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142)

제36화

그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얼떨떨해 하는 동안, 바로 앞까지 다가온 여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영지전에서 승리했다 한들 자국 영주의 목숨을 빼앗을 수는 없지요.”

“내, 내 말이 그 말이오! 보상은 충분히 해 주겠소. 당장 나를…….”

“하지만 이런 생각은 안 해 보셨나요, 백작 님?”

여인이 살짝 허리를 숙여 그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대었다.

그리고 소름 끼치는 말이 그녀의 고운 입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알테어 백작은 패전하고 포로로 붙잡힌 것이 수치스러워 자결했다. 귀족의 긍지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남긴 건 작위는 첫째 아들에게 물려준다는 유언뿐이었다…….”

“히, 히이이익!”

“이런 시나리오는 어떤가요? 세인들이 알테어 백작은 과연 귀족의 긍지를 아는 자라며 칭송할 거예요. 마침 긍지라는 걸 좋아하시는 분 같으니 잘됐네요.”

살벌한 내용과 달리 그녀의 목소리만큼은 한없이 나긋했다. 그래서 더더욱 소름이 돋는다.

이곳은 적진의 한복판. 자결로 위장당해 살해당한다 할지라도 진실을 알려 줄 이가 없다는 뜻이었다.

‘여기서 더 버티다간 진짜 죽는다.’

본능적으로 그리 판단 내린 알테어 백작은 그녀의 앞에 엎드려 애걸해야 했다.

“사, 사, 살려 주시오! 목숨만, 목숨만 살려 주시오! 재물은 얼마든지 드리겠소! 무엇이든 드릴 테니 제발 목숨만은……!”

“어머, 협조적인 태도가 참 보기 좋네요.”

로브를 쓴 여인이 기사들을 향해 손짓하자, 어린 얼굴의 기사 한 명이 그녀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다.

“불가침 조약이에요. 잘 읽어 보시고 얌전히 서명해 주시길 바라요.”

“이, 이건…….”

“참, 조항을 협상할 생각은 없으니 그 점 잘 알아 두시고요.”

백작의 시선이 내밀어진 문서를 천천히 훑었다.

갖은 미사여구로 꾸며져 있지만 핵심만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첫째, 알테어 백작가는 향후 30년 동안 윈터펠 후작가를 상대로 군사적인 행동을 보이지 않는다.

둘째, 패전에 대한 대가로 10만 골드를 배상한다.

셋째, 발롱 성을 포함한 레이나 지역의 소유권을 영구적으로 양도한다.

“이건 말도 안 되오!”

백작이 목에 검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소리를 빼액 지르고 말았다.

그만큼 말도 안 되는 조항들이었던 것이다.

“아,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소! 배상금은 그렇다 치더라도 레이나 지역 전역이라니, 이건 너무 과한 처사요!”

“방금 협상의 여지는 없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나디아가 그의 목에 겨눠진 검날을 톡톡 치며 말을 이었다.

“10만 골드라는 돈의 가치는 어마어마하죠. 레이나 지역의 가치는 감히 돈으로 환산할 수도 없고요. 하지만 백작님.”

후드 아래로 드러난 그녀의 입이 환하게 미소짓는다.

“그것들이 과연 백작님의 목숨보다 중요할까요?”

“크읏…….”

“신중히 잘 생각해 보세요. 시간은 3분 드릴게요.”

신중히 생각해 보라면서 시간은 3분만 주겠다니.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억울함을 알아주는 이는 이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다.

일단 살아서 돌아가야 오늘날의 억울함을 만회하든 말든 할 것 아닌가?

결국 그는 울며 겨자 먹기로 나디아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쪽의 요구를…… 들어드리겠소.”

“현명한 판단이에요. 목숨보다 중요한 건 없죠.”

“우, 우선 팔 좀 풀어 주시오. 그래야 서명을 하지.”

“지금 말고요. 나중에 풀어 드릴게요.”

“……?”

나중에? 3분 내에 결정하라고 윽박지른 것치고는 지나치게 느긋한 태도였다. 백작의 얼굴에 의문이 퍼진다.

그리고 의아해하는 건 알테어 백작뿐만이 아니었다. 글렌이 물었다.

“생각이 바뀌기 전에 해치우는 게 낫지 않겠나?”

“나중에 딴소리를 할 수도 있잖아요.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었다는 둥, 자긴 그런 적 없다는 둥, 하면서요.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해야 더 확실해지겠죠.”

“아, 그렇군.”

“성문 앞에 단상을 세우고, 사람들을 불러 모으세요. 증인들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요.”

패배하여 포로로 잡힌 것만 해도 수치스러운데 서커스 광대처럼 사람들 앞에서 구경거리까지 되어야 한다니.

백작의 얼굴이 굴욕감으로 새파랗게 질려갔지만 아무도 그에게 신경 써 주지 않았다.

오히려 마님의 철두철미함에 감탄할 뿐이었다.

‘후작 부인의 말씀이 옳다! 후환은 남겨 두지 않는 편이 좋지.’

