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8/142)

제28화

“너희 둘의 우애가 그리 좋은지 오늘 처음 알았구나.”

“머, 멀리 떨어져 보니 하나뿐인 자매의 소중함을 알게 됐을 뿐이에요.”

“여하튼 그건 나디아 본인이 감당해야 할 일이지,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북부에 가길 자청했으니 그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겠지.”

“네에…….”

발라지트 공작은 그리 말하곤 보좌관을 손짓으로 불렀다.

“북방에서 활동하는 상인들을 대상으로 세무조사를 할 계획이다. 조사관들을 비밀리에 파견시켜 급습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북부 상인들이요? 북부에 다른 문제가 또 있나요?”

“……카레인.”

공작의 미간이 기어코 와그작 구겨졌다. 도움을 주지도 못할 계집아이가 왜 이렇게 사사건건 끼어든단 말인가?

그가 어깨를 움츠린 둘째 딸에게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와 놀아 줄 시간이 없구나. 더 할 말이 없으면 이만 나가 봐라.”

“……방해해서 죄송해요.”

카레인은 입을 삐죽 내밀면서도 아버지의 명령대로 집무실을 나서야 했다.

하지만 표정과 달리 그녀의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흥, 꼴좋게 됐네.’

지참금을 처음부터 순순히 내놓았으면 모를까, 허브차 사업이라는 핑계를 댔으니 이제와 준다고 한들 분위기가 좋을 리가 없었다.

지참금은 지참금대로 죄다 뺏기고, 가문 내의 평판은 진흙탕에 처박히게 된 것이다.

‘그러게 멍청한 머리를 왜 굴려선……. 얌전히 지참금 일부를 떼어 줬으면 그나마 대접이라도 받았을 것을.’

윈터펠 가문 사람들이 괘씸한 외부인을 곱게 대우해 줄 리가 만무하다.

한동안 저택에서 칩거하느라 기분이 안 좋았는데, 북부에서 들려온 소식 덕분에 우울감이 싹 날아가는 듯했다.

그녀가 콧노래를 부르며 복도를 걸어갔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과 시선이 마주친 건 바로 그때였다.

“어라, 지호 경?”

“레이디 카레인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이는 이방인 기사 이지호였다.

발라지트 공작의 수족인 그가 이곳에서 등장하는 건 놀랄 일이 아니다.

그가 귀족 영애를 대하는 기사답게 몸을 살짝 굽히며 손을 내민다. 손등 키스를 청하는 것이다.

평소라면 출신 모를 이방인에게 스킨십을 허용하지 않았겠지만, 기분이 매우 좋은 카레인은 순순히 손을 내밀어 주었다.

“아버지를 뵈러 오신 건가요?”

“예, 제게 시킬 일이 있다고 하시더군요. 혹시 무슨 일인지 들으셨습니까?”

“아뇨. 잘 모르겠네요. 방금 아버지를 뵙고 오긴 했지만 언니가 보낸 편지 얘기만 했거든요.”

그 순간 이지호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나디아 양에게서 편지가 왔다고요?”

호오, 이것 봐라?

카레인이 눈을 새초롬하게 뜨며 생각했다.

이미 결혼한 여인을 ‘윈터펠 후작 부인’이 아니라 ‘나디아 양’이라고 부르다니.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가 이 결혼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하긴, 자기랑 혼담이 오갔던 여자가 눈앞에서 딴 놈에게 사랑을 고백한 꼴이니.’

심지어 계획을 바꿀 거라는 말을 미리 해 주지도 않았다.

라이벌 격이었던 동갑내기 기사에게 신부를 빼앗긴 데다, 모시는 주군에게마저 무시당한 상황이 열불나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리라.

“어떻게 지내신다고 합니까? 북부는 연약한 레이디가 살기 좋은 땅이 아닐 텐데요.”

“이런저런 어려움이 많지만 후회하지 않는대요. 언니는 원래 그런 성격이에요. 본인이 선택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죠.”

얼핏 들으면 이복자매를 띄워 주는 말 같지만 속뜻은 전혀 달랐다.

