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142)

제34화

“바로 본론부터 시작할게요. 이곳. 서쪽 방면으로는 토산(土山)을 쌓으세요.”

손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그리고 이곳. 북쪽 방면으로는 땅굴을 파세요.”

“땅굴과 토산……?”

“굳이 토산을 완성할 필요는 없어요. 그건 적군의 시선을 돌리기 위한 속임수일 뿐이니까. 중요한 건 땅굴이죠. 성 아래에 다량의 화약과 기름을 설치하여 폭파시키세요. 땅굴이 무너지면서 성벽도 함께 무너질 테니까요. 병력은 아군이 훨씬 더 우위이니 성벽이 뚫리기만 한다면 단번에 제압할 수 있습니다.”

“…….”

자신이 넘겨짚은 방안과는 달랐기에, 지스카르는 조금 놀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계책이 뛰어나다는 말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혹시…… 그 앞에 바위가 가로막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못 해 보셨습니까?”

거대한 바위를 뚫고 전진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혼신의 힘을 다해 바위를 뚫는다 쳐도,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어 버린다. 그때는 적측이 아군의 전략을 알아차린 뒤일 것이다.

그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어나갔다.

“저희도 그 생각을 해 보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근방에는 화강암이 많습니다. 땅속 역시 마찬가지지요. 땅을 파 봤자 가로막는 것이 있으면 헛수고일 뿐입니다.”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예전에 아버지의 집무실에서 어떤 지도를 본 적이 있거든요.”

아버지에게는 알테어 백작 같은 제3세력을 제어하기 위해 그들의 약점을 긁어모은 자료가 있었다.

알테어 백작이 법적으로 금지된 아인종 노예를 감금하고 있다거나, 그가 자랑하는 철옹성에는 비밀스러운 약점이 있다거나…… 하는 내용들.

아버지가 웬만해선 보여 주지 않는 자료를 전생의 삶에서 우연히 접할 기회가 몇 번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나디아는 자료의 내용을 머릿속에 담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서출 영애가 조금이라도 안락하게 살기 위해선 필히 그 자료가 쓰이게 될 거라고,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말씀하신 대로 이 지역에는 화강암이 많아요. 하지만 이곳.”

나디아의 손가락이 지도 위의 북쪽 성벽을 짚었다.

“이 부근만큼은 지반이 약하죠.”

“…….”

지스카르는 조금 전보다 조금 더 놀랐다.

만일 저 말이 사실이라면 지긋지긋한 발롱 성을 점령할 희망이 생기는 셈이다. 나디아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을 차치하고서라도, 그는 그 말이 진실이길 바랐다.

하지만 믿고 싶은 희망을 진실로 여기는 것은 어리석은 이들이나 저지르는 짓이다. 어찌 적대 가문에서 온 사람의 말을 무턱대고 믿겠는가?

“……그걸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아버지가 적이 될지도 모르는 이들의 약점을 잡기 위해 만든 자료예요. 신뢰도는 보증할게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닙니다. 물론 발라지트 공작이라면 그런 자료를 가지고 있겠지요. 그것만큼은 신빙성이 있군요. 하지만 그 자료 속에 마님이 말씀하신 내용이 들어 있다고 어떻게 확신한단 말입니까?”

“그럼 제가 여기서 그런 거짓말을 할 이유가 뭔가요?”

“그걸 제 입으로 굳이 말씀드려야겠습니까? 피차 불편해질 터인데.”

“그럼 제가 어차피 빈손으로 돌아올 사람들을 방해하고 있단 말인가요? 저는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성과 없이 돌아올 사람들을, 가시덩굴 허브 건으로 얻은 신뢰를 무너트려가면서까지 방해할 만큼 바보가 아니랍니다.”

“…….”

지스카르의 말문이 콱 막히는 순간이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기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가만히 내버려 둬도 성을 점령하지 못할 텐데 왜 방해를 한단 말인가?

하지만 명백한 사실이라고 해서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건 아니었다. 막사 내에 차가운 공기가 내려앉는다. 어찌나 싸늘한지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보다 못한 글렌이 나섰다.

“이쯤하지. 지스카르 경도 표정 풀고. 나디아, 일단 나가서 나와 대화를…….”

“군령장을 쓰겠어요.”

“뭐?!”

지스카르는 이번엔 정말로 놀랐다. 웬만해선 표정 변화가 없는 그가 입을 쩍 벌릴 정도였다.

“군령장이라 하면…….”

“전 군인이 아니지만 그건 뭐, 여기 계신 최고 사령관의 권한으로 알아서 잘 처리해 주시고요. 제가 거짓말을 했다면 저를 군법대로 처벌하세요.”

“…….”

전시에 거짓으로 아군을 현혹한 죄의 대가는…… 사형이다. 재판까지 갈 것도 없다.

여차하면 자기 목을 베라는 배짱에는 백전노장인 지스카르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담한 건지, 대책 없이 무모한 건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

“…….”

침묵만이 막사 안을 메운 그때, 누군가 조심스레 입을 열어 말했다.

