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142)

제25화

“하실 말씀이 있나요?”

“그, 가시덩굴 허브에 대한 것 말인데.”

“편하게 말해요.”

“설마 이렇게 될 줄 알고 가시덩굴 허브를 사들인 건가?”

“물론이죠. 우연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태연할 리가 있겠어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지? 미래를 보는 능력이라도 있는 게 아닌 이상…….”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집무실 안에 있는 다른 이들의 표정 역시 다르지 않았다.

웨인을 비롯한 상인들 역시 귀를 쫑긋 기울이고 있었다.

대체 후작 부인은 어떻게 이 사태를 예견하고 가시덩굴 허브를 사들인 건가?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리라.

사람들의 시선이 온통 자신을 향해 쏠리는 게 느껴졌지만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이럴 때를 대비하여 미리 대본을 준비해 놓았으므로.

나디아가 진실과 거짓을 적절히 섞어 가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흑사병의 첫 사망자가 나온 곳은 아랄 영지의 한 마을이었어요. 그리고 그곳의 영주는 제 아버지 휘하의 귀족이죠. 그는 아버지께 이번 일에 대한 보고서를 올렸고, 저는 집무실에서 우연히 그것을 엿보게 되었어요.”

물론 거짓말이었다.

아랄의 영주는 전염병의 발생을 덮기 위해 철저하게 입막음을 했고, 당연히 발라지트 공작에게도 보고를 올리지 않았다.

‘그게 숨긴다고 숨겨지는 줄 아느냐, 이 모지리 같으니!’ 라며 길길이 날뛰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듯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발라지트 공작에게 사실 확인을 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디아는 당당하게 거짓말을 이어 나갔다.

“아랄의 영주는 제 영지에서 전염병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알려지면 제 입지가 좁아질 것을 우려했어요. 그렇기에 쉬쉬하며 덮고 넘어가려 한 거예요. 부하의 흠집은 곧 윗사람의 흠집이 되기 마련 아니겠어요? 아버지 역시 그의 의견에 동의하는 바람에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린 거죠.”

“어리석은 선택을 했군. 감추려 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사망자가 많지 않았을 텐데…….”

글렌이 역겹다는 듯 작게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영주는 영지민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영지민들에게서 받는 세금과 존중은 그에 대한 대가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이익을 우선해 영지민들을 죽음으로 내몰다니.

‘음…… 그러잖아도 악명이 자자한 사람에게 없는 죄까지 덧붙여 버린 셈이 됐는데…….’

무고한 딸에게 누명을 씌운 건 전생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지 않나? 나디아는 죄책감을 가지지 않기로 했다.

“그럼 흑사병의 치료제가 가시덩굴 허브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제 어머니는 떠돌이 집시 출신이었어요. 원래 집시는 여러 곳을 떠도는 경험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이 많죠. 어머니에게서 들은 내용이에요. 온몸이 검게 변하며 죽는 병에는 가시덩굴 허브를 먹으면 된다고. 아마 왕국민들은 몰랐던 사실일 테지만요.”

물론 저것도 거짓말이다. 나디아의 어머니는 약재에 뛰어난 지식이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더 궁금하신 점이 있나요?”

“아니, 충분히 납득했다.”

“다행이네요.”

글렌이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나디아가 몸을 빙글 돌리는 게 먼저였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이 가는데, 지금은 업무 처리가 우선이다.

그녀가 옆방에 있는 관리들에게 다가가자 재무관들이 퀭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늘어난 일감 탓에 피곤함이 절반, 그리고 재정난을 탈출할 수 있다는 기쁨이 절반씩 섞인 표정이었다.

“갑자기 일이 많아져서 힘들 테지.”

“아, 아닙니다. 마님.”

“그래서 일이 좀 더 쉬워지는 방법을 알려 주려고 하는데.”

“……?”

일이 좀 더 쉬워지는 방법? 어리둥절한 얼굴이 재무관들이 한 곳으로 모여든다.

사람들이 모두 모인 것을 확인한 후, 그녀가 깃펜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빈 종이 위에 선을 긋기 시작했다.

그녀가 재무관들에게 가르쳐 준 것은 이 시대의 것보다 조금 더 발전된 회계 방식이었다.

차변과 대변을 나누어 지출과 수입을 양쪽에 기록하는 장부 작성 방법.

영리한 이들은 이 방식의 장점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재무관 중 하나가 손가락을 튕기며 외친다.

“이렇게 되면 기록과 계산을 한번에 할 수 있게 되는군요!”

“맞아. 돈의 이동이 한눈에 보여 손익 계산이 더 정확해지지. 요즘처럼 일이 많을 때는 계산이 잘못되는 경우가 왕왕 있잖아. 실수가 줄어들 거야.”

나름대로 엘리트라고 자부했던 관리들조차 생각지도 못한 방식이었다.

재무관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해 연신 탄성을 내질렀다. 개중 한 명이 반짝이는 눈으로 나디아를 바라보며 묻는다.

“혹시 마님께서 이 기록법을 생각해 내신 겁니까?”

