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화
덜컹.
커다란 궤짝들이 입을 벌리며 내용물을 토해 냈다. 궤짝 안에 한가득 들어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금화였다.
마치 황금빛 물결을 연상케 하는 장면에 숫제 눈이 부실 지경이다.
평생 상인으로 살아왔지만 이만한 목돈을 구경하는 건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다.
샤일록은 번쩍거리는 금화에 시선을 뺏긴 채 입만 뻐끔거려야 했다. 그 액수를 전부 현찰로 준비했다고?
그때, 넋 놓은 그의 귓가로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확인해 보게. 이자까지 한 푼도 빠짐없이 계산했으니.”
“…….”
“뭐 하고 있는가? 추후에 돈이 모자라니 어쩌니 문제 일으킬 생각일랑 말고 이 자리에서 확인하도록.”
목소리의 주인은 윈터펠 후작 부인, 나디아였다.
기품 있게 차려입은 그녀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은 채 궤짝 뒤편에 서 있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샤일록은 저도 모르게 표정이 구겨지는 걸 제어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설마 정말로 돈을 마련할 줄이야……!’
원래 의도했던 대로 허브차 사업을 성공시키진 못했지만, 어찌 됐건 그녀가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였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윈터펠 가문의 빚을 모조리 갚고도 남을 만큼 말이다.
허브차 사업으로 돈을 벌건, 치료약을 팔아 돈을 벌건, 빚진 돈을 갚을 수만 있다면 그만이다.
샤일록이 시커멓게 죽은 얼굴로 뒤를 향해 손짓했다.
“어, 어서 세어 보거라.”
“예, 나리.”
그러자 다른 상회의 잡부들 역시 조심스레 다가와 금화를 세기 시작한다.
윈터펠 성의 그레이트 홀 안에는 한동안 숫자 세는 소리와 금화가 절그럭 부딪히는 소리만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샤일록은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며 그 모습을 바라봐야만 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총 1만 87골드. 정확하군요.”
“9,720골드. 이것으로 저희 크레타 상회와 윈터펠 가문과의 채무 관계는 종료되었습니다.”
“1만 5,770골드입니다.”
각 상회의 잡부들이 계산을 마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빌어먹게도 저 귀족 나리가 준비한 액수는 모자람도 넘침도 없이 딱 정확한 모양이다.
도저히 토를 잡으려야 잡을 수가 없을 만큼.
갚지 못하리라 여겼던 빚이 단번에 해결되었다.
이제 아쉬울 것 하나 없어진 윈터펠 가문이 그간의 무례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
“…….”
정산이 모두 끝난 그레이트 홀에는 적막만이 가득했다. 누군가 긴장한 듯 침 삼키는 소리만이 간간히 울릴 뿐이었다.
누구 하나 입을 열 생각을 못한 채 조심스레 눈치만 살피고 있다.
그때 나디아의 목소리가 차가운 적막을 깨부쉈다.
“돈을 돌려받았는데도 표정이 좋지 못한 자들이 있군. 오늘 같은 날에는 좀 더 기뻐해도 될 텐데 말이야.”
“부, 부인…….”
상인들의 표정은 둘 중 하나였다. 대양처럼 평온하거나, 못 먹을 거라도 씹은 듯 죽을상을 짓고 있거나.
죽을상을 짓고 있는 상인들은 약 세 달 전, 만기 상환일을 미뤄 주지 않겠다고 못 박은 이들이었다.
그에 비해 나디아의 요청을 수락한 상인들은 어딘가 뿌듯해 보이면서도 안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설마 상환일을 미뤄 주지 않았다고 보복을 하는 건…….’
‘그, 그게 딱히 잘못된 일은 아니잖아!’
‘우린 챙겨야 할 권리를 챙겼을 뿐이라고!’
상환일을 미뤄 주지 않은 것이 커다란 죄인가? 그렇지 않다. 나디아 본인 역시 이건 강요가 아니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귀족이라 한들 상환일을 연장해 달라는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고 해서 벌을 내릴 수는 없다.
조금 눈치가 보이긴 하지만 벌을 받을 만큼의 잘못은 아니다. 그리 판단한 샤일록과 상인들은 떳떳하게 고개를 들었다.
이어진 나디아의 목소리가 그런 그들의 판단에 더욱 확신을 더해 줬다.
“거기 가만히 서서 뭣들 하고 있는 거지? 용건은 모두 끝난 것 같다만.”
“……!”
저 말인즉 더 이상의 추궁은 없을 거라는 뜻이었다.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던 일부 상인들의 얼굴이 살짝 밝아졌다.
‘그러면 그렇지. 상환일을 미뤄 주고 말고는 우리의 권리야!’
‘설령 귀족이라 해도 그 권리를 침해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시름거리를 내려놓은 상인들이 한결 밝아진 얼굴로 나디아의 곁에 모여들었다.
깎인 점수는 지금부터 열심히 만회하면 된다. 깎인 점수를 만회하는 방법?
“하, 하하…… 후작 부인의 가시덩굴 허브가 나, 날개 돋힌 듯 팔린다는 소식에 축하의 말씀을 드리려 남은 게지요.”
