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화
이제는 아주 익숙해진 이의 목소리였다. 그가 목소리의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치맛자락을 쥔 채 헐레벌떡 달려오는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는 호위기사가 한 명.
“나디아? 여긴 무슨 일이지?”
“허억, 얘기, 헉…… 들었어요.”
글렌 앞에 멈춰선 나디아가 잠시 숨을 골랐다.
긴 머리카락에 땀에 젖어 얼굴에 달라붙어 있다. 누가 봐도 허겁지겁 달려온 모양새였다.
“영지전이 벌어진다면서요?”
“종종 있었던 일이니 걱정할 것 없다. 금방 돌아올 거야.”
“남편이 전쟁터로 떠난다는데 어떻게 걱정하지 않을 수가 있어요!”
“…….”
그렇지. 남편이 전쟁하러 간다는데 걱정 안 하면 이상한 일이긴 하지.
지극히 상식적인 반응인데 왜 이렇게 위화감이 드나 생각해 보니 답은 간단했다.
이 영지 토박이들 중, 알테어 백작과의 전투에 호들갑을 떠는 이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누가 우리한테 선전포고를 했다던데?’
‘또? 이왕 치러야 할 거 빨리 다녀와.’
어디 영주냐고 묻지도 않는다. 그것이 일반적인 윈터펠 사람의 반응이었다. 서글픈 현실이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눈에 눈물이 살짝 고인 걸 발견했을 때, 글렌은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우, 울지 마라.”
“흑……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잖아요…….”
“자랑은 아니지만 그놈과 영지전을 벌이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냐. 아버지와 함께 참전해 본 경험이 있으니 크게 걱정할 것 없다.”
“그래도…….”
글렌의 얼굴에 서린 낭패감이 더욱 짙어져 갔다. 이 여자 대체 왜 이렇게 눈물이 많은 거지?
평생 딱 세 번 우는 것이 덕목이라고 믿는 사내놈들 사이에서 자란 그는 도무지 적응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 우는 여자를 달래본 경험이 있을 리 만무했다.
어깨를 다독여 줘야 하나? 아니면 끌어안아 줘? 아니, 그건 좀 너무 나간 것 같은데…….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들어 올린 손은 그저 의미없이 허공을 배회할 뿐이었다.
그때, 안절부절못하는 글렌을 향해 구원의 손길이 내려왔다.
“크흠, 흠.”
“……?”
난데없는 헛기침 소리에 글렌과 나디아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미묘한 표정을 지은 노기사가 목청을 가다듬고 있었다.
“사안이 급합니다, 영주님. 이만 회의실로 가시지요.”
“아, 이런.”
너무 당황한 나머지 잠시 깜박했는데, 그는 급한 회의를 하러 가는 도중이었다.
글렌이 다시 나디아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기껏 찾아와 줬는데 미안하군. 가신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아니에요. 저야말로 시간을 뺏어서 죄송하죠.”
나디아가 살짝 고인 눈물을 닦아 내며 대답했다. 괜찮다는 말은 절대 거짓말이 아니었다.
많이 적응됐다고는 하나, 눈물 연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이름 모를 노기사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 지경이었다.
‘고마워요. 적당히 상황을 끊어 줘서.’
슬픈 척을 끝낸 그녀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얼른 가 보세요. 대신 꼭 몸 건강히 돌아오신다는 약속은 해 주시고요.”
“……그러지.”
전쟁터에서 몸 성히 돌아오라는 흔한 인사인데도 기분을 간질거리게 말하는 재주가 있다.
글렌이 아련한 표정의 나디아를 뒤로 한 채 등을 돌렸다. 그러고는 목적지를 향해 빠르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녀와의 거리가 꽤 멀어졌을 때쯤, 조용히 있던 지스카르가 슬그머니 입을 연다.
“방금 보니 부부 사이가 그리 나쁘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그리 보였나?”
“예, 누구라도 저처럼 생각할 것입니다.”
글렌은 조금 전의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조만간 전쟁터로 떠나는 남편에게 헐레벌떡 달려온 아내, 그런 그녀를 걱정할 것 없다고 달래 주는 남편, 슬픔을 참으며 그를 보내 주는 여인…….
“…….”
뭔가 좀 이상했다. 어쩌다가 저런 그림이 되어 버린 거지? 저건 누가 봐도 애달프고 다정한 한 쌍의 부부 아닌가!
할 말을 잃은 글렌에게 계속해서 추궁이 이어졌다.
“언제는 마구 박대하면 알아서 떨어져 나갈 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건 말이지…….”
찌르는 듯한 눈빛에 식은땀이 살짝 맺힌다. 잠시 버벅거리던 글렌이 곧 그럴 듯한 대답을 만들어 냈다.
“경도 알고 있겠지만 그녀에겐 우리의 재정난을 해결해 준 공로가 있다. 가문의 은인을 박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나?”
