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화
“알테어 백작은 겁이 많아 자기 안위를 챙기는 데에는 발 빠른 자다. 성벽이 무너진다면 성을 사수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빠르게 내릴 것이다. 그 즉시 남문을 통해 달아나겠지. 그렇다면 예상 경로는 모두 다섯 가지.”
글렌이 다섯 가지 길을 하나씩 짚으며 말을 이었다.
“길이 조금 험하지만 남서쪽 길과 서쪽 길을 택하는 쪽이 아군과의 합류가 빠르지.”
“양쪽 길목 모두에 매복할 생각이십니까?”
“아니, 그렇게 병력을 많이 뺄 수는 없어.”
군을 세 갈래로 나누면 본대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뿐더러, 적군에서도 병력이 많이 빠졌다는 걸 눈치챌 수 있다.
이쪽의 수를 읽힐지도 모르는 위험은 감수하지 않는 것이 좋으리라.
“남서쪽 길목에 매복한다. 단, 말의 꼬리에 짚더미를 매달아 흙먼지가 피어오르게 해라. 멀리서도 이쪽에 대군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아보게 해야 한다.”
“……남서쪽 길목에 흙먼지를 내고, 남서쪽 길목에 매복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하지만 그리 하면 백작이 우리의 위치를 눈치챌 텐데요? 다른 길로 돌아갈 겁니다.”
“성벽이 무너진 시점에서, 그는 이미 우리의 속임수에 한 번 넘어갔다. 또 다른 함정이 있진 않을지 몸을 사리게 되겠지. 우리가 그를 남쪽 길목으로 유도하기 위한 속임수라고 여길 것이다. 백작은 의심 끝에 남서쪽 길을 선택하게 될 거다. 너무 깊게 생각한 것이 오히려 발목을 붙잡는 셈이지.”
“호오.”
기사들이 이해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글렌이 지휘봉으로 남서쪽 길을 짚으며 말했다.
“이곳, 알테어 백작은 이 길목을 지나갈 확률이 높다. 아니, 지나간다.”
제법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나디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역시 기본적인 능력은 있는 자야. 복수의 파트너로 삼을 가치가 있겠어.’
지난 생에서 억울하게 죽기 직전, 남부와 북부의 사이는 그야말로 극에 달해 있었다.
왕이 후계자를 지목하지 못하고 갑작스레 사망한 후, 차기 왕위를 두고 대립한 탓이었다. 발라지트 공작이 이지호를 적녀인 카레인과 맺어 주려 한 것도 그와 연관되어 있으리라.
‘여하튼 중요한 건 필히 내전이 일어난다는 거지.’
그러므로 그녀에게 필요한 건 제 지시에 따라 금력과 병력을 움직여 주면서, 전투를 대신 수행할 수 있는 자다.
아무리 나디아가 미래의 일을 알고 있다 한들, 군사를 이끌고 지휘하는 건 능력 범위 밖이었기 때문이다.
나디아가 입을 열어 말했다.
“좋은 생각이에요. 이대로라면 발롱 성 인근 전역을 차지하는 것도 가능…….”
“단, 부인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말이지요.”
“…….”
끼어들어 사족을 덧붙인 건 당연하게도 지스카르였다. 나디아의 이마에 살짝 핏대가 솟아오른다.
‘이 늙은이가 진짜…….’
왜 자신을 경계하는지 이해는 한다. 하지만 이쯤 되니 짜증스러운 감정이 고개를 내미는 게 제 탓은 아니리라.
‘나중에 나한테 무슨 말을 하는가 두고 보자.’
노기를 삼킨 그녀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그럼 우선 제 말이 맞는지 확인을 해야겠군요. 어서 땅부터 파볼까요?”
* * *
전장에서 고지대를 차지한다는 것은 굉장한 이점이다. 원거리 무기를 사용하기도 용이할뿐더러, 상대의 움직임이 한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벽은 방어벽일 뿐만 아니라 정탐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윈터펠군이 토산을 쌓기 시작한 바로 그 날, 알테어 백작 진영에서도 그 움직임을 알아챘다.
적진의 수상한 동태는 곧바로 백작에게 전달되었다.
“백작님, 적 진영에서 토산을 쌓고 있습니다.”
“허어?”
보고가 올라갈 당시 알테어 백작은 성주의 방에 비스듬히 누운 채로 와인을 홀짝이고 있었다. 기름진 안주는 덤이었다.
그가 상체를 살짝 일으키며 물었다.
“토산을 말이냐? 흙으로 산을 쌓는다고?”
“예.”
“으으음…….”
적진의 움직임에 알테어 백작의 표정이 긴장감으로 굳었다.
‘젠장! 곧 농사를 지어야 하는 놈들이 공성은 무슨 놈의 공성이야!’
적당히 시간을 끌면 알아서 포기하고 물러날 줄 알았건만. 아무래도 적군은 완전한 승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했다.
하지만 초조했던 것도 잠시, 적장의 속내를 헤아려 보던 백작이 피식 조소를 터트렸다.
“애송이가 시간에 쫓기다 못해 멍청한 잔꾀를 쓰는구나.”
토산을 쌓는 이유야 뻔하다. 토산을 쌓아 올려 저들도 고지의 이점을 취하겠다는 의도이리라.