그야 간단했다. 열심히 아부를 떠는 것.
소 뒷걸음치다 쥐 잡은 격으로 우연찮게 대박을 치긴 했지만, 윈터펠 후작 부인은 갓 성인이 된 어리숙한 귀족 마님에 불과하다.
치켜세우며 입 발린 말을 건네면 금방 우쭐댈 것이 틀림없으리라.
“경축드립니다, 부인. 상재를 타고나셨군요. 하하하.”
“후작 부인의 수완은 저희들도 도저히 못 따라가겠습니다.”
“윈터펠 가문의 홍복입니다, 홍복.”
“척박한 북부에 귀인이 오셨군요!”
억지로 웃는 표정을 짓고 있는 상인들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장면을 놓칠 나디아가 아니었다.
그녀는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일축하면서도 싸늘한 눈으로 전방을 훑어보았다.
이대로 넘어갈 줄 알았다면 오산이다. 그녀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잇기 시작했다.
“참, 한 가지 통보할 게 있네.”
“예?”
“지금쯤 서신이 도착했을 테지만 놀라지 말라고 미리 얘기해 두지.”
웬 서신? 열심히 아부를 떨던 이들의 움직임이 일순간 멎었다. 긴장한 시선이 나디아를 향해 모여든다.
설마…….
“윈터펠 가문은 일부 상회와의 거래를 중단하기로 했다네.”
“후, 후작 부인……!”
“용서해 주십시오, 부인!”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어느 상회라고 콕 집어 말하진 않았지만 모두가 그 답을 알고 있었다.
미리 들은 바가 있는 듯, 상환일을 미뤄 주었던 이들만 평온한 기색인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가신들과 수차례 회의를 거쳐 결정된 일이네. 번복은 없어.”
“저,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하,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후작 부인!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라니? 나는 자네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걸.”
“부, 부인……!”
상인들의 표정이 낭패라는 듯 일그러졌다. 차라리 대놓고 보복을 한다면 상계에 억울함을 호소할 수라도 있다.
연이 닿은 귀족들에게 뇌물을 바쳐 윈터펠 후작가를 비난하는 여론을 조성할 수라도 있으리라.
샤일록의 입에서 작게 이 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영악한……!’
하지만 단순히 거래를 그만두는 것만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북부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는 상인이 윈터펠 후작가와 거래를 트지 못한다면 여러모로 손실이 발생할 것이다.
하지만 손실이 발생할 뿐, 완전히 몰락할 만큼 치명적이지는 않다.
수완이 있는 자라면 이 손해를 다른 방식으로 메꿀 수 있으리라.
나디아는 이 정도 처분이라면 너무 과하지도, 너무 유하지도 않은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인의와 도리를 아는 이들과는 오래도록 동행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이들은 쳐낸다.
‘뭐, 능력이 있으면 다른 거래처를 뚫겠지.’
저쪽이 윈터펠의 사정을 고려해 주지 않았으니 윈터펠 역시 그네들의 사정을 고려해 줄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나디아가 바늘 하나 안 들어갈 것 같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상회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는데도 다들 이미 예상하고 있는가 보군. 그렇다는 말인즉 자기 죄를 알고 있다는 뜻이겠지? 긴말 않겠네. 오늘부로 윈터펠 영지에서 이익을 낼 생각은 접는 게 좋을 거야.”
“후작 부인……!”
“자,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살려 주십시오!”
영세한 상인들은 후작 부인의 발치에 엎드려 잘못을 빌기도 했다.
하지만 샤일록의 생각은 달랐다.
‘멍청한 놈들! 윈터펠 후작가는 언젠가 다시 자금난에 시달리게 되어 있어!’
비록 이번 사건으로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고 한들, 윈터펠 영지가 척박하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아무리 많은 돈이라도 야금야금 쓰다 보면 언젠가는 바닥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달리 돈 나올 구석이 없는 윈터펠 가문이 다시 빚을 지게 되리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
게다가 우연한 성공으로 일확천금을 얻었으니 분명 사업을 무리하게 확장하려 할 것이다.
가시덩굴 허브로 허브차 사업을 벌일 만큼 멍청한 여자이니 기껏 벌어들인 돈을 모두 까먹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으리라.
‘요행으로 얻은 결과는 언젠가 본래 실력이 드러나게 되어 있지.’
콧대 높은 귀족들이 제게 애걸복걸 매달리며 돈을 구걸하는 모습은 언제 봐도 질리지 않는 장면이었다.
저 건방진 후작 부인도 조만간 제 실수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가 몇 발짝 앞으로 다가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후작 부인.”
그러자 나디아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아무리 세상물정 모르는 망둥이라 해도 마지막 경고쯤은 해 줘야겠지.
그녀와 시선을 마주한 샤일록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어이 상계와 척을 지겠다는 말씀이군요.”
“상계와 척을 지다니? 그대들이 상계 전체를 대표하는가?”
나디아가 제 오른편에 서 있는 상인들을 힐끗 눈짓하며 웃었다. 너 말고도 거래할 상인들은 많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