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화
“아, 그건 말이죠…….”
“혹시 군비가 아까워서? 아니면 농사철이 시작되는 게 문제예요? 북부는 남부보다 농사를 조금 늦게 시작하니까 아직 여유가 있지 않나요?”
“잠시만요.”
잠시 방 안을 두리번거리던 파비안이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가 향한 곳은 왕국 전도가 걸린 벽 앞이었다.
파비안이 벽에 걸린 지도를 가져와 나디아의 책상 위에 펼친다.
“저런 저급한 놈들을 상대로 회전에서 승리하는 것쯤이야 아주 쉽습니다. 다만 여길 봐 주세요.”
그가 가리킨 곳에는 성벽이 표시되어 있었다.
“발롱 성입니다. 천혜의 방패라고 불리는 성이죠. 회전에서 조금 밀린다 싶으면 꽁지 빠지게 도망쳐서 성 안에 틀어박힌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희로서는 닭 쫓던 개가 될 수밖에요.”
그러잖아도 가난한 영지 살림에 몇 달씩, 그것도 농사철 내내 공성전을 벌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역대 윈터펠 후작들은 회전에서 승리하고도 이를 갈며 빈손으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희한한 사람들이네요. 결국엔 자기네들도 피해를 입을 텐데 꾸역꾸역 싸움을 걸다니.”
“왜냐면 알테어 백작은 돈이 많거든요. 왕국 내에서 가장 축복받은 땅의 소유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 듣기로는 용병들을 엄청나게 고용한다고 합니다.”
“…….”
명쾌한 답변에 그녀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 정도 손해쯤은 봐도 괜찮다는 거죠. 계속 찔러 보면 한 번쯤은 이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아닐까요?”
나디아의 시선이 천천히 지도를 훑었다. 발롱 성이 위치한 레이나 지역.
남쪽으로는 풍요로운 농경지가 넓게 자리하고 있고, 북쪽으로는 산지가 자리하고 있다.
물론 이 지역의 산지가 윈터펠 영지의 것과 같은 산지라고 생각하면 곤란했다. 땅을 파면 돌 대신 철이 나오는 철광산인 것이다.
그뿐인가? 몇 년 후 이 지역에서는 드래곤 레어까지 발견된다.
일반적으로 드래곤 레어가 발견되었다는 건 재앙이겠지만 이 경우는 조금 달랐다.
주인이 이미 죽고 없는, 그러니까 금은보화만 남아 있는 보물 창고가 발견된 것이다!
심지어 이 지역은 알테어 백작이 차지한 영지 중 일부에 불과하다. 몇 년에 한 번씩 시비를 걸어올 정도로 재정이 풍부하다는 건 결코 거짓이 아니리라.
지도를 내려다보던 그녀가 말없이 이마를 짚었다.
‘아니, 왜…… 바로 인접한 땅은 꿀단지나 다름없는데……!’
왜 저런 땅을 옆에 놔두고 여기다 둥지를 튼단 말인가! 대체 왜! 후손들한테 무슨 앙심을 품었길래!
초대 영주의 판단력이 다시 한번 의심되는 순간이었다.
윈터펠 영지에도 이런 풍족한 농경지와 철광산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리 미래에서 회귀했다고 한들 없는 땅과 철광산을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철의 생산량이 풍부하다면 그것도 만들 수 있을 텐데…….’
철은 무기의 원료가 되기 때문에 다른 지역으로의 수출이 엄격하게 통제된다.
어느 정도는 수입해 올 수 있겠지만 영지 내의 자체 생산량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윈터펠 후작령의 철광석 생산량은 나디아의 기대치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철광석의 생산량만 충분하다면 생각해 두었던 것을 실체화시킬 수 있으련만.
너무나 아쉬워서 애가 탈 지경이다. 본래 남의 집 잔디밭이 더 푸르러 보이는 법인데, 이 경우엔 실제로도 남의 집 잔디밭이 더 푸르렀으니 오죽하랴?
‘저 지역을 가져올 수만 있으면…….’
무심코 떠올린 생각에 나디아가 흠칫 굳었다.
먼저 영지전을 걸어 선빵을 때린 건 저쪽이다. 게다가 알테어 백작은 북부 연합에 속하는 영주도 아니었다.
즉, 그를 좀 탈탈 털어먹는다 하더라도 북부 영주들 사이의 결속력에 금이 가진 않는다는 뜻이었다.
이건 기회다! 나디아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저 지역을 통째로 가져올 수 있지?’
어떡하긴. 저쪽에서 먼저 영지전도 선포해 줬으니, 일단 백작의 군대를 두들겨 팬 다음 그를 포로로 잡아오면 된다.
그리고 여기서 죽든가, 아니면 항복 문서에 서명하든가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협박을 한다.
물론 그 항복 문서에는 영지 일부를 영구히 포기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선빵친 건 저쪽이야! 명분은 충분해!’
