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화
그녀가 눈짓으로 가리킨 상인들은 모두 빚의 만기 상환일을 미뤄 주겠다고 한 자들이었다.
자신의 선택을 뿌듯해하는 듯한 표정이 샤일록의 심기를 더욱 어지럽혔다.
“크윽, 오늘 일을…… 언젠가 후회하게 되실 겁니다.”
“그대가 걱정할 일은 아니네.”
“물론 그러시겠지요.”
샤일록이 나디아를 향해 무릎을 살짝 굽히며 정중히 인사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다시 뵐 날을 기다리지요. 부디 그때까지 평안하시길.”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언제까지 그리 의기양양할 수 있을지 두고 보자. 그가 이를 으득 갈며 등을 돌렸다.
샤일록이 자리를 떠나자, 나디아에게 매달려 애걸하던 상인들도 하나둘씩 그의 뒤를 따랐다.
그녀에게 결정을 철회할 의사가 조금도 없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리라.
떠날 사람이 모두 떠나간 그레이트 홀이 다시 조용해졌다. 나디아는 그제야 표정을 풀며 방긋 웃었다.
그러고는 빙글 몸을 돌린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장소엔 처음부터 끝까지 묵묵히 바라만 보고 있었던 글렌이 서 있었다.
나디아가 그에게로 다가가며 물었다.
“이제 제 말을 믿으시나요? 지참금을 불린 뒤에 채무를 해결하겠다는 거 말이에요.”
“…….”
글렌은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돈을 갈퀴로 긁어모은 것도 물론 놀랍지만, 나디아가 그 어떤 조건도 없이 깔끔하게 빚을 대신 갚아 준 것이 믿기지 않는 듯했다.
할 말을 찾는 듯 한참 입술을 뻐끔거리던 그가 마침내 목소리를 낸다.
“어째서…… 우리 가문의 빚을 갚아 준 거지?”
나디아는 질문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제가 돈을 불려서 가문의 재정을 돕겠다고 했으니까요. 방금도 말했잖아요.”
“그러니까 왜 그런 약속을 했느냐고 묻는 거다.”
“……이상하네요.”
그녀의 눈동자에 서린 의아함이 짙어졌다.
“제가 지참금을 내놓지 않았을 때는 왜 가문의 위기를 외면하느냐는 말을 들었어요. 안주인이 가문을 돕지 않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요. 그런데 빚을 갚아 주니 이제는 왜 돈을 내어 놓는 거냐고 물으시는군요. 저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건가요?”
“그, 그건…….”
글렌의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잠시 말문을 잃었던 그가 다시 입을 연다.
“그대의 뜻을 곡해해서 미안하다. 먼저 이 자리를 빌려 진심으로 사과하지.”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돈을 벌어들인 뒤에 빚을 갚겠다는 말이 당연히 거짓말일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제 아버지가 발라지트 공작이라서요?”
“……그래.”
그녀가 눈앞에서 빚을 갚는 모습을 보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사실 아직도 이 모든 게 다 꿈은 아닐지 불안할 정도다.
정계의 상황을 조금만 아는 이라면 그 누구도 글렌이 이 상황을 선뜻 이해하지 못하는 걸 탓할 수 없으리라.
발라지트 가문의 사람이 왜 그를 돕는단 말인가? 방해를 했으면 방해를 했지, 그 반대가 될 이유가 없었다.
“대체 왜 내게 이로울 일을 해 주는 거지? 이번 일의 실상을 그대의 아버지가 알게 된다면 분명히 언짢게 생각할 것이다. 어쩌면 그대를 파문할지도 모르지. 왜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세상에. 지금까지 제 말을 뭘로 들으신 거예요?”
그의 말을 듣던 나디아가 불쑥 말허리를 끊으며 끼어들었다.
중간에 말을 끊지 않고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얼굴이다. 그녀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후작님을 사랑하니까요! 첫눈에 반해서 결혼하길 청했고, 북부까지 따라왔고, 혼인서약까지 맺었잖아요! 제가 했던 말이 기억나지 않으세요?”
“…….”
기억나긴 한다. 그게 진심일 거라고 단 한 순간도 믿지 않아서 그렇지.
사랑하는 남자가 위기에 처해 있으니 도와준다. 설령 그것이 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르게 하더라도.
간단하고도 명료한 논리였다. 가슴으로 납득이 가지 않아서 그렇지.
‘정말 내게 반해서 그런 거라고?’
개선식 전까지 두 사람은 말 한마디 나눠 본 적도 없었다.
설령 그녀의 주장대로 첫눈에 반했다고 치자. 고작 한 번 보고 반한 남자를 위해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다고?