언니가 그러던데, 아무리 북부 생활이 힘들더라도 너랑 결혼하는 것만 하겠냐는데?

아니다 다를까 억지로 미소 지은 그의 입꼬리가 바르르 떨리기 시작한다. 이지호가 표정 관리를 하려 애쓰며 대답했다.

“그…… 런가요. 잘 적응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그런 표정으로 다행이라고 말해 봐야 조금도 설득력 없다는 걸 알기나 하련지.

카레인이 조소를 숨기며 밝게 웃었다.

나디아에게 적대적인 사람이 한 명이라도 많아진다면 그녀로서는 환영할 일이었다.

‘어차피 그 편지를 직접 확인하지도 못할 테니까.’

게다가 나디아가 자기 입으로 출신 모를 이방인과 결혼하기 싫다고 말한 건 엄연한 사실 아닌가?

그걸 감안하면 자신이 딱히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가 부르셨다면서요. 얼른 가 보셔요. 아, 참. 지금 아버지 기분이 그리 좋지 못하니 주의하시고요.”

“예,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에 봬요.”

카레인이 빙긋 웃으며 이지호를 스쳐 지나갔다. 제 침실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통통 튀어 오르는 듯했다.

그동안 저조했던 기분이 단번에 회복되는 기분이다. 그녀가 북부에 있을 이복자매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자업자득이지, 뭐. 실컷 고생 좀 해 보라지.’

* * *

같은 시각. 윈터펠 후작성의 집무실.

“이건 성벽을 수리할 예산. 조만간 몬스터 웨이브가 터질 수도 있으니 미리 수리하도록.”

“가, 감사합니다! 마님께선 정말 이 영지의 은인이십니다!”

“다음.”

성벽 경비대장이 거의 바닥에 닿을 듯 머리를 굽혀 인사하곤 금화 주머니를 받아간다.

그 뒤를 이어 나디아의 앞에 선 것은 행정관이었다.

“지난 해 흉년이 들었으니 영지 내 생산량만으로는 수확기까지 버티기 힘들 테지. 이 돈으로 곡물을 미리 사들여라. 굶어 죽는 자가 나와선 안 돼.”

“흐윽, 이런 시기에 마님이 북부로 와 주셔서 얼마나 다행인지요……. 마님께선 실로 하늘이 내린 홍복이십니다. 작고하신 선대 후작 부인께서 이 모습을 보셨다면…….”

나디아가 끊임없이 자신을 찬양하고 있는 행정관을 손 들어 막아 세웠다.

“알겠으니 그만 비켜 줘. 예산을 기다리고 있는 자들이 많아서.”

“아, 넵!”

줄지어 서 있는 관리들은 마치 먹이를 기다리는 병아리 같은 눈빛으로 나디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머지는 그만 돌아가라고 했다간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랫동안 예산 부족에 시달려왔던 윈터펠 영지는 여기저기 돈 들어갈 구석이 많았다.

대체 지금까지 어떻게 버텨 냈는지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베풀 때는 확실히 베풀어서 불만이 나오지 않게 하는 것이 좋겠지.’

돈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는 건 하책이라고 하지만, 벼랑 끝에 몰린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건 다른 이야기다.

약간의 금화로 가문 내의 입지를 굳힐 수 있다면 결코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리라.

계산을 끝낸 나디아가 입을 열었다.

“다음.”

“예, 갑니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

관리들이 각자 필요한 금액을 받고 떠나자, 분주했던 집무실 안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하아…….”

나디아가 한숨을 내쉬며 의자 위로 늘어진다.

귀부인이 취할 자세가 아니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여유 같은 건 진작 휘발된 지 오래였다.

‘이제야 좀 한숨 돌리겠네…….’

가시덩굴 허브의 거래를 상인들에게 위임했다지만 총책임자인 그녀가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예산이 부족한 부분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돈을 분배하는 일까지.

나디아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몸이 두 개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결코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어떠한 목표를 위해 하나씩 계단을 밟아 나간다는 것은, 그리고 자신만의 ‘일’을 가진다는 것은.

