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화
그녀가 턱을 매만지며 말끝을 흐렸다. 나디아가 뜸을 들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연회장 안의 긴장감은 더해져만 갔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 마침내 그녀의 입이 열렸다.
“제가 주는 벌주를 한 잔씩 받는 게 적절할 것 같네요.”
“예?”
기사들이 멍하게 눈을 깜박였다. 벌주를 받으라고?
잔뜩 무게 잡은 거에 비해서 허무할 만큼 시시한 벌이었다.
“그게…… 끝입니까?”
“그래요. 경들이 모두 단장의 죄를 나눠받길 청했으니, 한 명도 빠짐없이 벌주를 마셔야 해요.”
“!”
그제야 나디아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떠오른다.
비로소 그녀의 의향을 깨달은 기사들이 입을 떡 벌렸다.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은…….
‘이거 우리가 한 방 먹은 건가?’
‘그냥 장난이라고?’
다들 제가 제대로 이해한 건지 얼떨떨한 시선을 교환했다. 화등잔만 하게 벌어진 눈이 소처럼 껌벅이고 있었다.
마침내 상황파악을 끝낸 기사들 사이에서 커다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하하핫! 이런 날에 딱 어울리는 처벌입니다.”
“부인께서 내리는 벌주라면 흔쾌히 받지요.”
명문가의 여식이라 어렵게만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훨씬 너그러우신 분 아닌가?
멀게만 느껴졌던 마님에게서 친근감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나디아가 장난스레 고개를 기울이며 묻는다.
“다들 제 결정에 대해 불만이 있나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불만 있는 놈은 나와! 내가 없게 만들어 줄 테니까!”
“하하하하!”
“만족하는 것 같아 다행이네요. 너, 바깥에 있는 하녀들을 불러와라.”
하지만 시원하게 웃던 것도 잠시, 하녀들이 기다렸다는 듯 술잔을 들고 들어오자 웃음소리가 점차 사그라든다.
“하하하, 하…… 하…….”
“저……게 뭐야?”
하녀들이 가져온 술잔은 세숫물도 담을 수 있을 법한 크기였다.
아니, 술잔이 대야만한 게 아니라 그냥 그 자체로 대야인 거다. 진짜 세숫물 담을 때 쓰는 용도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뒤를 술병을 든 하인들이 따르고 있다.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저건 보드카였다.
“…….”
“…….”
연회장에 내려앉은 침묵을 뚫으며 나디아가 말했다.
“벌주라 함은 저 정도는 되어야지요. 그렇지 않나요?”
“아…… 그게…….”
“다들 표정이 왜 그러신가요? 설마 유리잔 하나 정도로 퉁치고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신 건 아니죠?”
“…….”
“…….”
부드럽게 웃는 얼굴이었지만 그 누구도 뻗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알테어 백작을 협박할 때도 저렇게 웃는 낯이었기 때문이다.
기사들이 당황한 얼굴로 서로를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잖아도 술이 조금 들어간 상태에서 보드카를 통째로 들이마신다면 말 그대로 인사불성이 될 터이다.
잠시 기절했다가 눈 떴더니 다음날 아침이었다는 전개가 되리라.
아니, 그냥 기절하는 거면 차라리 다행이지. 만취하여 어떤 추태를 벌일지 상상하기조차 두려웠다.
다들 눈치를 보며 먼저 나서려 하지 않는 와중, 제일 키가 큰 기사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저 정도쯤이야 예삿일이죠! 제가 먼저 마시겠습니다.”
“내가 첫 번째로 마시려고 했는데! 그 다음은 접니다, 저!”
“아니, 두 번째는 나야!”
누군가 시작을 끊자 너도 나도 먼저 마시겠다고 나섰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데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
몇 명의 평기사들이 잔을 받고 뻗어 버린 후, 마침내 기사단장인 지스카르의 차례가 왔다.
나디아가 하녀들을 물리며 말했다.
“단장님께는 제가 직접 따라드리죠.”
“감사합니다, 부인.”
대야 속으로 보드카가 콸콸 쏟아지기 시작한다.
술이 찰랑찰랑 넘쳐흐르는 대야를 받아들며, 지스카르가 생각했다.
‘절대 보통 사람이 아니다.’
나디아는 윈터펠 후작 부인이다. 그 말인즉 평생 북부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여기서 그녀가 중한 벌을 내렸다면 다들 어쩔 수 없이 수긍하면서도 속으로는 불만을 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무례를 지적하지 않고 넘어갔다면 그녀를 만만하게 보는 이가 나오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나디아는 기사들에게 자신이 윗사람이라는 걸 각인하면서도 그들의 호감을 이끌어냈다.
다른 이들은 그저 장난기 많은 귀부인이 자신들을 골려먹은 거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오래 살아온 그만큼은 나디아의 심중을 짐작할 수 있었다.
‘북부에 정말 귀인이 찾아왔는지도 모르겠구나.’
잔을…… 아니, 대야를 입에 대기 직전, 불현 듯 의문 한 가지가 떠오른다.
지스카르가 나디아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한데 마님.”
“네?”
“이걸 마시기 전에 한 가지만 여쭤도 되겠습니까? 지금이 제가 제정신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것 같아 그럽니다.”
“말씀하세요.”