글렌의 머리로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도와준 이유가 무엇이라 한들, 글렌이 나디아에게 크게 빚을 졌다는 건 변치 않았다. 설령 다른 속내가 있을지라도 말이다.
“무슨 이유이건, 윈터펠 가문이 그대에게 진 빚은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뭐든 한 가지 말해도 좋아.”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나디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뭐든지요?”
“그래, 가능한 한도 내에서는 무엇이든 들어주지.”
그럼 앞으로는 잔말 말고 내가 시키는 거 다 하든가. 이참에 그냥 가주 권한을 통으로 내놔.
‘-라고 말하고 싶지만…….’
지금 그녀는 남편과 사랑에 빠진 아내 아닌가?
가주 권한을 내놓으라는 말을 글렌이 들어줄 리도 없을뿐더러 진짜 저런 말을 했다간 경계를 살 수가 있다.
앞으로의 계획을 위해선 이번 사건으로 만든 호감도를 유지하며 신뢰를 쌓아 가야 한다.
‘게다가 저쪽이 오해하는 것처럼 순수한 호의로 윈터펠 가문을 도와준 것도 아닌걸.’
여기서 어떤 말을 해야 그럴듯할까? 사랑에 빠진 여자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그의 신뢰도를 올릴 수 있는 말…….
잠시 머리를 굴린 나디아가 그를 향해 팔을 벌리며 말했다.
“그럼 한 번만 저를 껴안아 주세요.”
“……뭐?”
“아주, 아주 다정하고 부드럽게요.”
“…….”
“왜요? 제가 어려운 부탁을 했나요?”
“아니, 그게 아니라…… 좀 다른 부탁을 할 줄 알았다.”
“예를 들자면요?”
“지금까지 뒷말을 한 사용인이나 가신들을 처벌해 달라거나, 내게 공개적인 장소에게 사죄를 요구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오늘 진 빚을 추후에 갚으라고 한다거나…….”
“그런 방식을 사용한다면 저는 영영 윈터펠 가문 사람이 되지 못할 거예요.”
무엇보다 뒷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을 조장한 건 그녀 본인이다. 거기다 뒤에서 욕하는 걸 신경 써 본 적도 없었다.
“그보다 제 부탁, 들어주지 않으실 건가요?”
“…….”
나디아가 살짝 눈웃음을 지으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글렌의 호박색 눈이 작게 흔들린다.
하지만 그는 곧 정신을 차리고 그녀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단순히 포옹일뿐,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번 일에 대해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하지.”
글렌이 팔을 뻗어 나디아의 작은 체구를 끌어안았다. 남부 여자답게 뼈대가 가는 상체가 품 안에 쏙 들어온다.
단순한 포옹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가느다란 몸을 껴안으니 느낌이 달랐다.
향수인지 비누 냄새인지 알 수 없는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게다가 이 여자, 대체 왜 이렇게 자신을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건가?
가슴팍에 살짝 와 닿는 부드러운 감촉이 그의 정신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그가 대체 어떻게 대응해야 될지 몰라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짝짝짝짝짝!
옆에서 들려온 박수소리가 두 사람의 주의를 사로잡았다.
그 덕에 글렌과 나디아는 얼떨결에 서로에게서 떨어질 수 있었다.
고개를 돌리니 열심히 손바닥을 부딪히고 있는 상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북부 상인 연합회의 웨인이었다. 그가 능글능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에, 그러니까…… 아무튼 두 분 모두 축하드립니다.”
“뭘 축하한다는 거냐?”
“그냥 축하드린다고요.”
“그러니까 뭘?”
“뭐…… 빚을 해결하신 것에 대한 축하지요. 오랜 시간 영주님의 시름거리였잖습니까?”
“…….”
싱글싱글 웃는 얼굴을 보아 하니 전혀 다른 의도 같았지만 그걸 따지고 들기도 뭣했다.
결국 글렌은 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야 했다. 더 이상 이 화제를 이어가면 본인만 난처해진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그가 서둘러 화제를 바꾸듯 나디아에게 말을 걸었다.
“한데 샤일록 그놈 말인데.”
“그 자가 왜요?”
“교활하고 욕심 많기로는 상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놈이지.”
“어쩐지 그럴 것 같이 생겼더라구요.”
“농담할 때가 아니야. 우리와의 거래가 끊겨서 타격이 있긴 하겠지만, 북부 일대에서 손꼽히는 대상인이라는 건 변하지 않아. 그놈이 그대에게 원한을 품은 것 같아 걱정되는군. 엮일 일이 없게 조심하도록 해.”
