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여,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정말이에요.”
그건 진심이었다. 그냥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제 이야기가 들려서 걸음을 멈추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이미 신뢰를 잃은 지 오래였다. 글렌이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안채는 여기서 한참 떨어져 있을 텐데.”
“이제 제가 가문의 살림을 관리해야 하잖아요. 성을 둘러보는 건…… 당연한 거죠.”
문제를 해결하려면 처한 상황이 어떻게 되는지 정확히 알아야 하는 법.
재정 상태가 그 모양이니 영주성의 상태 역시 정상적이지는 않으리라고 예상했다.
생각했던 대로 여기저기 수리해야 할 곳 천지였다. 돈이 없어서 손도 못 대고 있는 듯했다.
경악스러운 상태에 넋을 놓고 걷다 보니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다. 기사단 숙소 역시 노후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험담했다는 사실보다 이런 곳에서 지내는 기사들에게 안쓰러운 감정이 차오를 만큼 말이다.
글렌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추궁했다.
“성을 둘러봐? 염탐하는 게 아니라?”
“염탐이라니요! 제가 그런 짓을 왜 하겠어요?”
돈 들어갈 구멍이 얼마나 많은지 조사하는 중이었다, 이 인간아.
나디아는 솔직하게 그리 말하는 대신, 살짝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매서운 어조에 상처받았다는 듯, 울상을 짓기도 했다. 사랑하는 남자에게서 의심받는 상황이라면 슬퍼해야 마땅했으므로.
거기에 더해 겁먹은 듯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며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얌전히 모은 양손은 애꿎은 치마자락을 잘근잘근 쥐어뜯는 중이었다.
그에게 모진 소리를 들을 때를 대비해 미리 연습해 두었던지라 자연스레 연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글렌의 표정은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모습이 가증스럽다는 듯 목소리가 더욱 험악해질 뿐이었다.
“목적도 달성했으니 연기를 계속할 필요는 없지 않나? 역할 놀이는 이제 그만두지 그래.”
아, 역시 안 속네.
나디아가 마음속으로 쯧 하고 혀를 찼다.
나이는 젊어도 한 가문의 당주라는 건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서 진실을 실토할 수도 없는 일.
초기 설정에 충실하는 것 외엔 달리 방법이 없었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 아래가 촉촉하게 젖어 들어가기 시작한다.
눈물 연기를 하기 위해 머릿속으로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려야 했다.
그녀가 다시 한번 연기에 몰입했다.
“제가 후작님을 사랑한다는 걸 알면서…… 왜 그런 모진 말씀을 하세요?”
“……뭐?”
글렌의 입이 황당하다는 듯 살짝 벌어진다.
그의 곁에 있는 기사들의 반응도 다르지 않았다. 턱뼈가 사이좋게 스르륵 흘러내리고 있다.
뭐가 어째? 제가 후작님을 사랑한다는 걸 알면서 왜 그런 모진 말씀을 하세요?
마치 로맨스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였다.
당연하게도 이런 상황에 전혀 면역이 없는 글렌은 몹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우, 웃기지 마라. 내가 그딴 연기에 속아 넘어갈 줄 알고…….”
“흐윽, 흑.”
“아니, 잠깐만.”
그의 금안이 사정없이 좌우로 흔들렸다.
인생의 대부분을 거친 북부 사내들 틈에서만 보낸 그가 우는 여자를 달래 본 경험이 있을 리 만무했다.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릴 지경이다.
분명 저 모습 또한 연기임이 분명한데…… 그 악독한 발라지트 공작의 딸이 저토록 마음이 여릴 리가 없는데…….
이성적으로는 그리 생각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지는 건 어찌 할 수 없었다.
글렌이 저도 모르게 몇 발자국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나디아는 그가 다가온 만큼 뒤로 물러나 버렸다.
“저, 전 이만 가 볼게요. 맹세컨대 대화를 엿들을 생각은 아니었어요.”
“잠시만-!”
그러더니 눈물을 닦으며 후다닥 달아나 버린다.
자그마한 뒷모습이 글렌의 시야 바깥으로 사라져 버리는 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허…….”
글렌이 그녀에게 손을 뻗은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돌처럼 굳어 버린 그의 곁에서 기사들이 한 마디씩 얹는다.
“방금…… 진짜 눈물이었어?”
“벼, 별말 안 했는데 울긴 왜 울어?”
“혹시 알아? 진짜 돈을 불려서 줄 생각이었을지도.”
“에이, 설마.”
발라지트 공작의 딸이 그럴 리 없지 않은가?
윈터펠을 방해하는 데에 몰래 쓰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상식적으로 저희가 발라지트의 사람을 환대할 리 없잖습니까. 예상하고 온 거 아닙니까?”
“정치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어서 가문간의 사이가 안 좋은 걸 모르는 건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자기 아버지 원수 가문을 몰라? 말이 되냐?”