기분 좋게 웃고 있는 그녀 앞에 찻잔이 내려왔다.

달칵.

“고생 많으셨습니다, 후작 부인. 피로 회복에 좋은 허브차입니다.”

“고마워.”

그녀는 늘어진 몸을 일으켜 집사장이 내려놓은 찻잔을 들어올렸다.

코끝을 간질이는 향이 은은하면서도 향기롭다. 호롭. 미뤄 놓았던 일이 하나 더 떠오른 것은 차를 홀짝이던 그때였다.

나디아는 차향을 제대로 음미하기도 전에 잔을 내려놓아야 했다.

“그러고 보니 깜박할 뻔했군. 집사장.”

“예, 마님.”

“좀 더 가까이 와. 줄 게 있거든.”

나디아가 서랍에서 금화 주머니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적은 양도 아니었다. 고든의 눈이 단숨에 휘둥그레진다.

“후작 부인? 제게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이건 자네에게 특별히 내리는 포상이야. 여태 없는 살림을 꾸린다고 고생이 많았잖아. 장부를 보니 사용인들 봉급이 밀린 적도 꽤 있던데. 사용인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게 많이 체면 상했을 테지.”

“하, 하지만 이건 너무 과분한 액수입니다.”

그녀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집사장에게 기어코 금화 주머니를 쥐여 주었다.

“이걸로 사용인들에게 보너스라도 챙겨 주면서 만회하도록 해. 아니면 거하게 파티를 열어도 좋고. 집사장의 권위가 제대로 서지 않아서야 저택 내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지기 마련이지.”

“마, 마님…….”

고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주름진 눈가에 살짝 물기가 맺힌다.

끙끙거리며 장부와 씨름했던 지난날의 고난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새 영주님은 물론 좋은 분이시지만 작위를 물려받자마자 전쟁터를 전전하길 바빴다.

몬스터 웨이브를 간신히 넘겼다 싶으면 옆 영지에서 영지전을 걸었고, 영지전을 마무리 지으면 이민족들을 토벌하러 나서야 했다.

글렌이 자리를 비운 동안 가난한 영지를 꾸려 나가는 것은 온전히 그와 재무관들이 몫이었다.

들어올 돈은 없고, 빚진 돈만 많은 데다, 심지어 담보 잡은 농경지까지 빼앗길 상황이다.

그 절망감은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은 결코 알 수 없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승전의 대가가 포상금 몇 푼이라는 소식을 들은 날엔 한숨도 자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 빚이 사라졌지. 아니, 빚을 갚고도 남을 돈이 생겼어.’

여태껏 그에겐 예산이 필요하다며 양손을 내미는 자만 있었지, 텅 빈 금고를 채워 주는 이가 없었다. 새로운 후작 부인이 억만금을 벌어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눈 폭풍이 몰아치는 산 속에서 조난당한 적은 없지만, 아마 조난당한 자가 구조대와 맞닥뜨렸을 때 이런 기분 아닐까?

고든이 눈물을 훔치며 말을 이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윈터펠 영지에는 앞으로도 예산이 많이 필요할 겁니다. 전염병은 언젠가 가라앉기 마련이고, 북부가 척박한 땅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지요. 미래를 위해서라도 이 돈은 아껴 두는 것이…….”

“이 척박한 영지가 지금까지 굴러갈 수 있었던 건 가신들이 각자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지. 당장 푼돈을 아끼고자 영지의 유일한 자원에 투자하지 않는 건 한 치 앞도 못 내다보는 소인배나 하는 짓이야.”

“…….”

“나를 소인배로 만들 셈이 아니라면 그냥 받아 둬. 어차피 본인 주머니 속에 챙길 것도 아니잖아.”

“마님…….”

수십 년간 영주 일가를 곁에서 모셔 온 경험이 무색하게도, 고든은 이 순간만큼은 표정이 일그러지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눈물을 참기 위해 빠르게 눈꺼풀을 깜박였지만 불가항력이다. 마침내 주름진 볼 위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린다.

소리없이 우는 집사장을 바라보며, 나디아가 생각했다.

‘거의 다 넘어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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