“대체 저희를 왜…… 도와주신 겁니까?”
그 말에 의식을 잃어 가던 이들까지 간신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품고 있었던 의문이었던 것이다.
발라지트 공작의 딸이 왜 우리를 도왔는가?
제게 시선이 꽂히는 걸 느낀 나디아가 픽 웃었다.
“몇 번이나 말해야 해요?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자꾸 말하기는 부끄러운데…….”
아닌 게 아니라 진짜 민망하다. 마음에도 없는 사랑을 공개적인 장소에서 떠들고 다니는 게 민망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녀가 정말 부끄러워지는 마음에 살짝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그야 저는 후작님을 사랑하니까요.”
“……!”
지스카르를 비롯한 기사들의 얼굴에 경악에 퍼져 나갔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나디아가 시집온 대외적인 이유는 ‘윈터펠 후작에게 첫눈에 반했기 때문에’라는 것을.
너무나 말도 안 되는 개소리라고 여겼기에 기억 저편으로 밀어두고 잊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생각을 달리 할 수밖에 없었다.
‘진짜 우리 영주님한테 반한 건가?’
‘왜, 예전에 가시덩굴 허브를 팔아서 빚 갚아주기도 하셨잖아.’
‘그, 그건 다른 목적이 있는 거라고 생각했지……. 설마 진짜 영주님을 사랑해서일 줄은…….’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봐도 선뜻 이해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무장인 그들에게도 짝사랑하는 여자를 따라 적진 한복판으로 이주할 용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대체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용감하다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힐끔 주군인 글렌을 곁눈질하니 그 역시 얼굴이 살짝 달아올라 있다.
그가 민망하다는 듯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얼른 다음 순번 나와서 술을 받아가도록.”
“아, 접니다.”
다들 허세를 부리느라 쉬지도 않고 단숨에 들이켰다. 나디아가 중간에 끊어가며 마셔도 된다고 말려도 요지부동이었다.
그들의 논리는 이러했다.
“벌주를 느긋하게 음미해 가며 마시는 놈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답니까?”
일리가 있는 말이긴 하다.
술이라는 건 본래 빨리 마시면 마실수록 빨리 취하는 법이다.
그들을 인사불성으로 만드는 것이 그녀의 목적이었기에, 나디아는 굳이 기사들이 허세 떠는 꼴을 말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채 한 시간이 지나기도 전…….
“토, 토할 것 같아…….”
“여, 영주님이 왜 두 분이시지?”
건장한 기사단 전원이 뻗어 버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방에서 끙끙거리는 곡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간혹 먹은 것을 토해 내는 구역질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글렌이 그녀의 눈을 가려 주며 말했다.
“못 볼 꼴 더 보기 전에 이만 들어가서 쉬는 게 어떻겠나? 다들 연회를 더 이어나갈 상태가 아닌지라…….”
“그래야 될 것 같네요.”
기사들이 사용인들에게 거의 업히다시피 하여 연회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건장한 체구의 사내들이었기에 하인 두 명이 달라붙어야 겨우 옮기는 것이 가능했다.
다시 말해 일손이 부족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는 것이다.
엉망이 된 연회장을 치우랴, 인사불성이 된 사내들을 옮기랴, 사용인들이 숨 가쁘게 이곳저곳을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다들 바빠 보이니 저는 혼자 들어갈게요.”
“그래도 괜찮겠나? 위험할 수도 있으니 내가…….”
“실내로도 이동할 수 있는데 뭐가 위험하겠어요? 고작 5분 거리인 걸요. 저보다 다른 분들을 신경 써 주는 게 좋겠…….”
“우에에에엑!”
“-어요.”
때마침 지척에서 토사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울렸기에, 글렌은 그녀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조심해서 가도록.”
“고생해요.”
서둘러 연회장을 빠져나온 나디아가 로브를 깊게 눌러 썼다.
이때를 대비해 어두운 색의 로브를 입고 온 터라 그녀의 인영은 어둠 속에 금방 녹아들게 되었다.
‘사용인이 찾아오기 전에 빨리 해치워야 해!’
연회장에서 멀어지는 그녀의 발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그녀가 향하는 곳은 침실이 아닌 성주의 집무실이었다.
2층으로 올라가니 컴컴하게 물든 복도가 보인다. 으스스한 광경이었지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디아는 희미한 램프를 앞세운 채 집무실을 향해 걸어갔다.
끼익.
조용한 복도에 경첩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진다.
그녀는 깜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얼른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달칵.
집무실 안은 온통 새까맸지만 촛불을 켤 여유 같은 건 없었다.
나디아는 혹여 램프의 불빛이 창밖에 새어나가기라도 할까 봐 커튼부터 꽁꽁 여며야 했다.
드르륵, 탁.
그러고는 서랍장을 뒤져 양피지 한 장을 골라낸 후, 품속에서 깃펜과 잉크를 꺼냈다.
바닥에 엎드려 글씨를 쓰고 있자니,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가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이 가문은 조상들까지 다 관짝에서 일어나서 나한테 단체로 절해야 해.’
이혼할 때 위자료 거하게 안 챙겨 주기만 해 봐라.
나디아가 입술을 삐죽이며 열심히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 * *
나흘 후.
“앗! 여기 드래곤 레어가 발견되었다는 문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