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허브차 사업을 계획하고 있으니 전 대륙에 있는 가시덩굴 허브와 그 씨앗을 전량 사들여라.
나디아가 상인들을 불러 명한 내용이었다. 새 후작 부인의 명을 들은 상인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허브차…… 사업이요?”
“그래.”
“가시덩굴 허브로…… 허브차 사업을 하신다고요?”
“분명 대박이 날 거라고 본다만.”
“…….”
상인들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해 갔다. 나디아의 신분이 귀족만 아니었더라면 온갖 험한 소리가 튀어나왔으리라.
그만큼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가시덩굴 허브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허브의 한 종류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잡초나 다름없을 만큼 가치가 없는 풀이었다.
가난한 평민들이나 가시덩굴 허브로 차를 우려먹곤 했다.
“왜? 문제가 있나?”
“그것이…….”
문제가 있냐고? 처음부터 끝까지 문제였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을 만큼.
하지만 발라지트 공작의 딸이자 윈터펠 후작 부인인 사람 앞에서 어떻게 당신 계획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문제라는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북부 상인 연합회의 웨인은 우선 현실적인 문제부터 짚고 넘어가기로 했다.
“가시덩굴 허브를 매입할 돈은 어디서 조달하실 생각이신지요? 물론 가시덩굴 허브의 값은 매우 저렴하지만 시장에 풀린 전량을 사들이려면 자금이 꽤나 많이 필요할 겁니다.”
“아버지에게서 받아 온 지참금을 쓸 생각이네.”
그제야 며칠 전 나디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지참금은 달리 쓸 곳이 있으니 빚 갚는 데에 쓸 수는 없다는 말.
그게 그 뜻이었어?
‘차라리 그 돈으로 빚을 갚아!’
그게 싫으면 차라리 드레스나 보석을 사들이든가!
사치품에 쓰는 편이 그나마 낫다. 보석류는 중고로 되팔 수라도 있으니까.
“그, 그럼 저번에 말씀하신 지참금의 용도라는 게…….”
“맞아. 예전부터 내 사업을 하는 게 꿈이었거든. 사업이 잘되면 그대들에게 진 빚까지 해결할 수 있을 테니 일석이조 아닌가?”
“…….”
듣고 있는 사람들의 머릿속을 아연하게 만드는 발언이었다.
귀족들은 다 저렇게 철이 없는 건가? 공작이 딸을 너무 아낀 나머지 가정교육을 시키지 않은 건지 의심될 정도다.
웨인은 당신네 안주인을 말려 달라는 눈빛으로 집사장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보쇼, 집사장. 어떻게 좀 해 보시오! 재산을 거하게 날리고 망신당하고 싶지 않으면!’
그러자 고든이 침울한 눈빛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왜 안 말렸겠나? 아무 소용 없었다네.’
우울한 고든의 표정에서 삶의 고단함이 짙게 묻어나오는 듯했다. 지금 이 상황이 희극인지 비극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상환일을 미뤄 주겠다는 결정이 조금씩 후회될 지경이다.
강단 있게 말하기에 거나한 해결책이 있는 줄 알았더니, 이것이 해결책일 줄이야.
사실 투자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니 그의 입장에서야 대충 장단을 맞춰 주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선대 후작에게 받은 은혜가 차마 윈터펠 후작가의 위기를 외면하지 못하게 했다.
“저…… 귀부인,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가시덩굴 허브를 전량 매입하는 것은 그리 좋지 못한 선택인 듯합니다.”
“왜지?”
“가시덩굴 허브는 가치가 없는 물건입니다. 가시덩굴 허브를 대체할 허브는 수없이 많습니다. 애초에 수요가 그리 많지도 않고요. 수송료와 보관료까지 생각하면 정말 어마어마한 손해가…….”
“지금 무언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네만. 오늘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논의를 하기 위함이 아니야. 고용을 하려는 거지. 중개 수수료는 관례에 맞춰 지급하겠네. 그대들에게 손해가 될 일은 절대 없을 거야.”
“…….”
아무래도 이 철없는 귀족나리는 이미 마음을 굳힌 모양이었다.
이 상태라면 그 어떤 말을 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말리다가 화를 입지 않으면 다행이리라.
‘그래…… 자기 돈 자기가 날리겠다는데 내가 뭘 어쩌겠나.’
그저 병석에 누워 계신 선대 후작님이 안타까울 뿐.
부디 본인의 지참금만 날리는 선에서 끝나고, 후작가의 재산까지 해를 입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웨인이 한숨 쉬듯 말했다.
“정 그러시다면 대륙 각지의 상회에 연락하겠습니다. 아마 물량 확보에 달리 차질은 없을 겁니다.”
쓸데없는 잡초를 팔고 돈을 챙길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할 머저리는 없을 테니까.
“잘 부탁하지. 말했다시피 그대들에게 손해가 되는 일은 절대 없을 테니 너무 염려하지 말도록.”
“예에…… 후작 부인의 말씀이 옳습니다.”
“내가 직접 담당하는 사업이니 무슨 일이 생긴다면 언제든 내게 직접 연락을 해도 좋네. 다만 한 가지만 명심해 주면 좋겠군. 시장에 풀리는 가시덩굴 허브 전량에 가까운 양을 사들여야 해. 씨앗까지 전부!”
