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그래서 그 여자는 지금 뭘 하고 있다더냐?”
“글쎄요……. 다른 하인들이 떠드는 걸 듣기로는, 아침에 얼굴이 부어 있다더라고요.”
“난 그 여자가 밤새 얼마나 울었는지에 대해서 물은 게 아냐.”
“그 꼴을 해서 일어난 걸 보니 해야 할 일정이 있었다는 뜻이겠죠. 정식으로 후작 부인이 되었으니 이제 가문의 살림을 둘러보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본격적으로 첩자 짓을 개시한다는 말이군.”
“예, 그렇죠. 이미 예상하셨겠지만.”
글렌의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안주인은 가문 내부인만 열람할 수 있는 서류에도 접근할 권리가 있다.
정말 극비인 정보야 문서화시키지 않긴 해도, 이쪽의 패가 일부나마 적에게 노출된다는 건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글렌이 이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손가락이 기사단의 막내를 가리킨다.
“파비안.”
“예!”
“나디아 발라지트는 수도에서 데려온 호위 기사가 없다. 그러니 네게 후작 부인의 호위를 맡기지.”
“어…… 그거 감시하라는 뜻이죠?”
“그래, 친정에 연통을 보내려 한다면 반드시 내게 보고하도록.”
“넵! 수상한 모습을 보이면 곧장 보고하겠습니다.”
귀부인의 호위는 기사들이 선호하는 임무에 속한다.
호위 대상이 하루의 대부분을 실내에서만 보내기에 편히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뻤던 것도 잠시, 우렁차게 대답했던 어린 기사의 표정이 이내 떫게 변했다.
그 표정 변화를 발견한 글렌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
“왜 그러지? 달리 문제라도 있나?”
“그쪽에서 제 호위를 거부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호위가 아니라 감시라는 걸 바로 알아챌 텐데요. 마님이 저더러 돌아가라고 하면 어떡합니까?”
“알아채 봤자 거부할 수가 없을 텐데. 적진에서 호위 한 명 없이 돌아다니다가 해코지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우와아……. 방금 엄청 악당 같으셨어요.”
“거부하는 결혼을 밀어붙였으면 이 정도는 감당해야지.”
글렌은 일부러 더욱 매몰차게 말했다.
상대는 ‘그’ 발라지트 공작의 딸. 순진해 보이는 얼굴과 눈물에 속아 넘어가선 안 된다.
이쪽을 방심시킨 뒤 배신하려는 계책임이 분명했다.
제게 거절당해 한참 울었다는 소식에 동정심을 가질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지금쯤 아마 안채에 있을 거다. 그리로 가 봐라.”
“예!”
* * *
“글렌이 제게 보내 준 호위라고요?”
“네, 아마 추가로 배정되는 다른 한 명과 번갈아가며 호위를 서게 될 겁니다.”
나디아의 눈이 깜짝 놀란 듯 동그래졌다.
갑작스레 찾아와 일방적인 통보를 했으니 놀랄 만도 하리라.
곧이어 자길 하루 종일 감시하려는 거냐며 호통이 떨어지겠지.
그런다고 얌전히 돌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어쨌거나 피곤한 일이 하나 더 생기는 셈이었다.
기 싸움을 각오한 파비안의 등허리에 살짝 식은땀이 맺혔다.
하지만 후작 부인의 반응은 그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그분이 저를 이렇게 생각해 주다니…… 정말 기뻐요!”
“?!”
“북부로 오는 길에 저를 호위해 주셨던 분이죠? 이런 것까지 배려해 주다니 후작님께선 상냥하기도 하시지…….”
“아, 예에…….”
꿈보단 해몽이라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걸까?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파비안의 입이 헤 벌어졌다.
그런 파비안의 반응이 보이지도 않는지, 새 마님은 꿈꾸는 소녀 같은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밤새 울었다는 말이 진실인 듯 살짝 부은 얼굴로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절로 안타까운 마음이 샘솟는다.
‘저는 호위가 아니라 감시라구요…….’
어쩌면 친구 하나 없는 타지까지 시집와서 남편에게 외면받는 현실을 인정하지 못한 나머지, 극도의 현실 회피를 하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글렌이 좋은 의미로 호위 기사를 보내 주었겠냔 말이다.
‘그래…… 곱게 자란 귀족 마님한테는 인정하기 힘든 현실이겠지.’
안타까운 마음에 하마터면 면전에서 혀를 찰 뻔했다.
새 마님을 바라보는 파비안의 눈빛이 동정심으로 물들어 갔다.
물론 나디아는 뻔히 보이는 속셈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그녀가 방긋방긋 웃는 얼굴로 생각했다.
‘나를 하루 종일 감시하겠다는 속셈이군.’
감시하려거든 얼마든지 해 보든가. 그녀로서는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자신이 발라지트 공작의 첩자가 아니라는 건 직접 감시해 보면 조만간 그쪽에서도 깨닫게 될 테니까.
“오늘 하루는 집사로부터 영주성의 살림을 인수인계 받을 예정이에요. 아마 하루 종일 집무실에서 있게 될 것 같은데…… 답답하다면 잠시 쉬었다가 와도 좋아요.”
