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화
사상 최악의 전염병이 시작된 것은 약 3개월 전의 일이었다.
첫 사망자는 제국 최남단의 영지, 아랄의 은퇴 노병.
온 몸이 검게 변한 채로 죽어 간 모습을 보며, 마을 사람들은 젊을 적 아내를 내친 벌을 받는 거라고 숙덕거렸다.
일주일 내에 같은 증상의 사망자가 열 명으로 늘어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마을 전역에 저주가 내렸다고도 했다. 혹은 영주가 부덕하여 천벌을 받는 거라고도 했다.
겁에 질린 영주는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는 것보다 입막음을 하는 데에 힘썼다.
이 일이 퍼질수록 영지민들의 민심을 잃고, 웃전의 신임도 잃을 거라고 여긴 것이다.
바로 그것이 재앙의 시작이었다.
전염병이 발병했다는 걸 알지 못하는 여행객과 상인들은 아랄 영지를 방문했고, 검은 죽음은 그들을 통해 다른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재앙이 남부 전역을 휩쓰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사상 최악의 전염병은 빈부도 신분도 가리지 않았다. 평민이든 귀족이든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공평했다.
온몸이 검게 변해가며 고열로 앓다 죽어 가는 병.
이러다 시체를 묻을 땅이 모자라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 앞에서, 치료사들은 가시덩굴 허브를 우려먹으면 병세를 치료할 수 있다는 걸 우연히 알게 되었다.
“흑사병의 치료제를 찾았다!”
“이제 우린 살았어!”
가시덩굴 허브는 잡초처럼 흔하고 값싼 약초였다.
재앙이나 다름없는 전염병의 치료제가 흔히 구할 수 있는 물건이라는 것은 불행 중의 다행이리라.
그런데 안도했던 것도 잠시, 이게 웬일인가? 그토록 흔하디흔한 풀이었는데 물량이 없다니.
온 지역을 수소문해 봐도 가시덩굴 허브의 싹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여러 상인들은 지난 몇 개월간 상단을 통한 거래를 추적했고, 거의 전량에 달하는 양이 윈터펠 영지로 향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니, 어떤 미친놈이…… 쓰레기를 돈 주고 사들여?!”
“미친놈이 아니라 미친년이란다! 윈터펠 후작 부인!”
“그러고 보니 그 가문에서 허브차 사업을 한다고 돈을 거하게 풀긴 했는데…….”
“가시덩굴 허브로 허브차 사업을? 단단히 미친 거 아냐?!”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어찌됐건 흑사병의 치료제 거의 전량이 한 사람의 손아귀 안에 들어갔다는 현실은 변치 않았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선 윈터펠 후작가에게 가시덩굴 허브를 구매해야 한다.
모두가 망할 거라고 했던 사업이 보란 듯이 성공하는 모습을 보며, 상인들은 상계의 명언을 다시 한번 되새겨야 했다.
운 좋은 놈을 당해 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될 놈은 뭘 해도 된다는 말이 이래서 있는 거군…….”
“젠장! 불공평해!”
어찌됐건 이번 일은 멍청한 놈이 멍청한 짓을 하려다 우연히 대박친 사례로 상계에 길이길이 남게 되리라.
* * *
“그거 이쪽, 이쪽으로!”
“조심히 다뤄! 네 몸값보다 비싼 물건이니까!”
“어어, 넘어진다, 넘어진다!”
영주성의 연무장은 상인들과 사용인들로 온통 북적거렸다. 평소라면 연무장에서 한창 훈련을 해야 할 기사들은 저 구석으로 밀려난 채였다.
하지만 불만을 품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기사들이 높게 쌓인 상자를 올려다보며 입을 헤 벌렸다.
“그러니까 저 상자 하나가 시, 십 골드라고? 그럼 이게 다 얼마야?”
“이거 예전에는 얼마였지?”
“가시덩굴 허브를 먹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습니다.”
“아니, 그거 진짜 허브였어? 난 이름만 그렇고 그냥 잡초인 줄 알았는데.”
“와, 이게 진짜 웬일이야…….”
그때, 상회의 어린 잡부 한 명이 높은 목소리로 외쳤다.
“거기 기사님들 좀 비켜 주세요! 일하는 데에 방해돼요!”
“어어, 미안하다.”
평소라면 어린 잡부의 무례를 꾸짖을 이가 한 명쯤 나왔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현재 중요한 건 일개 기사 따위가 아니다. 저 허브를 하루빨리 대량으로 왕국 전역에 팔아먹는 것이었다.
기사들이 더욱 구석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몹시 체면 구기는 상황이었지만 어린 잡부의 무례 따위는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잊힌 지 오래다.
그들의 얼굴엔 기나긴 재정난을 탈출할 수 있다는 기쁨과 설렘이 가득 차 있었다.
무거운 상자를 번쩍 들어 나르는 하인들의 표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체 이게 얼마 만에 보는 생기 넘치는 광경인지.
창문을 통해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집사장 고든이 감동의 눈물을 닦아냈다.
‘하늘이시여! 감사합니다!’
온갖 신을 찾으며 감사 인사를 하던 그는, 곧 정말 인사를 올려야 할 상대는 따로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바로 모두가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가시덩굴 허브를 사들였던 마님. 그의 시선이 집무실 한편으로 향한다.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마님과 북부 상인 연합회의 상인, 웨인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디아가 말했다.
