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대답 않는 그녀를 대신하여 집사장이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발라지트 공작님께서 보내 주신 지참금의 액수를 계산해 보았는데, 빚의 대부분을 해결할 수 있겠더군요.”
“아버지가 체면을 원체 중히 여기시는 분이라 두둑하게 챙겨 주셨지.”
“딱 이런 위기 때 마님께서 와 주셔서 소인이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마님께서 조금만 도움을 주신다면…… 후작님도 매우 기뻐하실 텐데요. 하하, 하하하…….”
그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바닥을 비빈다. 늙은 나이에 고생이 많다며 위로해 주고 싶을 만큼 안쓰러운 모습이었다.
웬만한 명문가의 사용인들, 그것도 집사장쯤 되는 지위라면 프라이드가 드높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존심을 굽혀 가며 가문을 일으켜 세워 보려는 의지가 기특하긴 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나디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어, 어째서입니까!”
“이건 밑 빠진 그릇에 물을 붓는 거나 다름없어.”
예상보다 훨씬 냉담한 반응에 집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물론 안주인의 주머니인 지참금을 쉽게 내놓으리라고 기대한 건 아니다.
하지만 나디아는 이제 윈터펠 가의 사람이 아닌가? 주변의 눈치를 봐서라도 가문의 위기를 무시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허나 저 바늘 하나 안 들어갈 것 같은 표정을 추측컨대, 한 푼도 내놓지 않겠다는 말을 하려는 게 분명하다.
‘저…… 저……! 역시 발라지트 공작의 딸이라는 건가!’
실망감을 금치 못하였지만 지금은 감정에 휘둘려서는 안 되었다.
현재로서 이 빚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이는 나디아가 유일하다.
집사장 고든은 있는 힘껏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시 한번 애원했다.
“마, 마님……. 영지 사정이 정말 좋지 않습니다. 게다가 하필 조만간 몬스터 웨이브가 터질 것으로 예상되는 탓에……. 어, 어떻게 한 번만 안 되겠습니까? 예?”
“윈터펠 영지를 돕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야. 잘 생각해 봐, 집사장.”
나디아가 장부를 그의 눈앞에 들이밀며 말했다.
“원정으로 인한 빚을 지기 이전부터, 줄곧 빚이 조금씩 쌓이고 있더군. 거의 매년 적자를 기록했어.”
“아시다시피 윈터펠 영지엔 풍요로운 농경지가 몇 없습니다. 게다가 요 몇 년 사이 흉작이 겹치는 바람에…….”
“그래, 그게 문제야. 그게 문제라고! 윈터펠 가문의 초대 가주님이 어떤 분인지는 잘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하네. 영토 사기를 당하셨다는 것 한 가지만은!”
“……예?”
영토 사기? 집사장이 얼빠진 표정을 짓는다. 나디아가 흥분하여 말을 이었다.
“이 영지의 절반은 쓸모없는 황무지야. 게다가 날씨가 추워서 풍년일 때보다 흉작일 때가 더 많지. 몬스터는 또 오죽 많고? 심지어 특산물도 없어, 관광지도 없어, 항구도 없어! 어떻게 이런 땅을 자기 영지로 고를 수가 있는 거지? 일부러 후손들을 고생시킬 의도가 아니었다면 사기를 당하셨다고 생각할 수밖에!”
“…….”
좋은 땅덩이들 다 놔두고 왜, 하필이면 왜! 이런 곳에다 터를 잡느냔 말이다!
할 수만 있다면 초대 영주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고픈 심정이었다.
나디아가 진정하려는 듯 심호흡을 했다. 아직 할 말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농경지는 부족하고, 돈이 될 만한 산업은 없지. 심지어 몬스터 떼가 들끓어 군대의 규모는 거대하지. 이런 상황에서 군대는 돈 먹는 하마나 다름없어. 아, 물론 북부군의 위용은 대단하지. 그런데 그 대단한 북부군들에게 용병일을 시킬 순 없잖는가. 지금의 윈터펠 영지는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봐야 해.”
“…….”
구구절절 옳은 말이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사실 고든 역시 영지의 저주받은 입지를 수없이 원망했던 것이다.
오죽 하면 사기를 당한 게 아니냐는 말이 나왔을까 싶었다.
그가 한숨을 푹 내쉬며 반문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별달리 다른 수가 있겠습니까? 영지는 이미 이곳에 터를 잡았는걸요. 과거로 돌아가 초대 영주님을 말릴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별다른 수가 없기는. 이 영지의 체질을 개선하면 돼.”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돈 나오는 구멍을 만들어야 한다는 소리야. 그렇지 못하면 윈터펠 영지는 평생 가난에 허덕이게 될 거야.”
“허어.”
평생 가난에서 허덕이게 되다니.
영주성의 살림을 담당하는 그로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돋는 말이었다.
어떻게든 한 푼이나마 아껴 보려고 장부와 씨름하는 일은 이제 지긋지긋하다.
집사장이 몸을 부르르 떨며 물었다.
“그, 그럼 마님께선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우선 이 지참금을 불리는 것부터 시작해야지.”
