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142)

제21화

아버지가 식사자리에서 지나가듯이 했던 말이 그제야 떠올랐다.

지난 생엔 남의 일이라 여겼기에 귀담아듣지 않았던 말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남의 영지여도 좀 관심을 가져 볼 것을. 머릿속이 아득해진다.

“거기 부인은 누구시오?”

나디아의 기침 소리에 그녀를 발견한 듯, 사내 한 명이 그리 물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를 향한다.

“보아 하니 귀한 신분인 것 같은데…….”

“아아! 윈터펠 후작 부인이시군요! 발라지트 공작님의 따님께서 결혼해 북부로 오셨다더니.”

“아, 이런. 후작 부인을 몰라 뵈었습니다.”

값비싼 비단옷을 걸친 젊은 여인. 저런 옷차림으로 영주성을 마음껏 활보할 수 있는 여인의 정체란 뻔했다.

그녀를 알아본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북부 상인 연합회의 웨인이라고 합니다.”

“크레타 상회의 카타리나입니다.”

“저는…….”

나디아는 앞다퉈 인사하는 상인들을 향해 그만두라고 손짓을 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그녀가 심각한 어조로 물었다.

“그보다 방금 한 이야기에 대해 자세히 듣고 싶다만. 윈터펠 가문이 바람그늘 평원을 담보로 돈을 빌렸다고?”

“예, 그렇습니다. 저희 입장에서는 그렇게 막대한 돈을 그냥 내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사실 큰 돈을 빌리면서 담보를 잡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나 윈터펠 영지처럼 대대로 가난한 땅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원정이 승리로 끝나기만 한다면 빚을 갚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돈을 빌렸으리라.

문제는 칼라아이 원정에서 얻은 것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유목민들은 서쪽 초원 지대로 도망가며 가져갈 수 없는 재산들을 모조리 불태웠다.

서쪽 국경 지대를 안정시키고 제국의 위상을 드높였다는 것만 제외하면 윈터펠 가문의 입장에선 아무런 이득도 의미도 없는 전쟁인 것이다.

암담한 상황에 눈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다. 나디아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며 다시 한번 물었다.

“아까 만기 상환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상환일이 언제지?”

“세 달 후입니다.”

“세 달…….”

집사가 장부와 인장을 갖다 바치며 애원을 한 이유가 있었군. 끙, 하고 그녀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돈을 땅으로 갚는다면 당장에야 빚이 해결되니 사정이 나아진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내다본다면 이건 어마어마한 재앙이다.

경제력이 없는 대영주는 아무리 막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다 한들 지역의 맹주가 될 수 없다.

그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 다른 영지의 도움이 필요해지기 때문이다.

과거에 북부가 강력한 맹주 아래에 뭉칠 수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여기서 땅을 빼앗기면 북부 영주들을 앞세워 아버지와 대적한다는 계획에 차질이 생겨.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해결을 해야 해.’

나디아가 상인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그대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

“아이고, 부탁이라니요. 후작 부인의 말씀이라면 당연히 들어드려야지요.”

정확히 말하자면 발라지트 공작과 인연을 맺고 싶은 것이겠지.

아직까지 세간에 나디아의 정체성은 윈터펠 후작 부인이 아닌, 발라지트 공작영애인 모양이다.

“혹시 이중에서 만기 상환일을 연장시켜 줄 자가 있는가?”

“…….”

“…….”

하지만 입안의 혀처럼 굽신거렸던 태도와 달리, 누구 하나 흔쾌히 들어주겠다며 나서는 이가 없었다.

설마 공작가의 여식인 나디아가 저런 부탁을 하리라곤 예상치 못한 듯했다.

“왜? 어렵겠는가?”

“저어, 그게…….”

“윈터펠 가문은 명예를 아는 명문가다. 결코 죄 없는 양민의 돈을 빼앗는 일은 벌어지지 않아. 내 결혼 전 성을 걸고 맹세하지.”

“하, 하지만 후작 부인, 부인께서 시집오실 때 발라지트 공작님께 받은 지참금이 있지 않습니까? 액수가 꽤나 크다고 들었습니다. 융통할 수 있는 자금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상환하지 않는 건…… 저희로서는 조금 납득하기 힘든 일임을 알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 말한 이는 상인들의 우두머리를 맡은 배불뚝이 사내였다.

