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화
집사장은 영주성의 모든 사용인들을 총괄하는 위치다.
게다가 나이대로 짐작컨대, 글렌이 어릴 때부터 그를 옆에서 모셔 왔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른바 고인물이라는 거지.’
나디아가 후작가를 위해 세운 공은 적지 않았지만, 유능한 자가 꼭 호감 가는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다.
그녀의 아버지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말이다. 능력과 성과를 믿으며 뻣뻣하게 굴었다간 되레 반감을 사기 십상이었다.
인간적인 호감이 먼저 밑바탕에 깔려야 한다. 사람에 대한 신뢰는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앞으로 벌일 수많은 일들을 순조롭게 진행하기 위해서라도 나디아는 윈터펠 영지의 ‘고인물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었다.
순탄하게 진행되는 계획에 그녀가 흡족한 미소를 지을 때였다. 한참 울먹이던 집사장이 갑작스레 무릎을 꿇는다.
쿵! 늙은이의 관절 건강을 걱정케 하는 소리가 집무실 안에 울려퍼졌다.
“흐흑, 소인이 감히 마님의 진심을 의심했습니다!”
“아, 아니…… 무릎 괜찮아?”
나디아가 몹시 당황해하며 되물었다. 진심으로 집사의 관절 건강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적지 않은 나이에 저리 험하게 몸을 다루다간 한 방에 훅 가는 수가 있다.
그녀가 어쩔 줄 모르며 그를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감격에 찬 집사장의 귀엔 이미 들리지 않았다.
고든이 바닥에 머리를 박을 기세로 외친다.
“갑작스레 후작님의 혼인 소식이 들려 참으로 걱정했는데 오늘날에서야 알겠군요. 마님께선 실로 가문의 선조분들이 내려 주신 기적입니다! 후작님께선 대체 무슨 복이 있으시길래 마님 같은 귀인과 연을 맺으셨는지……!”
좀 작게 말해 줬으면 좋겠다. 바깥에 들릴까 무섭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마음을 꿈에도 모르는 집사의 목소리는 점점 커질 뿐이었다.
“평생토록 마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소인을 마님의 수족처럼 사용해 주십시오! 결코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으, 응…….”
나디아가 떨떠름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좀 과하게 포섭된 것 같긴 하지만…… 여하튼 한 사람 포섭 완료.
* * *
윈터펠 영지의 겨울이 끝나 가고 있었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뿐만은 아니었다.
근심거리가 사라진 가신들의 얼굴에선 미소가 가실 줄 몰랐다.
빚은 모두 해결되었고, 재정은 넉넉하다. 재정난이 해결된 윈터펠 영지는 이토록 여유로웠다.
아니, 여유로울 뻔했다.
“……저게 뭐지?”
나디아가 집무실 창밖을 내려 보며 중얼거렸다. 웬 병사 한 명이 말을 탄 채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영주와 그 가족이 기거하는 내성에서 말을 탄 채 전속력으로 질주라니?
그 이유는 둘 중 하나였다. 저놈이 그냥 정신 나간 놈이거나, 그럴 만한 사정이 있거나.
곁에 있던 호위 기사 파비안의 창밖을 힐끔 내다보더니 대답해 주었다.
“전령입니다. 붉은색 깃발인 걸 보니 급보인가 보군요.”
“그건 나도 알아요. 또 무슨 일이 터진 것 같아서 하는 말이죠. 짐작 가는 게 있으신가요?”
“으음…….”
파비안이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우물거린다. 나디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짐작 가는 게 있으신가 본데요.”
“이맘때쯤에 붉은 깃발이라면 왠지 그거 같긴 한데…….”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가 봅니다, 파비안 경. 그거죠, 그거.”
“음, 그거.”
대화에 끼어든 것은 나디아의 업무를 돕고 있던 행정관이었다. 파비안과 행정관의 시선이 잠시 허공에서 부딪힌다.
눈을 마주친 두 사람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나디아는 놓치지 않았다.
“뭔데 그래요? 둘이서만 알지 말고 내게도 말을 해 줘요.”
“아, 그게…… 확실하지도 않은 걸 말씀드리기가 그래서요.”
“표정은 이미 반쯤 확신하고 있는 것 같은데?”
“어…… 지, 지금 제가 물어보고 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파비안이 그리 말하며 급히 집무실을 나섰다. 나디아가 붙잡을 새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대답을 들을 창구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나디아의 시선이 일을 돕고 있던 행정관에게 향한다.
그가 은근슬쩍 시선을 피했지만 나디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지?”
“어…… 그게…….”
“반응들을 보아하니 하루이틀 일어난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숨긴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
“그, 그러니까…….”
행정관의 눈동자가 위태롭게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마님의 미간이 점차 좁아지자, 그는 결국 아는 것을 실토해야 했다.
“아마…… 알테어 백작이 영지전을 걸어왔을 가능성이 큽니다.
“영지전?”
그게 왜? 나디아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었다.
중앙 정부가 제 역할을 못하는 시대에는 이상할 것 하나 없는 일이다. 후작 부인인 제게 말하길 꺼릴 이유가 없었다.
알테어 백작령이라면 윈터펠 영지의 남쪽에 접하고 있는 곳이다.