기사들의 입에서 가시 돋친 말들이 하나씩 툭툭 튀어나왔다.
하지만 사나운 어조와는 달리, 표정은 덜 익은 감을 씹은 뜻 떨떠름하기 짝이 없었다.
* * *
‘안 쫓아오네.’
나디아가 뒤를 힐끔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저들과 실랑이를 하며 낭비할 시간 같은 건 없다.
영주성이 이 모양이니 다른 곳의 상태는 안 봐도 훤했다.
하루 빨리 돈을 벌어야 하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추가되자 마음이 조급해진다.
‘일단 빚을 해결하는 게 먼저야. 그렇지 않으면 매달 이자가 빠져나가니까…….’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며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본관에 도달해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시각이었다. 오늘은 이쯤 하고 휴식을 취할까 싶은 순간…….
“엣헴, 이리 오너라!”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고개를 돌리니 본채의 현관을 향해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개중 선두에 선 배불뚝이 사내의 걸음걸이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졸부처럼 화려한 비단옷을 걸치고 뒷짐을 진 채 거들먹거리며 걸어가고 있다.
저건 또 뭐야? 정식으로 결혼식을 치른 지 하루만에 별일이 다 생긴다.
마치 앞으로 펼쳐질 수많은 사건사고들을 암시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디아가 살짝 긴장하며 그들을 주시했다.
“이리 오너라아! 여기 영주를 만나러 왔다!”
……뭐?
나디아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뭐가 어째? 여기 영주를 만나러 와?
한 영지의 주인을 부르는 게 아니라 아랫것을 부르는 듯한 태도였다.
설령 그녀의 아버지라 해도 저런 태도로 윈터펠 후작을 대할 수는 없다.
같은 고위 귀족끼리도 저러진 않는다는 소리다. 저건 마치 빚쟁이를 대하는 듯한 모습…….
“…….”
거기까지 생각한 나디아가 얼음처럼 굳었다. 설마…… 에이, 설마.
하지만 그런 그녀의 추측에 확신을 더하듯, 저 멀리서 집사장 고든이 후다닥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예! 갑니다, 나리!”
중후하게 기른 콧수염을 휘날리며 달려오는 노년 사내는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나디아와 함께 있었던 그 사람이 맞았다.
순식간에 100m를 주파한 집사가 비단옷 사내의 앞에 선다.
“손님이 왔으면 얼른 마중을 나와야지!”
“하하, 죄송합니다, 샤일록님. 다른 업무를 보고 있었던 중이라…….”
집사는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사내에게 열심히 허리를 굽신거렸다.
나디아는 생각했다. 저건 거의 노인 학대라고.
하지만 경악스러운 광경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됐고, 영주 어딨어? 할 말이 있으니 좀 봐야겠소!”
‘미친…….’
옆집 꼬마도 저렇게는 안 부르겠다. 저 모습을 글렌의 충성스러운 기사들이 봤다면 칼부림이 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이길래 저리 당당하게 깽판을 부린단 말인가? 답은 곧장 알 수 있었다.
“아, 저, 그게…… 영주님은 지금 부재중이라서…….”
“어제 결혼식을 치른 새신랑이 가긴 어딜 가! 다 알고 있으니 숨길 것 없소! 만기 상환일이 얼마 남지 않았단 말이오! 오늘은 반드시 확답을 들어야겠소!”
“이보게, 집사장. 우리도 기다려 줄 만큼 기다려 주었소. 빚이 얼만지 알기는 하시오?”
“원정대가 돌아왔으니 뭐 얻어 온 콩고물이라도 있을 것 아니오?”
“게다가 새신부가 막대한 지참금을 가져왔다지? 설마하니 이번에도 상환일을 미뤄 달라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닐 거라고 믿소. 이러다 우리가 먼저 파산할 지경이오!”
“그, 그것이…….”
역시나 윈터펠 후작가에 돈을 빌려준 상인들의 무리인 모양이었다.
집사장의 이마에 굵은 식은땀이 맺히는 것이 멀리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듯했다. 노인 학대가 따로 없다.
하지만 정말 충격적인 것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선두에 선 사내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친다.
“이번에도 돈을 갚지 못한다면 담보로 잡은 바람그늘 평원을 가져가겠소!”
뭐? 바람그늘 평원? 나디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바람그늘 평원이라면…….’
윈터펠 영지의 생산량 중 절반을 차지하는 지역이다.
이 척박한 영지에서 그나마 생산력이 있는 땅이란 소리다.
“커헉!”
가만히 있었는데도 사레가 들렸다. 그녀의 입에서 거친 기침 소리가 터져나온다.
비로소 과거에 윈터펠 영지가 막대한 빚을 어찌 해결했는지 떠올려 낸 것이다.
그걸 ‘해결 방안’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해결하긴 뭘 해결해! 그냥 담보로 잡은 땅 뺏기고 끝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