갓 작위를 물려받은 애송이치고는-그 애송이에게 참패했다는 사실은 이미 잊힌 지 오래였다- 제대로 된 판단이다.
“어떻게 할까요? 대응하시겠습니까?”
“흐음.”
백작이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그의 입이 열린다.
“당연히 대응해야지! 서쪽 벽에 궁수 부대와 투석기를 배치해라! 묵사발로 만들어 버려.”
“예, 알겠습니다.”
알테어 백작이 즐거운 듯 씨익 미소를 지었다.
적진에서 공격을 감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염려스러운 마음 같은 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쾌재를 부를 만한 일이었다.
일전의 패배를 만회하고 싶은데 성문을 열고 나갈 엄두는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또 아무 성과도 없이 돌아가자니 영주의 체면이 서지 않는다.
이런 와중에 성벽 가까이 걸어 들어와 먹잇감이 되어 주겠다는 적군을 왜 방해한단 말인가?
윈터펠이 자랑하는 기병도 공성전에는 무용한 존재로 전락해 버리는 데다, 윈터펠 후작은 오랜 공성전을 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번 영지전의 결말도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자신감에 찬 백작의 입가에 히죽거리는 미소가 걸렸다.
“애송이 영주 놈이 꽤나 초조한 모양이구나. 하기야 곧 농사철이 시작되는데 시간에 쫓기겠지. 두고 봐라. 놈은 병력만 잃고 초라하게 회군할 것이다!”
“역시! 백작님의 심계는 쫓아갈 수가 없군요.”
“무얼. 오랜 경험을 통한 지혜일 뿐이다.”
입으로는 겸양을 떨고 있지만 얼굴에는 우쭐거리는 기색이 만연했다.
그가 다시 상체를 비스듬히 눕히며 손짓한다.
“용건이 끝났거든 나가 보아라. 난 마저 휴식을 취해야겠으니.”
“예,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보고를 올린 병사가 깍듯하게 허리를 숙인 뒤 방을 나섰다.
* * *
대승이었다. 믿을 수 없는 대승이었다.
성벽이 무너질 거라고 꿈에서도 생각 못한 적군은 예상 밖의 상황에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대대로 윈터펠을 괴롭혔던 문제가 이토록 간단히 해결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글렌은 의자에 앉은 채 성주의 집무실을 둘러보았다.
부유하다고 소문이 자자한 이의 성답게 어디에 시선을 던져도 휘황찬란한 장식품이 걸려 있다.
이 자리에 앉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그가 생경한 감각에 젖어 있을 때였다. 걸걸한 중년 사내의 목소리가 그의 상념을 방해한다.
“하, 항복! 항복한다고 했잖소! 거, 거, 검을 좀 거두어 주시오!”
산발이 된 머리카락. 온통 헤진 옷. 여기저기 흙먼지와 검댕이 묻어 있는 얼굴.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이 화려한 집무실의 주인이었던 알테어 백작이었다.
거지꼴이 된 백작이 무릎을 꿇은 채 연신 목소리를 높였다. 목 앞에 검이 들어와 있다는 걸 감안한다면 여러 의미로 감탄스러운 행동이다.
“윈터펠 후작! 당신은 귀족의 긍지도 없는 자인가? 포로로 잡은 귀족을 이리 험하게 대한 전례는 어디에도 없소! 귀족법을 따르시오!”
“긍지? 귀족법?”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글렌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저 겁쟁이가 웬 일로 검날 앞에서도 빽빽 소리를 지르나 했더니, 그따위 것을 믿고 있었던 건가?
그가 앉아 있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다. 마치 쉬고 있던 맹수가 느른하게 몸을 일으키는 모습 같았다.
겁에 질린 백작 앞으로 다가온 글렌이 입을 열었다.
“윈터펠군이 칼라아이 원정에서 돌아온 지 채 반년도 되지 않았다. 왕국의 국경을 안정시키기 위해, 그리고 왕국민들의 민생을 지키기 위해 많은 피를 흘렸지.”
“그, 그게 지금 이 상황과 무슨 사, 상관이오?”
“묻겠다. 국가를 위해 희생한 장병들이, 채 숨 돌릴 틈도 없이 전쟁을 선포하는 게 귀족의 긍지인가?”
“…….”
“본인은 치졸한 짓을 했으면서 우리에겐 긍지를 지키라는 것인가? 그대에게 양심이라는 게 있긴 한가?”
“크읏…….”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긴 원정으로 윈터펠의 전력이 약해졌을 거라 계산한 것은 본인 아니었던가?
하지만 이대로 입을 다물 수만은 없었다. 뻣뻣하게 고개를 세운 그가 망발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아, 아무튼 영지전에서 승리했다 한들 자국 귀족의 목숨을 빼앗을 수는 없소! 만일 나를 해한 것이 알려진다면 윈터펠 후작가는……!”
“알테어 백작님은 참 순진한 분이시군요.”
웬 여인의 목소리가 울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백작이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를 둘러싼 기사들 사이에서 작은 체구의 여인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온 몸을 로브로 감싸고, 머리에는 후드를 깊게 눌러썼음에도 여자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건 목소리와 얇은 체구 덕분이었다.
그가 멍하게 눈을 깜박이며 생각했다.
‘웬 여인이 이곳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