“예, 저도 그 일은 전해 들었습니다. 의도야 어찌 됐든 후작 부인에게 진 빚이 있으니 정중히 대하는 것쯤이야 당연한 일이지요. 하지만 거기서 그쳐야 합니다. 후작 부인에게 귀부인으로서의 예우를 갖추는 것에서 끝내야 합니다.”
늙은 가신의 목소리가 진중하게 가라앉는다. 지스카르가 쐐기를 박듯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를 믿지 마십시오, 후작님. 머리로는 알고 계실 테지요. 예, 이해합니다. 아름답고 가녀린 여인이 달콤한 말만 속달거리는데 마음이 가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지요. 그러나 냉정해지셔야 합니다.”
“…….”
“우리의 신뢰를 사기 위한 연막일 수 있습니다. 흔히들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전략이라 하지요. 작은 상처를 치료해 주고 치명상을 입히려는 속셈이 아니라고 어찌 단언할 수 있겠습니까?”
“…….”
“게다가 빚을 대신 갚아 주는 대가로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지요. 과한 호의에는 이유가 숨겨져 있기 마련입니다.”
가신의 충언에 글렌의 발걸음이 점차 느려지기 시작했다.
지스카르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도 머리로는 인지하고 있었던 점이었다.
가주가 설득되고 있다는 걸 눈치챈 듯, 노기사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후작 부인은 많은 지참금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건 이 결혼에 발라지트 공작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정말 그 자가 딸아이의 사랑을 이뤄 주기 위해 순수한 호의를 베푼 것이겠습니까?”
“……그럴 자가 아니지.”
글렌은 자신이 어쩌다 결혼을 하게 되었는지 떠올렸다.
그녀가 제게 월계관을 바친 것이 결혼의 계기였다.
개선식 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건 미리 공작과 합의가 되어 있었다는 뜻.
이 결혼에는 높은 확률로 다른 의도가 숨겨져 있다.
“후작 부인에게 위해를 가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마음을 주고 믿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경이 하는 말은 충분히 이해했네. 그녀에게 진 빚이 있기에 매몰차게 굴지 못했던 거다. 그녀를 진심으로 신뢰하는 건 아냐.”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파비안 경이 계속 붙어 있으니 그쪽에서도 섣불리 움직이진 못할 거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예.”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아 다행이었다. 노기사의 입에 흡족한 미소가 걸린다.
이윽고 두 사람의 대화는 영지전에 대한 것으로 넘어갔다.
딸을 적지로 보낸 공작의 속셈이 무엇이건, 일단 눈앞의 위기부터 해결해야 한다.
다가올 전투를 대비하는 두 주종의 말소리가 점차 멀어져 갔다.
그런 두 사람을 멀리서 바라보는 눈길이 하나…… 아니, 두 개 존재했다.
바로 나디아와 파비안이었다.
그녀가 서 있는 자리에선 이미 그들이 보이지 않았기에, 엄밀히 말하자면 두 사람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다고 하긴 어려웠다.
글렌이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던 나디아가 이내 입을 열었다.
“방금 후작님의 곁에 있던 분의 성함이 어찌 되시나요?”
“지스카르 번스타인 경이십니다.”
“아, 그 기사단장이라는?”
“예, 맞습니다. 단장님과 대화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결혼식이랑 피로연 때 잠시 뵈었어요. 그 외엔 만날 일이 없었죠.”
이 결혼이 정말 탐탁지 않다고 표정으로 말하던 사람이었지.
나디아가 처음 윈터펠 영지에 당도했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웃었다.
그가 피로연 때 어떻게 행동했을지 짐작한 듯, 파비안이 급히 덧붙인다.
“무뚝뚝한 인상이긴 하지만 나쁜 분은 아닙니다. 마님께 무례하게 행동한다면 그건…… 윈터펠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니 부디 너그럽게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대신 사죄드리겠습니다.”
“경이 사과할 게 뭐 있겠어요?”
지난 몇 달간 숱하게 맞닥뜨린 행정관들과 달리 기사단장인 지스카르는 나디아와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니 아무리 발라지트의 딸이 빚을 탕감해 주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들, 그 본의를 의심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선대 후작과 동년배라고 들었는데…… 나이에 비해서 굉장히 정정하네.’
새치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검은 머리카락과 건장한 체격 등이 그러했다.
하지만 젊어 보이는 외양과는 달리 그가 몇 십 년간 영지를 지킨 노기사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 말인즉.
‘공략해야 할 고인물이라는 거지.’
영지전에서 승리하여 철광산을 얻게 된다면, 머릿속에서만 상상했던 계획을 진행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기사단장의 협조를 얻을 수 있다면 더욱 좋으리라.
하지만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일단 영지전에서 승리해야 한다.
철광산이나 지스카르 경의 협조 같은 건 그 다음 문제였다.
“파비안 경, 일단 집무실로 돌아가요. 아까 하던 얘기를 좀 더 자세히 듣고 싶거든요.”
“영지전에 대해서 말입니까?”
“네, 정확히 우리가 처한 상황을 알아야 그 후의 대책을 생각해 낼 수 있는 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