“터무니없이 비싼 값을 받진 않을 생각이야. 그랬다간 모두의 적이 될 수도 있으니까.”
“같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기존 가격에서 몇 배를 올려 받는다 한들 그리 부담스러운 가격은 아닐 겁니다. 매입 가격이 헐값이나 다름없었으니까요.”
그녀가 원래 값보다 훨씬 높은 가격을 책정한다 한들, 지난 생에서 가격이 뛴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보급되지도 못했지.’
흑사병의 치료제가 가시덩굴 허브라는 것이 알려진 직후, 돈 많은 이들은 시장에 풀린 가시덩굴 허브를 사재기했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필요량 이상을 사들인 것이다.
문제는 가시덩굴 허브가 재배되던 작물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시간과 돈을 들여 재배할 만한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산이나 들판에서 자라났던 자연식생이 동난 이후, 가시덩굴 허브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가난한 이들은 치료제를 구할 수 없게 되었다.
만약 가시덩굴 허브를 공평하게 나눠 가질 수만 있었더라면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지 않았으리라.
나디아에겐 어떻게 생겨났는지도 모를 전염병을 막을 능력이 없었다.
하지만 치료제를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공평히 분배하는 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우선 상황이 심각한 남부부터 먼저 공급해야겠지. 아, 허브의 재배는 잘되어 가고 있나?”
“예, 원래 아무 곳에서나 잘 자라는 잡초라 북부 땅에서도 재배할 수 있는 모양입니다.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이 있는데…….”
“말해 봐.”
“상대적으로 남부 쪽에 전염병의 피해가 큽니다. 그런데 치료제는 저희가 독점하고 있죠. 남부 영주들이 저희가 일부러 전염병을 퍼트렸다고 음해하는 건 아닌지 걱정됩니다.”
“그럴 확률은 적어.”
나디아의 단호한 대답에 웨인이 초조한 얼굴로 덧붙였다.
안일하게 생각할 때가 아니다. 전염병의 유행으로 민심이 흉흉해진 상황.
방역에 실패한 영주들은 영지민들의 분노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이 사건의 배후에 윈터펠 후작가가 있다고 누명을 씌울지도 모른다.
“물론 논리적으로 따지면 윈터펠 가에서 없는 전염병을 만들어서 퍼트렸다는 게 말이 안 되지요. 하지만 선동에 논리가 중요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나디아가 손을 휘휘 저으며 말을 이었다.
“애초에 허브차 사업을 시작한다고 가시덩굴 허브를 사들인 건 윈터펠 가문이 아닌 나였잖아.”
“예, 그렇죠.”
“그런데 내가 누구지?”
“아!”
웨인이 그제야 알겠다는 듯 짧게 탄성을 터트렸다.
제국 남부는 발라지트 공작의 본거지. 남부의 크고 작은 영주들은 대부분 공작의 파벌에 속해 있다.
나디아가 치료제를 독점한 후 일부러 전염병을 퍼트렸다고 비난한다면 그건 그녀의 아버지까지 공격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아버지도 이번에는 별수 없을걸. 게다가 치료제를 모두에게 공평하게 분배한다고 하면 이쪽의 명분이 더 강력해지게 돼.”
예컨대 그녀는 왕실이 해야 할 업무를 대신할 생각이었다. 중요한 것은 필요한 곳에 필요한 양의 치료제를 공평하게 공급하는 것.
“각지의 영주들과 직접 거래를 할 거야. 피해 수준에 따라 거래량을 정하되, 가격을 높여서 되파는 행위나 가시덩굴 허브를 저장하는 행위는 금지. 중간에서 누군가 욕심만 부리지 않으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어. 이런 우리 입장을 왕국 각지에 전달하는 것이 중요한데…… 가능하겠나?”
“상회에 속한 이들이 제국 전역에 퍼져 있습니다. 그들을 통해 입장을 퍼트리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만일 약속을 어기고 치료제를 독차지하려는 자가 있다면 그는 분노한 백성의 화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
치료제의 양이 부족하여 치료받지 못하는 것과 누군가 치료제를 가로채서 공급받지 못하는 것은 달랐다.
전자의 경우엔 운명을 저주하며 죽어 갈 사람도 후자의 경우에선 가로챈 대상을 원망하게 된다.
나디아는 세세한 실무는 웨인과 카타리나를 비롯한 상인들에게 일임했다.
“서남부 지역에 연이 있는 자가 있나?”
“크레타 상회의 발데미르 지부가 그곳에 있는 걸로 아는데. 그렇지 않나, 카타리나?”
“예, 맞아요. 제가 연락을 해 보겠습니다.”
“그럼 서남부 지역에 대해선 크레타 상회에 맡기는 걸로 하고…….”
업무 분담에 열을 올리는 그녀에게 큼, 하고 헛기침 소리가 들린 건 바로 그때였다.
소리를 낸 이는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글렌이었다.
고개를 돌리니 그가 머쓱한 얼굴로 나디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할 말이 너무나 많은 표정이다.
‘웬만하면 일이 끝날 때까지는 기다리려고 했는데…….’
저 열렬한 태도를 볼 때 오늘 안에는 제 차례가 오지 않을 것이 명확해 보인다.
자기 사업을 하는 게 꿈이었다더니 그게 빈말이 아닌 듯싶었다. 한 시간 가까이 자기 차례를 기다리던 그가 비로소 입술을 달싹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