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142)

제37화

“네, 들어와요.”

문이 열리고 침실에 딸린 거실의 전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디아는 거실 소파에 기대앉아 노트에 무언가를 끄적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파비안이 물었다.

“어라, 쉬고 계신 것 아니었나요?”

“그러려고 했는데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자꾸 떠올라서 말이에요. 기껏 새로 얻은 영토를 알차게 활용하려면 열심히 머리를 굴려야지요.”

“와아…….”

절반은 사실이고 절반은 거짓이었다.

나디아가 지금까지 잠에 들지 않는 이유는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기 위함이 맞긴 했다.

하지만 파비안이 지레짐작하며 감탄하는 이유는 아닐 것이다.

그녀의 고민거리는 따로 존재했다. 쉽사리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에 미간의 주름이 깊어진다.

‘드래곤 레어의 위치…… 어떻게 알려 준담?’

이 지역에 철광산이 많은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 굳이 그녀가 짚어 주지 않아도 알아서 개발이 진행되리라.

토지가 비옥하다는 것 역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니 나디아가 나서지 않아도 된다.

‘근데 이 드래곤 레어는…… 몇 년 후에나 우연찮게 발견되는 거란 말이지.’

나디아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 근처에 와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드래곤 레어의 위치를, 그것도 주인이 이미 죽어 노다지나 다름없는 보물 창고의 위치를 알려 준다니.

누군가 분명 이렇게 물을 것이다.

‘한데 부인께서는 그곳의 위치를 어떻게 알고 계신 겁니까?’

‘…….’

 

대답할 말이 있을 리 만무하다.

기껏 윈터펠과 신뢰를 쌓아가고 있는데 여기서 수상쩍은 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

‘그냥 산에 산책 나갔다가 우연히 발견했다고 해 버려? 아니, 산책하다가 발견할 수 있을 만한 위치가 아니잖아!’

대형 몬스터들이 대개 그러하듯 드래곤 역시 깊은 산속에 둥지를 틀곤 한다.

게다가 하필이면 광맥도 없는 산 속에 위치한 터라 시찰을 나갔다가 우연히 발견했다고 둘러댈 수도 없었다.

어떡한담? 그녀가 곁에 파비안이 있다는 것도 잊고 다른 생각에 빠지려는 순간이었다.

“크흠, 흠.”

민망한 듯한 헛기침 소리가 들려온다. 나디아는 그제야 파비안의 존재를 상기할 수 있었다.

“아, 죄송해요. 생각할 게 좀 있어서……. 그나저나 여긴 무슨 일인가요?”

“승전 파티가 열렸는데 혹여 참석하실까 의향을 여쭈려 왔습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파티요?”

왁자지껄한 자리는 딱 질색이다. 그녀가 손을 휙휙 내저으며 거절했다.

“대충 허기는 때웠으니 됐어요. 요란스러운 자리는 별로 안 좋…….”

아니, 거절하려고 했다.

순간적으로 좋은 생각을 떠올린 나디아는 급히 말을 바꿨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나요?”

“도저히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입은 자를 제외한다면 거의 다 모여 있습니다.”

“그럼 얼굴 한 번 비춰 주는 게 맞겠죠.”

가신들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확실히 정리하는 김에, 겸사겸사 드래곤 레어의 위치도 알려 줘야지.

그녀가 소파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다들 어디에 있나요? 안내해 줘요.”

* * *

“후작님이 장담하신 대로 남서쪽 길에 딱! 알테어 백작이 나타나더라 이 말이지! 그 혼비백산하던 얼굴이 얼마나 웃기던지!”

“크하하하핫!”

“제 몸 하나 지키겠다고 기병을 거의 삼분지 일 가까이 끌고 왔더군. 그만한 병력이 있으면 저항을 시도해 볼 만도 한 것을! 꽁지 빠지게 달아나다가 결국 붙잡혔지 뭔가?”

연회장 안은 기사들이 신나서 떠드는 소리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원래는 빈 공간이었을 곳에 임시로 기다란 테이블이 늘어져 있다. 급조하게 천을 이어 만든 테이블보 위로 어지럽혀진 그릇들.

나디아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정말 난장판이네.’

곱게 자란 그녀로서는 적응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술에 취해 불콰하게 달아오른 남자들만큼 시끄러운 존재가 또 없는 법이다.

어디서부터 끼어들어야 할지 몰라 멍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어디서 찬바람이 들어와? 문 좀 닫고 다…… 허억, 후, 후작 부인!”

“뭐? 후작 부인?”

“마님이 오셨다고?”

후작 부인이라는 단어에 몽롱했던 기사들의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그들의 고개가 곧장 문가로 향했다.

열린 문틈 사이로 어두운 색의 로브를 걸친 여자가 서 있었다.

남부인답게 작은 체구와 앳된 얼굴. 가슴 위로 흘러내린 갈색 머리카락.

진짜 마님이다!

“나디아? 오늘 저녁에는 침실에서 쉬겠다고 하지 않았었나?”

얼어붙은 기사들을 대신해 먼저 나선 것은 다름 아닌 글렌이었다.

제일 상석에서부터 문가로 한달음에 달려간 그가 나디아 앞에 멈춰 섰다.

“그러기로 했는데 파비안 경이 저를 데리러 와서요. 잠시 얼굴 정도는 비추는 게 좋겠죠.”

“잘 생각했다.”

글렌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인가?’