웨인을 비롯한 상인들은 반쯤 체념한 얼굴로 응접실을 나섰다.
그들 중 절반은 상환일을 미뤄 주겠단 말을 취소하고 싶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터덜터덜 걸어가는 모양새가 침울하기 짝이 없다.
달칵.
응접실의 문이 닫히자 나디아가 비로소 찻잔을 들어 올렸다. 상인들과 대화하는 사이 차는 차갑게 식은 상태였다.
그녀가 찻물을 홀짝이며 시선을 돌렸다. 시선이 향한 장소에는 집사장 고든이 죽을상을 지은 채 서 있었다.
“집사장, 내가 멍청한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괜찮아. 지금은 그리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
나디아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후후 웃었다. 미친 사람 취급받으리라는 건 당연히 예상했던 결과다.
“조금 기다려 봐. 좋은 소식이 있을 테니까.”
* * *
새 마님이 허브차 사업을 벌였다는 소식은 채 일주일이 지나기 전에 파다하게 퍼져나갔다.
상인들이 허구한 날 영주성을 들락거렸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온 사용인들이 다 아는 이야기를 영주인 글렌이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지참금의 용도는 대개 신부의 의사에 따라 결정된다. 대부분 남편의 가문을 위해 사용되곤 하지만 일차적으로 신부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하물며 신부 쪽이 기울어지는 결혼도 아니었으니 글렌에게 달리 막을 방도가 있을 리 만무했다.
어째 제대로 풀리는 일이 하나도 없는지. 글렌이 지끈지끈 아파 오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옆에서 쨍알거리는 고모의 목소리가 두통에 일조하고 있었다.
“그 계집에게 장부와 인장을 주면 안 됐어! 내가 없는 사이에 집사장이 그것들을 가져다 바쳤단다! 이를 어쩌면 좋니, 글렌?”
“그렇습니까?”
“그렇습니까? 그렇습니까아-? 반응이 고작 그게 다니? 지금 한가하게 있을 때가 아니야! 지금이라도 당장 돌려받아야 해! 어찌 우리 가문의 재산을 발라지트 공작의 딸에게 맡긴단 말이니!”
“진정하세요, 고모님. 이번 일은 모두 지참금 안에서 해결한다고 합니다. 그녀가 우리 가문의 재산에 손을 대는 일은 없을 겁니다.”
명분을 잃은 그레이스 부인의 입이 꾹 다물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곧 새로운 이유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그래도 불안하지 않니? 우리 몰래 금고에도 손을 댈지 어떻게 안단 말이야? 가뜩이나 재정 상태도 좋지 못한데 그딴 쓰레기 같은 잡초를 사기 위해 돈을 쓴다면…….”
“집사장에게 잘 감시하라고 일러뒀으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너무 흥분하신 것 같군요.”
“글렌, 나는 지금 너를 위해 충언을 올리고 있는 거란다.”
“윈터펠 가의 미래를 걱정하는 고모님의 마음, 충분히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 알아준다니 고맙구나. 그런 의미에서…….”
“하지만 지금은 너무 흥분하신 것 같군요. 고모님의 건강에 무리가 갈까 걱정이 됩니다.”
“글렌!”
돌려서 말했지만 그녀가 그 속뜻을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건강에 해가 될까 두려우니, 그저 뒷방 늙은이처럼 조용히 지내라는 뜻 아닌가?
부들부들 떠는 그녀에게 글렌이 나직하게 쐐기를 박았다.
“어머님에 이어 또다시 집안 어른을 잃고 싶지 않은 제 마음을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그 발라지트 계집을 하루빨리 쫓아내는 게 내 건강을 위한 일이야.”
“엘버트, 고모님을 정중히 자택까지 모셔드려라.”
“글렌, 너 정말 이럴 거니?”
“너무 흥분하셨습니다.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지요.”
“……언젠가 이게 너를 위한 행동임을 알게 될 날이 올 거다.”
그레이스 부인은 노기를 숨기지 못하면서도 사용인들이 안내하는 대로 순순히 응접실을 나섰다.
눈치가 빠른 여인답게 여기서 고집을 부려 봤자 반감만 살 뿐이라는 걸 알아챈 듯싶었다.
마침내 그레이스 부인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글렌은 온몸에 힘이 빠진다는 듯 의자 위로 몸을 늘어트렸다.
그가 한숨 쉬듯 중얼거린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우리 가문을 뜯어먹지 못해 안달이 난 하이에나들뿐이군.”
“뭐, 그래도 공작의 딸보다는 그레이스 부인 쪽을 신뢰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그분은 저희와 같은 북부인이니 첩자 노릇은 안 하겠죠.”
“첩자와 좀도둑.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게 참 기막히단 말이야.”
그의 시선이 힐끔 책상 위를 향했다.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이건 원정에 참여했던 병사들에 관한 것, 저건 재정 상황에 관한 것, 그리고 그 옆에 있는 건 올해 수확량과 그에 따른 조세 예측.
소후작일 시절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현실적인 문제들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차라리 좀도둑이 낫지 않습니까? 최소한 그레이스 부인은 허무맹랑한 사업을 벌이는 짓까진 하지 않으니까요.”
“……그도 그렇군.”
글렌이 이마를 감싸 쥐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나디아가 허브차 사업에 진심일 거라고 생각하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냥 지참금을 한 푼도 주기 싫은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