영지전을 걸어왔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북부 연맹에 속하는 영주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버지의 세력에 속한 영주냐? 그것도 아니다. 이른바 제3세력인 것이다.
원래 멀리 있는 원수보다 가까이 붙어 있는 이웃끼리 더 자주 투닥거리기 마련이다.
인접한 영지끼리 사이가 좋지 않은 건 딱히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왜 저리 초조한 기색…….
‘……아.’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곧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나디아의 고개가 삐걱 행정관에게로 돌아갔다.
“그 사실을…… 어떻게 이 자리에 앉은 채로 짐작한 거지?”
“어, 그, 그건…….”
“설마 이런 일이 연례행사인가?”
“아, 아닙니다! 연례행사 수준까지는 아닙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
저 격렬한 반응에서 추측할 수 있는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그러니까 매년은 아니더라도 몇 년에 한 번 꼴로 일어난다는 말이로군.
행정관이 초조한 얼굴로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후작 부인이 돈도, 자원도 없는데 미치광이 이웃만 있는 영지에 학을 떼고 도망가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자기 고향이 답이 없기는 한 모양이다.
나디아가 아연한 얼굴로 생각했다.
‘이놈의 영지 참 스펙타클하네…….’
어째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는다. 한 고비 겨우 넘기니 또 고비가 찾아오다니. 대체 바람 잘 날 날이 있기는 한 건가?
깊은 사색의 시간이 찾아오려는 순간, 때마침 파비안이 돌아오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문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며 물었다.
“뭐래요? 알테어 백작이 정말 영지전을 걸었나요?”
“예?”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는 파비안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문을 여는 자세 그대로 굳은 그의 눈동자가 지진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어떻게 알긴요? 에드워드한테서 들었죠. 들어와서 얘기해요.”
나디아가 손바닥을 까딱거리며 그를 안으로 불러들였다. 쭈뼛쭈뼛 그녀 앞에 선 파비안이 보고를 시작했다.
“예상하신 대로…… 이번에도 알테어 백작이 선전 포고를 했답니다. 명분은 우리가 흑사병을 일부러 퍼트리고 치료제를 독점한다는 거예요.”
“원래도 이 시기에 그랬어요?”
“네, 보통 농사철이 시작되는 시기에 지랄을…… 아, 죄송합니다. 농사철이 시작되는 시기에 영지전을 걸곤 했습니다.”
잠시 이상한 단어가 들리긴 했지만 무시했다. 나디아가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인다.
명분이 흑사병의 치료제인 건 이해할 수 있었다. 알테어 백작은 아버지의 세력에 속한 이가 아니니 그의 눈치를 볼 일도 없다.
그리고 북부 연맹에 속한 영주도 아니니 윈터펠을 공격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전염병 때문에 초토화된 남부와 달리 피해를 덜 입었으니 영지전을 걸 여력도 남아 있으리라.
이상한 건 매번 이 시기를 노렸다는 것이었다.
“이상하네요. 곧 농사 준비를 해야 하는 건 그쪽도 마찬가지일 텐데.”
“백작의 군대에는 용병의 비중이 크거든요. 자기는 손해 보는 거 없다 이거죠. 하여간 비열한 놈.”
“윈터펠은 용병을 고용할 여력이 없으니 그걸 노렸군요.”
“네, 그런 거죠.”
파비안이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조용히 넘어가나 했더니…… 저희가 원정에서 힘을 뺀 것 같으니 옳다구나 하고 쳐들어온 듯합니다. 귀족의 긍지도 없는 놈들 같으니!”
“파비안 경의 말씀에 더해서, 가시덩굴 허브 사업이 성공한 것도 배가 아팠겠지요. 그자가 늘 입에 달고 살던 말이 ‘후작가의 재정이 백작가만도 못한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아니었습니까? 저희가 좀 살 만해진 게 아니꼬운가 봅니다.”
“흠…….”
얘기를 들어 보니 오래 전부터 사이가 안 좋았던 모양이다. 어떠한 불만이 있어서 쳐들어온 게 아니라, 그냥 이쪽이 눈엣가시인 거다.
그리고 그건 대화로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뜻이었다.
칼라아이 원정에서 돌아온 지 채 반 년도 지나지 않았다. 병사들과 기사들의 피로가 아직 회복되지 않은 시기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또 전투라니.
나디아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상황이 많이 어려운가요? 패배를 상정하고 계획을 짜야 할 만큼 패전 가능성이 높다거나…….”
“예에?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파비안이 펄쩍 뛰며 외쳤다. 말 그대로 진짜 펄쩍 뛰었다.
“저희는 북부 최강의…… 아니, 왕국 최강의 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배에 기름만 잔뜩 낀 놈들에게 패배할 리가요! 여태껏 저희에게 토벌당한 몬스터들이 억울해할 말씀이십니다.”
“아, 알겠으니 진정해요.”
“단일 세력으로 우리를 상대할 수 있는 곳은 없을걸요! 아마 발라지트 공작님께서도 제 말에 반박은 못 하실 겁니다.”
윈터펠군의 위명은 전대륙에 유명한 것이긴 했다. 군대라는 게 원체 예산 빨아먹는 하마라서 그렇지.
저토록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걸 보니 정말 이길 자신은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디아가 의아한 어조로 물었다.
“그럼 출전해서 이기고 오면 되잖아요? 뭐가 문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