“아니, 그럴 리가. 내 머리는 그렇게 천재적이지 못한걸.”

“그럼 수도에서 사용하는 회계법인가요? 왜 이런 방법이 아직 북부까지 알려지지 않았는지 의문입니다. 정말 혁신적이에요!”

“그것도 아닌데…….”

나디아가 살짝 말끝을 흐렸다.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할까?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이내 말을 이어 나갔다.

“아주 먼 곳에서 온 사람이 가르쳐 준 방식이지. 그의 고향에선 이걸 ‘복식부기’라 부른다고 해.”

“먼 곳이라면…… 바다 건너의 동대륙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것까진 잘 모르겠군.”

나디아 역시 처음엔 이지호가 동대륙에서 왔다고 생각했다.

약혼을 하고 난 이후 그와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그는 자신의 고향에 대해 이야기를 하곤 했다.

동대륙보다 더욱 멀리 있는 땅. 아무리 배를 타고 항해해도 결코 도착할 수 없는 땅.

그가 하는 이야기들은 모두 믿기 힘든 것 투성이었다.

사람이 집채보다 무거운 마차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닌다고도 했고,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기구가 있다고도 했다.

마치 어릴 적 유모가 들려준 동화 같은 이야기였다. 옛 기억을 떠올리는 나디아의 표정이 씁쓸하게 굳어 갔다.

그때, 듣고 있던 웨인이 끼어들며 말했다.

“마님,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내가 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복식부기라는 걸 가르쳐 준 사람 말입니다, 혹시 마님께 상업을 알려 준 이와 동일인물인가 해서요.”

“맞아. 동인인물이지.”

“역시…… 그렇군요.”

웨인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나디아가 그를 향해 반문했다.

“그런데 그게 왜 궁금하지?”

“아, 별건 아닙니다. 그저 좀 의아해서 말입니다. 마님이 장사하는 법을 어찌 아시나 궁금했는데, 귀족 여인이 자기 사업을 한다는 건…… 아무래도 우리에겐 좀 낯선 광경 아닙니까? 그렇게 먼 곳이라면 문화가 다를 테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와 풍습이 완전히 다른 것 같기는 했어. 직접 가 보진 못해서 실제로는 어떤지 모르지만.”

그의 고향에 대한 묘사는 정말이지 믿기 힘들었다. 비단 신기한 기구들에 한한 얘기가 아니었다.

왕도, 귀족도 없는 세계.

나디아는 그의 이야기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의심하면서도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을 고대하곤 했다.

‘제가 사는 세계에선 여자든 남자든 동일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누군가에게 손가락질 받을 일도, 특별한 케이스도 아니었어요. 그냥… 너무나 당연한 일인 거죠.’

‘그런 걸 배워서 어디에 쓰는데요?’

‘그야 자기 직업을 갖는 데에 쓰겠지요.’

 

그의 이야기가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중독되었던 이유.

그건 나디아가 자신도 그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당신은 영리합니다. 나디아 양이 그저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 사는 것이 아깝게 느껴질 만큼요. 다른 세계… 아니, 다른 시대에 태어나기만 했더라도 좀 더 활기차게 살 수 있었을 텐데요.’

 

그는 그녀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경제, 정치, 그리고 전쟁. 그건 누군가 나디아에게 가르쳐 주지도, 나디아가 스스로 알아볼 생각도 하지 못한 것들이었다.

귀족가의 서녀에겐 쓸모없는 지식이었기 때문이다.

공작을 아버지로 둔 사생아의 인생이란 뻔하다.

때가 되면 아버지가 정해 준 혼처에 시집을 간다. 그리고 아이를 낳다가 수명이 끝나면 죽는다.

그것이 나디아가 알고 있던 기존의 규칙이었다.

만일 그에게서 배운 것들이 없었다면 그녀는 과거로 되돌아왔다는 행운을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저 윈터펠 후작과 결혼함으로써 억울한 죽음을 피했다는 것에 안주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지금쯤 지참금을 죄다 가져다 바치고도 미움받진 않을까 눈치를 살피고 있었겠지.’

남편과 시집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게 아는 한도 내에서의 유일한 생존방식이었을 테니까.

그가 들려준 이야기를 통해 나디아는 기존의 상식에서 탈피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귀족가의 서녀도 아버지나 남편, 혹은 아들의 보호 없이 살아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지호는 그녀의 스승이나 다름없었다.

안타깝게도 이지호에게 나디아는 그리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던 모양이지만 말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저버릴 수도 있는 도구. 그뿐이었겠지.

나디아는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가 다시 밝은 표정을 지었다.

보는 눈이 많다. 씁쓸한 옛 기억에 잠기는 일은 혼자 있을 때 해도 충분했다.

“혹시 더 궁금한 것이 있나?”

“아닙니다.”

“그럼 다시 가시덩굴 허브에 대한 얘기로 돌아가 보지. 알다시피 우리 영지에는 빚이 많아. 만기 상환일까지 허브와 금화를 교환하려면…….”

집무실이 열띤 토론으로 점차 뜨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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