아버지가 지참금을 넉넉하게 챙겨 주긴 했지만 드넓은 영지를 뜯어고치기엔 턱없이 적은 액수였다.
일단은 자금을 더욱 확보해야 한다.
몇 가지 계획을 떠올리는 그녀의 머리가 분주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 * *
호위 임무를 끝마친 파비안은 곧장 기사단 숙소로 돌아갔다.
호위는 허울상의 임무일 뿐, 실제 그가 맡은 역할은 새 마님에 대한 감시.
그는 상사에게 오늘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보고했다.
보고 중, 호위를 붙여 줬다는 것에 기뻐했다는 대목에서 글렌의 고개가 한 차례 갸우뚱 기울었다.
하지만 뒤이어 지참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결국 지참금은 한 푼도 내놓을 수 없다는 거군. 역시나.”
부부는 경제적 공동체다. 역으로 말하자면 지금 이 상황은 나디아가 글렌과 자신을 부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같은 배를 탄 아군으로 여기지 않으니 도움을 줄 의사가 없는 것이다.
지나가는 귀부인 백 명을 붙잡고 가문의 재정 위기에 지참금을 쓸 의사가 있느냐고 물어보라. 백 명 중 아흔다섯 명은 당연한 일이라고 답할 것이다.
첫눈에 반해 북부까지 쫓아올 정도로 열렬한 사랑에 빠졌지만 곤궁한 윈터펠 가의 사정은 도울 수 없다니.
이런 모순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새빨간 거짓말이었군.’
어떻게 예상했던 것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을 수가.
그가 참다못해 조소를 터트렸을 때였다. 우물쭈물하던 파비안이 뒷말을 이어 나갔다.
“아뇨.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고요…….”
“그럼?”
“지금 당장 빚을 갚기보다는 자금을 불리는 게 미래에 더 유용할 거랍니다.”
그때, 듣고 있던 동료 기사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건 그냥 허울 좋은 명분일 뿐이지! 넌 그 말을 믿냐? 순진한 녀석.”
“어…… 그런 건가요?”
“그래! 어찌 됐건 지금은 한 푼도 못 준다는 거 아냐? 돈을 불린 뒤에 준다는 건, 돈이 불어나지 않으면 미래에도 주지 않겠다는 뜻이고!”
파비안의 머릿속에 영지의 재정 상태와 입지에 대해 열렬하게 분노하던 나디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초대 영주님이 사기에 당한 것 아니냐고 열변을 토하던 모습은 연기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진심 같아 보였다.
“그래도 거짓말 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는데…….”
“아이고, 우리 막내 이렇게 순진해서 어떡하냐?”
“후작님, 정말 쟤한테 호위 겸 감시를 맡겨도 괜찮으시겠어요?”
“으음…….”
주변인들의 반응이 다 이 모양이니 제가 잘못 판단한 건 아닐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글렌이 진정하라는 듯 손짓을 하며 말했다.
“발라지트 가의 사람이 도움을 주는 게 더 이상한 일이지. 다들 너무 상심하진 말도록. 재정 문제는 내가 어떻게든 해결해 보겠다.”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입니다만, 그 빚이 갑자기 눈덩이처럼 불어난 이유가 뭐였습니까. 무리해서 칼라아이 원정에 지원한 탓 아닙니까?”
“공작이 분명 왕을 조종했겠죠. 원정에 참여하는 것은 봉신의 당연한 의무라고 하면서요.”
“그로도 모자라 후작님을 믿지 않아서 원치 않는 결혼까지 강요하고…….”
기사들의 성토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무리해서 원정에 출정한 것까지는 국경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명분이 있었으니 그렇다고 치자.
승리한 전쟁에서 얻은 대가가 미미한 것도 너그러이 이해해 줄 수 있다.
하지만 빚까지 내가며 목숨 바쳐 싸웠으면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왕은 아직도 북부인들을 믿지 못하고 있다. 주군인 윈터펠 후작을 발라지트의 딸과 억지로 결혼시켰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심지어 이 와중에 가지고 온 지참금은 한 푼도 내 줄 수가 없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화가 나지 않는다면 기사 작위를 반납하고 성직자의 길을 걸어야 할 인재다.
“물론 공작 영애가 한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압니다. 하지만…… 화가 납니다. 화가 난다고요.”
“왜 우리는 항상 참기만 해야 합니까?”
그런데 그때였다.
바스락.
“……!”
“누구냐!”
멀리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기사들의 고개가 한 곳으로 돌아갔다.
정원의 입구. 커다란 나무로 반쯤 가려진 여자의 모습이 보인다.
예상치 못하게 나뭇가지를 밟은 게 당혹스러운 듯 난처한 표정의 여자였다.
긴 머리카락과 고급스러운 옷이 작은 몸을 덮고 있었다.
멀리서 몇 번 본 게 다였지만 그들이 여자의 정체를 모를 리가 없었다.
남부에서 온 새로운 후작 부인, 나디아 윈터펠이었으므로.
“마, 마님?”
“왜 여기에…….”
험담하던 상대의 딸에게 그 광경을 들킨 상황이다.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난처해하는 기사들을 향해 나디아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