“아, 그건 걱정 마세요.”
“?”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그녀의 태도에 글렌은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라 한들 샤일록은 재산과 뒷배가 꽤나 있는 자유민이다.
귀족인 글렌이라도 그를 아무 이유 없이 벌할 수는 없다. 이번에도 달리 방도가 있는 것일까?
나디아가 경쾌한 어조로 말을 잇는다.
“제 아버지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바로 세금 제대로 안 내는 놈이거든요. 아버지가 해결해 주실 거랍니다.”
* * *
나디아가 북부로 시집간 이후 처음으로 그녀에게서 편지가 도착했다.
거의 네 달만에 도착한 딸의 연락에도 불구하고 발라지트 공작의 얼굴은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편지에 적힌 내용이 희소식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표정이 점차 굳어 가자, 곁에 있던 둘째 딸 카레인이 조급한 어조로 묻는다.
“아버지, 언니가 뭐래요? 예? 지참금은 어떻게 하기로 했대요?”
“……가시덩굴 허브로 번 금화를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고 하더구나. 허브차 사업을 시작한 명분이 돈을 벌어 윈터펠 가문을 돕기 위해서였으니, 계속해서 버티긴 어려웠겠지.”
그도 처음 나디아가 허브차 사업을 시작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지참금을 윈터펠 가문에 주지 않을 좋은 구실이라고 생각했다.
지참금을 불린 뒤 도와주겠다는 말에 어떻게 반대를 표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때 둘러댔던 거짓말이 이제 와선 발목을 잡고 있었다. 더 이상은 윈터펠의 재정을 돕지 않을 구실이 없다.
이것으로 윈터펠 가문은 빚을 단번에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자금까지 함께 얻게 된 것이다.
강대한 군사력을 가진 영지가 재정 상태까지 회복하다니.
발라지트 공작이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무언가 찝찝해. 아무리 소 뒷걸음치다 쥐 잡는 일이 가끔 벌어진다 해도, 어떻게 이런 우연이…….’
가시덩굴 허브를 사재기했는데, 마침 가시덩굴 허브가 치료제인 전염병이 제국 남부를 휩쓴다? 우연이라기엔 지나치게 공교로웠다.
발라지트 공작도 나디아가 자신을 배신했을 가능성을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
허브차 사업은 그저 눈속임일 뿐, 흑사병의 치료제가 가시덩굴 허브라는 것을 알고 미리 사재기했을 수도 있다. 남편인 윈터펠 후작을 돕기 위해서 말이다.
심지어 이번 사업의 주체가 나디아이기에 전염병을 후작가에서 퍼트렸다고 공격할 수도 없었다.
그쪽에서 되레 친정인 발라지트 가문과 연관된 거냐며 역공을 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가능성엔 풀리지 않는 문제점이 있었다.
‘어떻게 흑사병을 미리 예측한단 말인가? 게다가 흑사병의 치료제가 가시덩굴 허브라는 사실은 어떻게 알았고?’
여러모로 생각해 봐도 이번 일은 우연에 우연이 겹쳤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공작은 딸에 대한 의심을 접으며 편지를 내려놓았다.
일시적으로 윈터펠 가문에 호재가 생기긴 했지만 그뿐이다. 북부는 남부보다 경제력이 떨어지는 척박한 땅.
시간이 흐르면 재정이 다시 바닥을 보이리라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이 참에 이번 일을 구실로 몬스터 토벌에 대한 보조금을 줄여야겠군.’
그때, 카레인의 목소리가 그의 상념을 방해했다.
“아버지, 다른 말은 없었나요?”
“무얼 말이냐?”
“뭐…… 북부인들이 자길 엄청 박대한다거나, 그래서 돌아오고 싶다거나 하는 말이요.”
공작이 짧게 혀를 쯧 차며 대답했다.
“당연한 말을 굳이 편지에 적을 필요가 있느냐?”
후작가 사람들이 정적의 딸인 나디아를 곱게 대우해 줄 리가 없다.
그럼에도 나디아는 그에 대한 설움을 단 한 마디도 적지 않았다.
아비인 제게 징징거려 봤자 해결되는 일도 없을뿐더러, 자신이 귀찮아 할 것임을 예상했기 때문이리라.
‘역시 영리하단 말이지.’
눈치도 없이 계속 옆에서 얼쩡거리는 둘째 딸과는 달리 말이다.
짜증 섞인 아버지의 목소리에 카레인이 어깨를 움츠리며 말을 이었다.
“아니, 저는…… 언니가 머나먼 타지에서 고생하고 있을까 봐 그렇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