이름이 ‘샤일록’이라고 했던가? 나디아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 돈은 따로 쓸 곳이 있네. 갚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야. 다만 돈을 마련할 시일이 조금 필요하다는 것이지.”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지참금의 용도를 알 수 있겠습니까?”

“그건 알려 주지 못할 것 같아 미안하군.”

“…….”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귀족 영애가 지참금을 어디에 쓸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뻔하다.

‘보석 따위나 잔뜩 사들이겠지!’

화려한 수도에서 살다가 척박한 북부 땅에 시집오게 되었으니 그 상실감이 오죽할까?

샤일록은 그녀와 같은 사례를 여럿 보았다. 그들 중 대다수는 허한 마음을 사치로 채우곤 했다.

그런 귀부인들에게 사치품을 팔아치우는 것이 그의 돈줄 중 하나였기에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표정만큼은 진중하기 짝이 없다.

사정을 모르는 이가 본다면 그럴듯한 사업 구상이라도 하고 있다고 착각할 만한 얼굴이었다.

샤일록이 마음속으로 한껏 비웃고 있다는 걸 알기나 하는지, 나디아가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미리 말해 두지만 강요하는 것은 아니야. 모두들 오래전부터 윈터펠과 거래한 상인들일 테지. 선대 후작이 상인들을 후하게 대접했다고 들었네. 그러니 그간의 정을 봐서 한 번만 호의를 베풀어 달라는 것인데…… 그래도 안 되겠는가?”

“…….”

“…….”

혹자는 상환일을 조금 미뤄 주는 게 그리 힘든 일이냐고 할 수도 있다.

만일 끝까지 후작가가 돈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그때 가서야 담보로 잡은 땅을 받아 가면 될 일 아닌가?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다. 노른자 같은 땅은 먼저 담보를 받아 간 이들이 선점한 이후일 테니 말이다.

상환일을 미루어 주게 되면 미뤄 주지 않은 자들에 비해 손해를 보게 된다.

“그대들 중 상환일을 미뤄 줄 수 있는 이가 있다면 손을 들게. 윈터펠 가문은 결코 그대들이 보여 준 신의를 잊지 않겠네.”

있을 리가 없지! 샤일록은 코웃음을 치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아내야 했다.

그 정도 계산도 할 줄 모르는 이라면 지금 이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겠는가?

‘하여간 귀족들, 세상 물정 모르는 건 알아줘야 해.’

제정신이 박힌 상인이라면 여기서 손해를 자처할 리 없다.

이 침묵만 깔린 광경을 보라. 누구 한 명 나서는 이가 존재하지 않…….

“하아…… 저, 크레타 상회의 카타리나는 1년 내의 기간이라면 상환일을 미뤄 드리지요.”

“?!”

샤일록의 고개가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며 그리로 돌아갔다.

가장 먼저 손을 든 상인은 적갈색 머리카락의 중년 여인, 카타리나였다.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을 눈치챈 그녀가 부연설명을 덧붙인다.

“그런 눈으로 보실 것 없습니다. 저는 젊은 시절 선대 후작님의 도움을 받았는걸요. 그분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저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겁니다.”

“그런…….”

멍청한 것. 그 선대 후작은 지금 병석에 누워서 오늘내일 하고 있잖아!

곧 뒤질 송장에게 은혜를 갚는 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샤일록은 진심으로 그녀의 어리석음에 혀를 찼다.

상인이라면 냉철하게 손익을 따지는 것이 덕목이거늘. 저리 정에 휘둘려서야 될 일도 되지 않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저 역시…… 1년 내의 기간이라는 조건 하에 상환일을 미뤄 드리겠습니다.”

“아, 아니 자네?!”

저 못지않게 돈을 밝히는 동료, 웨인까지 나서자 샤일록은 더 이상 표정 관리를 할 수가 없었다.

북부 상인 연합회의 웨인이라면 손해라면 죽기보다 싫어하는 자 아니었던가?

그가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끄응, 나 역시 선대 후작님의 은혜를 입은 몸일세. 빚을 면제해 달라는 것도 아닌데, 저 정도 부탁도 들어주지 않아서야 선대 후작님의 얼굴을 어찌 보란 말인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무튼 난 후작 부인의 부탁을 들어드릴 거요! 나와 카타리나 외에도 과거에 후작가의 도움을 받은 이가 꽤 존재하는 걸로 알고 있소만. 아무리 손익에 밝은 장사치라 해도, 우리는 장사치이기 이전에 사람이오. 어려울 적 받았던 은혜를 잊는다면 그건 인간이 아니라 금수라고 해야 마땅하지!”