“일단…… 한번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봅니다.”

그 뒤를 이어 또 다른 목소리가 같은 의견을 냈다.

“일단 땅굴을 파 보고, 바위가 가로막고 있으면 그때 철수하면 되지 않습니까? 이대로 돌아가긴 너무 아깝지 말입니다.”

“크게 손해 볼 일도 아니잖습니까? 한 번 해봅시다.”

“동의합니다.”

나디아가 군령장을 입에 담는 순간, 막사 내의 분위기는 찬성 쪽으로 기울어 버렸다.

군령장도 군령장이지만, 땅굴을 파기 위해 잠시 시간을 할애하는 것 정도야 리스크가 큰 일도 아니었다. 돌덩이와 마주치는 순간 회군 준비를 하면 될 일이다.

‘영주님……, 한 번 해봅시다. 예?’

‘어차피 잃을 것도 없잖습니까?’

‘나도 같은 생각이다.’

글렌을 비롯한 다른 기사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는다. 일단 나디아의 말을 따라 보자는 무언의 동의였다.

그런데 개중에서 글렌과 눈을 마주치지 않은 이가 단 한 명 있었다. 바로 지스카르였다.

나디아가 그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어때요? 만일 제가 거짓을 말했다면 보기 싫은 정적의 딸을 윈터펠 가에서 치워 버릴 기회잖아요. 제가 먼저 제안한 일이니 명분도 있고요. 아버지도 항의하지 못할 거예요.”

“…….”

“이건 경에게 매우 유리한 조건 아닌가요? 제 말이 진실이라면 말할 것도 없고, 만일 거짓이라도 이득이 있는 셈이잖아요.”

그건 그랬다. 실제로 사형을 집행하지는 않는다 해도, 이 일을 빌미로 그녀를 친정에 쫓아낼 수는 있으리라. 어느 쪽이건 지스카르 입장에선 환영할 일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후작 부인의 뜻대로 따르지요.”

“잘 생각했어요. 혹시 반대하시는 분 또 있나요?”

“…….”

“…….”

목소리를 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제야 나디아의 입에 빙그레 미소가 맺힌다.

“그럼 제 말이 진실이었을 경우를 상정해서 다음 계획을 짜볼까요? 땅굴을 파는 데에 성공했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잖아요. 알테어 백작은 얼마든지 다시 쳐들어올 수 있어요.”

“발롱 성을 점령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지. 그리 되면 기껏 넓힌 영토를 안정화시키는 데에도 시일이 걸릴 테고. 최선의 방법은…….”

글렌이 잠깐 고민한 후에 말을 이었다.

“알테어 백작을 사로잡아야겠군.”

“네, 맞아요. 그를 포로로 잡아 불가침 조약을 체결해야 해요. 이때 영지전에 패배한 대가로 레이나 지역의 소유권을 포기한다는 조항까지 확실히 해야겠지요. 그래야 분란의 여지를 남기지 않을 테니까요.”

나디아가 글렌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다.

그녀의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알테어 백작을 사로잡을 궁리를 하고 있다니. 제삼자에게 이 모습을 보인다면 허황된 꿈만 품는다고 비웃음 살 것이 뻔했다.

하지만 나디아의 녹색 눈과 마주친 순간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으리라고.

“만일 알테어 백작을 놓친다면 발롱 성을 점령하고도 반쪽짜리 승리가 될 거예요. 저는 실제로 전투를 지휘한 경험이 없어요. 제대로 통제할 자신도, 능력도 없고요. 세밀한 부분은 후작님이 맡아 주셔야 해요.”

“……만일 그자를 놓친다면 그대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게 되겠군.”

“괜한 걱정 마세요. 성공하실 거잖아요.”

“…….”

이 뒤로는 나디아의 능력으로 제어할 수 없는 분야였다. 그러니까-

‘이 뒤부터는 당신네들 전문 분야잖아. 이만큼 떠먹여 줬으면 뒤처리는 알아서 해야지.’

나디아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성공해 내라는 압박을 담아 글렌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눈을 마주보며, 글렌이 생각했다.

‘우리를…… 믿어 주는 건가.’

……조금 오해가 있긴 하지만 어쨌든 각오를 다지게 하는 데엔 성공했다. 테이블을 짚고 있는 그의 손에 자연히 힘이 들어갔다.

그녀에게는 이미 한 번 빚을 졌다. 이 와중에 떠먹여 주는 밥상을 받아먹지도 못해서야 어떻게 고개를 들 수 있단 말인가? 자존심 때문에라도 그런 얼간이가 되고 싶진 않았다.

“반드시 성공시키겠다.”

나디아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굳게 의지를 다진 그가 다시 테이블 위로 시선을 돌렸다. 이 근방의 지형이 세세하게 그려진 지도가 보인다.

성벽이 무너진 이후, 알테어 백작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잠시 생각에 잠겼던 글렌이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순간 기사들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군사 서기 역시 깃펜을 들어 기록을 재개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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