이 남자가 웬 일로? 나디아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그의 손을 잡고 상석으로 향했다.

걸음을 옮기는 동안, 글렌은 머릿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침 잘됐군. 이 기회를 틈타 지스카르 경이 무례를 사죄하게 만들어야겠어.’

주로 내성의 안채에서만 지내는 나디아와 기사단장인 지스카르는 평소에 접할 기회가 많이 없었다.

이대로 어영부영 윈터펠로 돌아가게 된다면 정식으로 사죄받을 기회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제대로 감정의 앙금을 씻어 내지 않으면 추후에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나디아가 글렌 옆에 착석하자 하녀들이 그녀 앞에도 음식과 식기, 그리고 술을 늘어놓아 주었다.

본격적으로 연회가 재개되기 전, 글렌이 기사들을 향해 눈짓을 했다.

그 의미를 빠르게 알아들은 지스카르가 앞으로 걸어 나와 나디아 곁에 섰다.

“저…… 후작 부인.”

말이 쉽사리 나오지 않는지 지스카르는 몇 번이고 헛기침을 한 후에서야 뒷말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지난 회의에서 있었던 무례한 언사를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아, 맞아요. 그거.”

그녀가 방금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긴 했죠.”

“어떤 벌을 내리든 달게 받겠습니다.”

“경이 먼저 제게 잘못을 빌어 줘서 고마워요. 이건 진심이에요.”

생각보다 반응이 유하다. 쉽게 용서하고 넘어갈 생각인 걸까? 글렌의 표정이 밝아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디아에겐 이 문제를 어물쩍 넘길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녀가 이 사건의 발단부터 천천히 짚어 나가기 시작했다.

“우선 지스카르 경이 정확히 어떤 잘못을 했는지부터 짚어 보기로 해요. 그래야 벌의 경중을 정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죠?”

“마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얘기가 빨라서 좋네요. 설령 윗사람이 낸 의견이라 한들, 반대할 만한 근거가 충분하다면 가감없이 반론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해요. 그런 점에서는 그날 지스카르 경이 제 의견에 반대하고 나선 것이 기뻤어요.”

나디아가 검지를 치켜세우며 말을 이었다.

“단, 그 태도가 무례했지요.”

지스카르는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어야 했다.

“후작 부인인 저의 체면은 곧 후작님의 체면. 지스카르 경은 모시는 주군의 얼굴에 먹칠을 한 것과 다름없어요. 제 말에 틀린 점이 있나요?”

“……모두 인정합니다.”

“알고 있다니 다행이군요. 주군을 모욕한 기사에게는 어떤 처벌이 어울릴지…… 고민을 좀 해 봐야겠는데.”

꿀꺽,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연회장 안에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순한 인상과 달리 그녀가 결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이미 깨달은 사실이었다.

자신에 대한 모욕을 절대 그냥 넘겨 줄 사람이 아니다. 떠들썩했던 연회장이 점점 싸늘해지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글렌이 나섰다.

“나디아, 지스카르 경이 그날 무례하게 굴었던 건 충성심이 너무 깊었던 탓이다. 이번 한 번만 너그럽게 용서해 준다면 분명…….”

“제가 경험으로 깨달은 점이 하나 있어요. 바로 유하게 굴면 사람을 만만하게 대한다는 거죠.”

과거에 그녀의 이복동생과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제가 오늘 아무런 처벌 없이 넘어간다면 또 제게 무례를 저지르는 자가 나오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장담하나요?”

“내가 단단히 주의를 주겠다. 약속하지.”

“그럼 제 권위는 다른 이를 통해서만 내세워질 수 있는 건가요? 만일 후작님이 더 이상 저를 존중하라고 명령하지 않는다면 저는 다시 무례를 견뎌야만 하는 입장이 되겠군요.”

“그건…….”

글렌이 선뜻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인다.

당혹스러워하는 것은 그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평소 나디아와 교류가 많았던 파비안 역시 그녀의 태도에 당황하는 중이었다.

‘워, 원래 저런 분이 아니었는데?!’

그가 아슬아슬한 농담을 해도 웃고 넘어가는 분 아니었던가? 자신이 알던 마님과 동일인물이 맞는지 의심될 지경이었다.

이대로라면 지스카르에게 큰 벌이 내려질 것이 분명하다.

비록 마님께 무례를 저질렀다고는 하나 그는 선대 때부터 충성을 바친 중역이며, 다른 가신들에게서 존경받는 연장자다.

그런 지스카르가 큰 곤경에 처하는 모습이 유쾌할 리 없었다.

잠자코 있던 평기사들 중 한 명이 더는 못 보겠다는 듯 앞으로 나선다.

“후작 부인, 저 역시 같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단장님이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 책임을 저도 함께 지길 청합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부인. 제게도 벌을 내려주십시오!”

“저 역시 벌해 주십시오!”

여기저기서 너도 나도 용기를 내어 나서기 시작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단 전원이 벌을 받길 청하게 되었다.

“흐음.”

나디아가 콧소리를 내며 그 모습을 응시했다.

“그러니까 경들은 단장님의 죄를 다 함께 부담하겠다는 거군요. 여럿이서 책임지면 벌의 중함이 덜어질 테니까요.”

“그렇습니다.”

“좋아요. 그럼 계산을 해 보지요. 여태껏 제게 저지른 무례를 여기 모인 모두의 머릿수로 나눈다면…… 어디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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