‘저 치졸한 놈이라면 나중에 말을 바꾸고도 남아.’

그녀의 철저함이 경탄스러운 한편, 등에 소름이 끼치기도 했다.

웃는 낯으로 협박을 하던 방금 전의 모습 때문이었다. 자결로 위장당해서 죽고 싶지 않으면 순순히 서명하라니.

‘저, 저렇게 순한 얼굴에서 저리 독한 말이 나올 줄이야…….’

‘이래서 사람은 생긴 걸로 판단하지 말아야 해.’

아무래도 영주님께서 아주 독특한 신부를 아내로 맞이한 모양이다.

온화한 성품의 선대 후작 부인에게 적응되어 있었던 가신들은 한껏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항상 나디아의 곁에 붙어 있어야 하는 파비안의 경우 더더욱 그러했다.

파비안이 몸을 부르르 떨며 결심했다.

‘앞으로 절대 까불지 말아야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가신들의 속마음을 대변하는 다짐이었다.

* * *

점령한 영토를 안정화시키기 위해선 많은 노고가 필요하다. 노른자위 같은 땅을 점령했을 경우 더더욱 그러했다.

그렇다 해도 승전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지 못하게 하는 건 지나친 처사이리라.

글렌은 발롱 성의 창고를 열어 모든 병사들에게 술과 고기, 그리고 금화를 나눠 주는 대신, 민가를 약탈하는 것은 철저히 금했다.

영주가 직접 포상을 보장했으니 굳이 민가를 들쑤실 이유가 없기도 했다.

“오늘 하루는 개방된 창고에 있는 물품을 마음껏 가져다 써도 좋다! 내일 죽는다 해도 억울하지 않을 만큼 원없이 즐기도록!”

그리하여 승전을 기념하는 파티가 열리게 되었다. 승전을 축하하기 위해, 그리고 떠난 동료의 죽음을 가슴에 묻기 위해.

일반 병사들은 발롱 성의 연무장에 모이는 동안, 그 위의 직위부터는 성내의 연회장에 자리를 잡는 중이었다.

여기저기서 술병 따는 소리가 울린다. 하녀가 가져다주는 고기를 뜯으며, 기사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빈센트 경의 부대에서는 사망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하더이다.”

“빈센트 경의 부대라면 알테어 백작을 잡으러 갔던 별동대 아닌가?”

“매복해 있던 군대를 보자마자 별다른 저항 없이 항복했다고 하더군요. 현명한 판단이긴 했지요.”

“말 그대로 대승입니다, 대승! 하하하하! 누구들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게나 말입니다. 갑작스레 그런 묘책이 나올 줄이야…….”

“상상도 못 했지.”

“으음…….”

하지만 즐겁게 웃음꽃을 피우던 것도 잠시, 이번 작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그들 사이에 미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번 승리의 최대 공로자는 나디아다.

그날 회의에 참석했던 이들 중 이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마님은 왜 우리를 도와준 건가?’

물론 그녀가 말했던 대로 정말 영주님을 사랑하는 거라면 설명이 되긴 한다.

대화 한 번 나눠보지 않은 남자에게 이리도 열렬하게 헌신할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서 그렇지.

기사단장 지스카르의 목소리가 미묘한 침묵을 깨트렸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지금 마님은 어디 계신 건가?”

“글…… 쎄요.”

“흐음…….”

모두의 시선이 파비안에게 꽂혔다. 이곳에 모인 이들 중 그나마 그녀와 친분이 있는 건 호위 기사인 파비안이 유일했던 것이다.

입에 음식을 욱여넣던 파비안이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어…… 왜 다들 절 보시는지…….”

그러자 눈치만 살피던 선배 기사들이 그의 곁으로 몰려와 은근하게 운을 띄운다.

“이번 전투의 주역인데 우리들끼리만 축하하는 건 좀 그렇지. 경이 마님께 잘 말씀드려 보게나.”

“그게…… 사내들만 득시글거리는 자리에 오시려 할지 잘 모르겠네요.”

“에이이, 우리를 도와주셨다는 건 우리를 싫어하진 않는다는 뜻 아닌가! 마님께서도 기다리고 계실지 모르잖나.”

“설마 이 좋은 날에 거절을 하시겠나? 경이 잘 좀 말해 보게. 응?”

“어, 일단은…… 제가 찾아가 볼게요. 아마 침실에서 쉬고 계시지 않을까 합니다.”

파비안이 난처한 표정을 감추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왁자지껄한 자리를 좋아하실 분 같진 않은데.

어쨌거나 상관이 명령 아닌 명령을 하는데 버티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연회장 바깥으로 나온 그가 지나가던 하녀를 붙잡으며 물었다.

“후작 부인께선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방금까지 집무실에 계시다가 침실로 가셨어요. 아직 주무시진 않을 겁니다.”

“그래, 고맙다.”

하녀의 말대로 침실이 있는 3층으로 올라가니, 굳게 닫힌 문틈 사이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직 잠에 들지는 않았을 거라는 말이 사실인 듯하다.

그가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똑똑.

“마님, 저 파비안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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