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화
윈터펠군 진영, 사령부 막사 안.
기병이 강한 윈터펠군에게 평야에서의 회전은 가장 손쉬운 전장이었다.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도 매번 같은 방식으로 전투를 걸어오는 알테어 백작의 어리석음은 언제나 감탄스럽기 짝이 없었다.
회의용 원탁에 둘러앉은 기사들이 수군거렸다.
“사실 진군 루트가 이곳을 지나는 것밖에는 없긴 하지만 말입니다.”
“나라면 다른 영주에게 잘 말해서 길을 빌리기라도 할걸세.”
“안타깝게도 알테어 백작령 외에 인접 영지는 죄다 저희의 아군이라…….”
“그럼 애초에 쳐들어올 생각을 하지 말아야지!”
정말 해 볼 만하다고 생각해서 계속 시도하는 건지, 아니면 알량한 자존심만 남아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 쪽이든 멍청하다는 사실은 변치 않지만 말이다.
적의 사령관이 멍청하다는 사실에는 장점과 단점이 존재한다.
우선 장점은 적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기가 비교적 쉬워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단점은…….
‘그놈을 상대로 고전할 때 자괴감이 든다는 거지.’
원탁 위에 펼쳐진 지도를 내려다보며, 글렌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혹자는 지형과 요새 때문에 가로막힌 것일 뿐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매번 외부 요인을 탓하는 것은 멍청한 적군에게 지는 것만큼이나 자괴감이 드는 일이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윈터펠군은 손쉽게 회전에서의 승리를 거뒀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발롱 성 앞에서 가로막혔다.
지도 위에 새겨진 요새의 이름이 얄미울 지경이었다.
물론 몇 달이고 죽치고 앉아 공성을 시도하면 성을 함락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해 농사는 말아먹겠지만 말이다.
문제는 경제적 타격을 감수하면서까지 공성을 시도한다 해도 승리를 100%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까딱 잘못했다간 시간과 돈만 날리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그리하여 역대 가주들이 내놓은 해결책은 빠르고 압도적으로 회전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이었다.
거하게 깨지고 나면 향후 몇 년 정도는 조용해질 테니까.
기사단장 지스카르가 물었다.
“영주님, 군대를 물리실 겁니까?”
“…….”
“정 미련이 남으시면 공성을 시도해 보시지요. 백작의 군대는 회전에서 피해를 입었습니다. 병력을 보충하기까지는 시일이 조금 걸릴 겁니다.”
“회군은…….”
사실 이쯤 돼서 빠르게 돌아가는 것이 맞긴 했다.
어차피 성을 점령하지 못할 거라면 괜한 목숨과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 눈엣가시였던 것을 두고 돌아가자니 여간 심란한 것이 아니었다.
아마 그의 아버지도, 선조들도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실패할 확률이 높은 길에 병사들의 목숨을 걸 수는 없다. 감성보다는 이성을 앞세워야 해.’
여기서 만족하고 돌아가는 것이 최선이다. 그가 쓰린 속을 달래며 회군을 명하려 할 때였다.
막사 바깥에서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어, 어어……! 거기로 가시면 안 됩니다. 진짜 안 되는데……!”
“지, 지금 사령부 회의 중입니다! 제발 조,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막아, 막아!”
뭐지? 글렌과 기사들의 시선이 동시에 입구 쪽으로 돌아갔다.
심지어 바깥의 소란은 점차 막사 쪽으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회군을 결정하는 문제 때문에 지휘부 전원이 이곳에 모인 상태였다.
그러니까 감히 사령부 회의 도중에 주변에서 소란을 피워도 되는 직위는 바깥에 없다는 뜻이다.
대낮에 거하게 술이라도 마신 건가? 그러지 않고서야 맨정신으로 이런 일을 벌일 리 없다.
모두가 바깥을 향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때, 글렌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그가 일어선 것과 막사 입구가 젖혀진 것은 거의 동시였다. 열린 천막 사이로 웬 가녀린 여인이 뚜벅뚜벅 안으로 들어온다.
사령부 회의를 방해했다는 걸 자각하고 있긴 한 걸까 싶을 만큼 당당한 걸음걸이였다.
“……나디아?”
낡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나디아의 얼굴을 못 알아볼 리 없었다.
가장 먼저 그녀의 정체를 알아챈 글렌이 경악했다. 여기 있어선 안 되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왜 여기 있지?”
“오래간만이네요. 보고 싶었어요.”
그와 눈이 마주친 나디아가 화사하게 웃었다.
미안하지만 한가하게 인사나 나누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당황한 글렌이 질문을 퍼부었다.
“아니,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지? 파비안은 뭘 했고? 몰래 빠져나온 건가?”
“아, 파비안 경은…….”
그때, 열린 천막 틈 사이로 파비안이 고개를 빼꼼 내민다.