“…….”

웨인의 호통에 싸한 적막이 내려앉는다.

선대 후작이 영지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 상인들을 지원한 건 상계에선 매우 유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선대 후작은 명줄이 얼마 남지 않은 환자이며, 이 자리에서 상환일을 미뤄 줬다간 손해를 볼 것이 자명하다.

‘선대 후작님이 많이 도와주신 건 사실이지만…….’

‘우리도 밥그릇은 챙겨야지.’

‘늦었다간 좋은 땅들은 다 빼앗기게 된다고.’

의리를 선택할 것인가, 실익을 선택할 것인가? 한참 눈치만 살피던 상인들이 하나둘씩 손을 들기 시작했다.

“그럼 저도…… 선대 후작님의 얼굴을 봐서 동참하겠습니다.

“이하동문입니다.”

많은 수는 아니었다. 전체 머릿수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손을 들지 않은 상인들이 아니꼬운 듯 눈을 흘겼지만, 한 번 뱉은 말을 물리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더 없는가?”

“…….”

“…….”

지원자들의 면면을 하나씩 확인한 나디아가 비로소 빙긋 미소 짓는다. 그러고는 무릎을 살짝 굽혀 보이며 인사했다.

“윈터펠 후작가는 오늘 보여 준 신의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네.”

“이, 이러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후작 부인. 고개를 드시지요.”

“아니, 그대들은 그럴 자격이 있어.”

그 모습을 바라보는 샤일록의 표정이 점차 일그러졌다.

돈을 갚을 능력도 없으면서 고상한 척하는 후작 부인이나, 대단한 결정을 했다는 듯 뿌듯한 표정을 짓는 상인놈들이나 죄다 아니꼽기 그지없었다.

‘노른자 땅을 다 빼앗기고 난 후에도 위선을 떨 수 있을지 두고 보자.’

그때 가서 후회해 봤자 늦다. 마지막에 웃는 이는 자신이 될 테니까.

그가 일부러 크게 혀를 차며 말했다.

“흠흠, 그럼 만기 상환일에 다시 뵙지요.”

“이름이 샤일록이라고 했던가? 돈은 상환일에 맞춰 준비해 줄 테니 걱정 말게.”

“흐음…… 그리 된다면 좋겠습니다만.”

세상물정 모르는 철없는 귀족 마님이 세 달 안에 그만한 돈을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평생 떠받들어지며 살아온 귀족 특유의 허세가 틀림없다.

나디아가 손짓으로 하인들을 부르며 말했다.

“너희들, 이분들을 성 바깥까지 배웅해 드리렴.”

“예, 후작 부인.”

“그럼 세 달 후에 다시 보겠군.”

“다시 뵐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부인.”

상인들은 그녀에게 인사한 후 등을 돌렸다.

밀물처럼 몰려왔던 상인들이 썰물처럼 우르르 빠져나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멀어지는 그들을 바라보는 나디아에게 집사 고든이 다가와 말한다.

“마님.”

“응?”

“일부 상인들이나마 설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바람그늘 평원의 절반 정도는 지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년까지 돈을 마련하지 못하면 그 절반도 빼앗기겠지만요.”

그렇게 덧붙이는 그의 표정은 침울하기 그지없었다.

저 나이에 저리 스트레스가 많으면 건강에 안 좋을 텐데. 짧게 혀를 찬 그녀가 단호하게 단언했다.

“아니, 돈은 상환일에 맞춰서 준비할 거야. 빚 진 금액 전부.”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고든의 눈이 커다래졌다. 혹시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꾸어 지참금을 내줄 생각을 하신 건가?

마음 한구석에 희망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그런 방법이 있어. 돈을 마련할 방법이.”

“그, 그렇다면 방금 어째서 상인들에게 상환일을 미뤄 달라고 하신 겁니까? 돈을 마련할 방도가 있으시다면서요.”

“아, 그건 말이지…….”

나디아가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의리를 아는 자들을 걸러내는 작업이지. 은혜도 신의도 모르는 금수들과 사업을 할 수는 없잖아?”

“예?”

“방금 상환일을 미뤄 주겠다고 한 자들에게 은밀히 사람을 보내 약속을 잡아. 대량으로 사들일 물건이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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