속도에 가속이 붙는다.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그쯤 되자 글렌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반문했다.

“그럼 세율을 줄여 주면 될 일 아닌가?”

“그럴 수는 없다는 거겠지요. 알테어 백작에게 농민이란 착취의 대상이지 협상의 대상이 아닐 테니까요.”

“욕심은 그득한데 한 치 앞도 못 내다보는군.”

세율을 조금 낮추더라도 전체 생산량을 늘리는 것이 더 이득일 텐데 말이다.

글렌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일손이 부족한 문제는…… 윈터펠에서 일부 농민들을 이주시키는 걸로 하지.”

“저도 그 방법을 생각해 봤지만 아마 역부족일 겁니다.”

“……그 정도라고?”

이쯤 되니 빈 땅을 놀릴지언정 아랫것들과 협상할 수 없다는 알테어 백작의 뚝심이 대단해 보일 지경이었다.

나디아가 입을 열었다.

“윈터펠의 농민들로도 부족하다면 유민들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겠지요.”

“그보다 더욱 간단한 방법이 있지 않습니까, 마님?”

그녀의 의견에 말을 덧붙인 것은 다름 아닌 기사단장 지스카르였다.

“간단한 방법이라면……?”

“알테어령에서 도망친 영지민들을 다시 붙잡아오는 것이지요. 후작님, 명령만 해 주신다면 제가 군대를 이끌고 인근 야산을 뒤지겠습니다. 화전민들은 필히 마을을 이뤄 살고 있을 겁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터를 잡을 만한 장소란 뻔하지요.”

지스카르가 유한 방법 대신 폭력적인 방법을 쓰려는 이유는 물론 존재했다.

“유민들을 받아들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긴 합니다만…… 알테어 백작령은 높은 세율로 악명이 자자하지 않았습니까? 선뜻 이곳에 찾아오려 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곳의 영주는 이제 나다. 전 주인처럼 높은 세율을 받을 생각은 없어.”

“예, 저를 비롯하여 후작님을 잘 아는 사람들이라면 그 말을 믿겠지요. 하지만 유민들의 입장에선 영주들이란 죄다 어렵고 무서운 귀족들일 뿐입니다.”

“…….”

“후작님이 아무리 세율을 낮추겠다고 선포한다 한들 그들이 쉽사리 그 말을 믿겠습니까? 수확철에 가서 세율을 높인다 하더라도 불만을 토로할 수 없는 것이 힘없는 농민들입니다.”

물론 글렌은 절대 그럴 인물이 아니었지만 그건 그를 잘 아는 주변인들이나 내릴 수 있는 평가였다.

귀족들의 횡포에 시달려 이리저리 떠도는 유민들이 글렌의 말이라고 쉽사리 믿을 리가 없었다.

‘지스카르 경의 말에도 일리는 있어. 조만간 농사를 시작해야 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길을 택할 수는…….’

솔직히 말해서 글렌 역시 이미 안정된 화전민 마을을 폭력적인 방식으로 뒤엎고 싶진 않았다.

그들을 억지로 끌고 오는 것과 자발적으로 찾아오는 이들을 받아 주는 것은 매우 차이가 크다.

이건 글렌 본인의 도덕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런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나디아가 그 점을 지적했다.

“하지만 지스카르 경, 다른 곳에 터를 잡은 화전민들을 억지로 데려왔다간 후작가의 명성에 누가 될지도 몰라요.”

무엇보다 그녀가 그리는 ‘큰 그림’을 위해서 윈터펠 후작가의 도덕성에는 티끌만 한 흠집도 없어야 했다.

그러나 그건 현재로서는 나디아의 머릿속에만 있는 계획. 독심술이 없는 이상에야 반론이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후작 부인의 말씀도 옳습니다. 하지만…….”

지스카르가 정중한 태도로 말을 잇는다.

“곧 농사를 시작해야 하지 않습니까? 물론 올해 수확기에, 그리고 내년 수확기까지도 낮은 세율을 유지한다면 후작님의 진실함이 널리 퍼지겠지요. 그렇지만 그때는 이미 농사철이 지나도 한참 지난 후일 겁니다. 굳이 빠른 길을 내버려 두고 손해를 택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저도 마지막 문장에는 동의해요.”