“저…… 여기 있습니다, 후작 님.”
“…….”
자기 죄를 알고 있다는 것처럼 초조한 표정. 심지어 글렌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한다.
관자놀이에 굵게 맺힌 식은땀이 멀리서도 보일 정도였다.
그 순간, 그는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저놈이 나디아를 여기까지 친히 안내해 준 거구나.
“파비안 녹스!”
분노한 음성이 막사 안에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사색이 된 파비안이 나디아에게 매달렸다.
“자, 잠시만요! 잠시만요, 후작님!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마님, 사정 설명해 주신다면서요!”
“글렌, 일단 진정해요. 제가 파비안 경에게 억지 부려서 온 거예요. 제가 데려가 달라고 했어요.”
“아무리 윗사람의 부탁이 있어도 그렇지! 여기가 어딘지 알기나 하는 거냐? 오는 길에 습격이라도 받았으면 어쩔 뻔했나! 네놈은 호위라는 자각이 있긴 한 건가?!”
“죄, 죄송합니다…….”
파비안이 울상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급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불가피한 선택을 했어요. 제가 억지를 부린 것이니 그를 벌하지는 말아 줘요.”
“……성에 남아 있는 가신들은 당신이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있나?”
“편지를 남겨 두고 왔으니까 지금쯤 알고 있겠네요.”
“…….”
그 말인즉 몰래 빠져나왔다는 것이리라. 많은 이에게 알릴수록 설득시켜야 할 사람이 늘어나게 되니 말이다.
‘지금쯤 성이 발칵 뒤집혀 있겠군.’
글렌이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를 흐트러트리며 물었다.
“하아……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용건이 뭔지 들어나 보지. 설마 내가 보고 싶어서 찾아왔다고 하진 않겠지.”
“제게 발롱 성을 무너뜨릴 방법이 있어요.”
“…….”
생각지도 못한 말에 글렌의 얼굴이 굳었다.
글렌이 대체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허!”
옆에서 기가 막힌다는 한숨 소리가 터져 나온다.
고개를 돌리니 기사단장 지스카르가 대놓고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처럼 불만을 입 밖으로 낸 이는 더 없었지만, 나머지 기사들의 표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님, 혹시 종군 경험이 있으십니까? 이 노신이 무지해 감히 여쭈는 것입니다.”
“그럴 리가요.”
“하면 발라지트 공작이 마님께 군사학 스승을 붙여 주셨나 봅니다.”
“안타깝게도 제 아버지는 그렇게 열린 분이 아니라. 딸은 그저 좋은 혼처에 시집가면 그만이라 여기는 분이시거든요.”
“…….”
대화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지스카르의 표정이 점차 굳어 갔다.
저 말인즉, 전쟁에 무지한 분이 사령부 회의에 의견을 내세우겠다는 것 아닌가?
당연히 경험도 배움도 부족할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그걸 당당히 말하는 모습이 더더욱 불쾌했다.
여기 있는 기사들 중 대다수는 선대 때부터 주군과 함께 전장을 휩쓸었던 이들이다.
그런 자들을 앞에 두고 뭐가 어째? 들으나 마나 얼토당토않은 의견일 것이 뻔하다.
사령부의 잘못된 명령 한 번에 무고한 목숨이 수없이 스러지는 장소가 바로 전장이다.
윈터펠 가문의 기사들을, 그리고 병사들의 목숨을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이런 짓을 벌일 수가 있는 것인지.
불만이 고조되는 분위기 속에서 불퉁한 목소리가 하나가 울렸다. 지스카르의 것이었다.
“……마님의 계책은 대체 무엇입니까? 개인적으로 무척 들어보고 싶군요. 다들 마님께서 발언하시는 것에 동의하나?”
“저는 동의합니다.”
“저 역시 얼마나 뛰어난 계책일지 들어 보고 싶습니다.”
“윈터펠 성에서 여기까지 달려와 알려야 할 정도라면 필히 필승법이겠지요.”
부하들의 의견을 받아 지스카르가 말을 이었다.
“영주님, 저희는 모두 후작 부인께서 사령부 회의에 참여하는 것에 동의합니다. 영주님의 허락만 있다면 마님의 의견을 들어 보고 싶습니다만.”
“…….”
글렌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그녀에게는 크게 진 빚이 있다.
웬만하면 잘 몰라서 저지른 일이라며 나디아를 감싸 주고 싶었지만, 분위기가 여간 심각한 게 아니다.
게다가 당사자인 나디아가 의견을 내겠다는 기색이 만만이니 그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글렌을 결국 그녀가 발언하는 걸 마지못해 허락해야 했다.
“잠시 시간을 주지.”
“고마워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나디아가 기다렸다는 듯 회의용 탁자 가까이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들어 발롱 성의 서쪽을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