머릿속에서만 그렸던 계획을 실제로 옮길 수 있다는 생각에 의욕이 활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알테어 백작을 포로로 붙잡기 위해선 우선 그의 군대를 패퇴시켜야 한다.
회전은 자신 있다고 했으니 그들이 성에 틀어박힌 이후가 문제였다. 성 안에서 버티기에 들어간 적군을 깨부술 방법이라…….
나디아가 사색에 잠긴 채 지도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파비안이 조심스레 입을 열어 말한다.
“저, 마님.”
“응?”
“너무 걱정하진 마십시오. 영주님은 무사하실 겁니다.”
“……?”
너 무슨 소리 하니? 나디아가 멍하게 눈을 깜박였다.
그러나 당황한 마님의 기색을 눈치채지도 못했는지, 그가 자신만만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간다.
“후작님의 특기 중 하나가 야전 지휘거든요. 게다가 우리 기사단 중에 영주님을 이길 수 있는 놈은 아무도 없답니다. 그러니 그리 울상 짓지 마세요.”
‘울상 지은 게 아니라 남의 케이크가 너무 커 보여서 인상 쓴 거란다. 배가 아플 지경이야.’
아무래도 파비안은 그녀의 심각한 표정을 다른 의미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또 전쟁터로 떠나게 된 남편이 걱정되어 슬퍼하는 거라고 착각한 듯하다.
어처구니없는 착각이었지만 그 덕에 나디아는 자신이 글렌을 사랑하는 연기 중임을 상기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지금 세상에 둘도 없는 순정을 바치고 있단 설정이었지.’
한동안 일에 치여 바쁘게 살았더니 연기하는 걸 까먹고 말았다. 하마터면 큰 실수를 저지를 뻔했다.
“고마워요, 파비안 경.”
“예? 아, 뭐 당연한 일을요.”
위로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고 알아서 착각해 준 모양이다. 그녀는 그의 착각을 굳이 정정하진 않았다.
파비안이 일깨워 주지 않았더라면 어마어마한 설정 오류를 저지를 뻔했다.
다시금 연기력을 발휘해야 할 시간이다. 사랑하는 남자가 전쟁터로 향한다는데 가만히 있을 여자는 없으리라.
나디아가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글렌이 어디에 있는지 아시나요? 당장 보러가야겠어요.”
* * *
“이맘때에 선전 포고를 해 오다니, 참 그놈답군.”
“알테어 백작은 용병이 주를 이루니 농민을 소집할 필요도 없을 테니까요.”
연무장에서부터 본채로 이어지는 길.
글렌이 기사단장과 대화를 나누며 빠르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빠득, 노련한 노기사의 입에서 살벌하게 이 갈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긍지도 자존심도 없는 놈들! 이게 왕국의 국경을 안정시키기 위해 피를 흘린 대가란 말입니까? 원정 때문에 저희의 전력이 약해진 것을 노렸을 겁니다.”
기사단장 지스카르 번스타인.
선대 때부터 후작가에 충성을 바친 노기사로, 선대 윈터펠 후작의 친우이기도 한 자였다.
수십 년 동안 후작가의 기사였다는 말인즉 알테어 백작군에게 열 번 가까이 선전포고를 당해 봤다는 뜻이다.
그런 그에게도 원정에서 돌아온 직후, 그것도 농번기를 골라 영지전을 선포했다는 건 열불이 터지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원체 그런 소인배들이었지.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
“이번에야말로 박살을 내야 합니다! 다시는 윈터펠에 칼을 들이밀 수 없게끔 말입니다.”
“…….”
기사단장의 분노에 글렌은 그저 씁쓸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라고 왜 이가 갈리지 않겠는가? 알테어 백작에게 한 방 먹여 주고 싶은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회전에서 조금 밀린다 싶으면 피해를 최소화한 채 성에 틀어박히니 달리 방법이 없었다.
발롱 성은 말 그대로 천혜의 요새.
아직 대포가 발명되지 않은 시대에 저런 성을 함락시키는 방법은 적군에 내분을 일으키거나 식량이 다 떨어지길 기다리는 것밖에 없다.
‘둘 다 현실적으로 힘든 방법이지.’
아군에겐 전투를 속전속결로 끝내야 한다는 약점이 존재한다.
소모되는 군비도 군비지만, 농사를 시작해야 하는 영지민들을 한없이 붙잡아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기사단과 상비군만으로 공성전을 치른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결국 윈터펠군은 늘 회전에서 승리를 거두고도 성과 없이 돌아와야 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역대 후작들의 고민은 ‘어떻게 발롱 성을 함락시키고 적군을 완벽히 굴복시키는가’가 아니었다.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빠르게 적군을 패퇴시키고 빠르게 돌아오는 전술을 구사해야 한다.
글렌이 역대 가주들이 했던 것과 같은 고민을 하며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글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