내전이 발발하기까지는 유예 시간이 길게 남지 않았다.

내전에 대비하기 위해 윈터펠 영지는 빠른 시일 내에 전력을 보강해야 한다. 일이 년씩이나 되는 시간을 버릴 수는 없었다.

“제게 좋은 방법이 있는데, 들어 보실래요?”

“……?”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나디아에게로 꽂힌다. 이 영특하신 마님이 이번에는 또 무슨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일까?

나디아가 글렌의 허리춤을 가리키며 말했다.

“후작님의 검 한 자루를 며칠 동안만 빌려주세요. 그럼 제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요.”

“뭐?”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은 대대로 윈터펠의 가주들에게만 전해지는 영주의 검이었다.

가보인 만큼 귀한 물건이긴 했지만, 고작 검 한 자루로 무엇을 하겠다는 건가.

“검 한 자루? 정말 그걸로 되겠나?”

“예, 검 한 자루면 충분해요.”

“으음…….”

늘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그녀였지만 이번엔 더더욱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의아해하는 글렌을 향해 나디아가 말을 이었다.

“영주가 바뀐 탓에 영지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어요. 알테어 백작보다 더 악랄한 영주에 의해 착취당하는 건 아닐까 하고 말이에요.”

“감히 우리 영주님을 알테어 백작 같은 자와 비교하다니.”

지스카르가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쯧 찬다.

“그들 입장에선 두렵겠지요. 아무튼 글렌, 빌려줄 거예요, 말 거예요? 며칠이면 돼요.”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짐작은 가지 않지만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글렌이 곧장 허리에 찬 검을 풀어 파비안에게로 건네주었다.

“……글렌?”

그의 검을 받기 위해 손을 뻗었던 나디아가 어리둥절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달라고 한 건 자신인데 왜 검이 그리로 가느냐는 눈빛이다.

“꽤 무거워. 그 가는 팔로는 드는 것조차 힘들 거다. 이 검으로 해야 할 일이 있거든 파비안에게 시키도록 해. 힘쓰는 일 하나만큼은 잘할 테니까.”

“그 정도로 약골은 아닌데…….”

“아니, 내 눈엔 그 정도로 약해 보인다. 그나저나 대체 검 하나로 대체 뭘 하겠다는 거지? 내 머리로는 상상도 안 가는군.”

“아, 그건 말이죠.”

미소 지은 나디아가 설명을 시작했다.

* * *

악덕 영주 알테어 백작이 물러나고 새로운 영주가 왔다.

영지민들은 세 사람…… 아니, 두 사람만 모여도 새 영주님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떠들곤 했다.

“귀족들이란 게 죄다 그놈이 그놈이지. 어쩌면 더 못된 놈일지 어떻게 알아?”

“게다가 새 영주님은 예전 영주님이랑 사이가 안 좋았다며……. 어쩌면 우리까지 못살게 괴롭히는 것 아냐?”

악랄한 알테어 백작이 물러났다고 기뻐하는 이는 오히려 극소수였다.

전보다 더욱 착취당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희망적으로 살기에 농민들의 삶은 굉장히 고달팠다.

사람들이 불안에 떠는 동안에도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성탑 위에 걸린 깃발의 문양이 바뀐 지 어느덧 며칠째.

어느 날 아침, 성문 앞에 포고문이 내걸렸다.

“영주님이 포고문을 내렸다는데?”

“어디? 어디? 가 보자!”

새 영주님이 무슨 짓을 벌일까 안절부절못하던 영지민들은 한 달음에 달려가 그 앞으로 모였다.

세율을 낮추는 것까지는 기대도 하지 않으니 더 높이지나 말았으면…….

그러나 포고문에 적힌 내용은 세율에 대한 것도, 의무 부역일에 대한 것도 아니었다.

영주의 이름으로 발표된 포고문은 너무나 생뚱맞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대체 뭐라고 써 놓은 거요? 여기 글자 읽을 수 있는 사람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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