“임무에 소홀할 수는 없습니다.”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눈을 떼느냐는 의미겠지. 나디아가 빙긋 웃으며 책상에 앉았다.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고든, 장부를 넘겨줘요.”
“예, 마님.”
늙은 집사장, 고든이 그녀에게 장부와 창고 열쇠, 그리고 인장을 건네주었다.
집사장은 머리가 전부 희게 물든 노인이었다.
하지만 물건을 건네는 동작만큼은 정중하고 절도있기 그지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나디아의 표정이 살짝 미묘해진다.
‘……너무 순순히 주는데?’
장부, 열쇠, 인장. 셋 모두 안주인의 입지를 상징하는 물건들이다.
물론 정실부인에게 가문의 살림을 맡기지 못하겠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도 불가능하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쉽게 인계받는 건 기대하지도 않은 일이었다.
약간의 마찰 정도는 마땅히 있으리라 예상했건만.
나디아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건네받은 물건을 내려 보았다.
‘설마 모조품인 건…… 아냐. 그렇게 금방 들통 날 하책을 쓸 리가 없지.’
그렇다면 제게 안주인의 권리를 순순히 인계해 주는 속셈이 무엇인가?
그 이유를 가늠하는 그녀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차분한 눈빛이 장부의 숫자 하나하나를 훑고 지나간다.
팔락, 팔락.
종이 넘어가는 소리만이 한참 동안이나 울려 퍼졌다.
그리고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 그녀는 몹시도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집사장.”
“예, 마님.”
“대체 빚이…… 왜 이렇게 많은 거지?”
아니, 영지 사정이 안 좋다는 건 전생에서도 알고 있었던 사실이긴 한데 그래도 이 액수는 너무하잖아?
나디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심각한 상황이다.
누군가 자금을 거하게 빼돌린 건 아닐까 했는데, 최소한 장부상의 숫자가 크게 비진 않는다.
그렇다면 멀쩡한 영지가 이토록 빚더미에 앉게 될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인가?
집사장이 침울한 얼굴로 대답했다.
“북부 특성상 어쩔 수가 없습니다. 몇 년에 한 번씩 몬스터 웨이브는 터지지, 땅은 척박하지, 그렇다고 상업이 발달한 것도 아니고 특산품이 있는 것도 아니라…….”
“매년 몬스터 떼를 토벌하는 대가로 왕실에서 보조금을 받아 갈 텐데?”
그 보조금을 한 푼이라도 줄이려고 안간힘을 쓰는 게 바로 그녀의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조차 이 빚의 액수를 본다면 자신이 너무 심했다는 걸 깨닫게 되리라.
“그, 그 보조금이라도 있었으니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겁니다! 게다가 올해는 칼라아이 원정까지 겹쳤지 않습니까? 없는 살림에 바득바득 긁어모아서 지원을 했으니 이렇게 될 수밖에요.”
“아니, 사정이 그러면 원정에 참여를 하면 안 됐었지! 전쟁에는 어마어마한 돈이 든다는 걸 설마 몰랐을 리는 없을 테고!”
“저희도 참여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때도 코가 석 자였단 말입니다! 그런데 봉신의 군사적 의무이네 뭐네 하면서 강요한 게 어디의 누구…… 허업!”
집사장이 기겁하며 제 입을 틀어막는다.
비록 끝까지 말을 잇진 않았지만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 어디의 누군가가 바로 내 아버지인 모양이군.”
“그, 그러니까, 마님, 제 말은…….”
“하아-.”
그녀가 한숨을 터트리며 마른세수를 했다. 여기저기 손 안 뻗친 곳이 없네요, 빌어먹을 아버지.
비록 나디아 본인이 한 짓이 아니긴 했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그리 이성적으로 딱 떨어지지 않는 법이다.
윈터펠의 가신들이 그녀를 고운 눈으로 바라볼 리 만무했다.
‘어차피 돈을 벌 계획을 세우긴 했지만…….’
그래도 어마어마한 액수의 빚이 쌓여 있다는데 암담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나디아는 몇 번이고 얼굴을 쓸어내리면서 한숨 쉬었다.
“뭐, 그래. 칼라아이 원정에 지원을 하느라 빚을 졌다고 쳐. 하지만 원정이 승리했으니 그에 따른 전리품을 받았을 텐데.”
“아, 그건…… 이미 아시겠지만 칼라아이 땅이 원체 황무지뿐이라…….”
“…….”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애초에 왕의 자존심 때문에 일으킨 전쟁이긴 했다.
고작 야만족 따위가 감히 대국(大國)의 서쪽 국경에 얼쩡거리는 걸 가만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리라.
야만족들을 저 멀리 쫓아내는 데엔 성공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다시 말해 승리해 봤자 얻어먹을 것 하나 없는 원정이었다는 소리다.
나디아가 이마를 감싸 쥔 채 길게 앓는 소리를 냈다.
전생에서 윈터펠 후작가는 어떻게 이 많은 빚을 다 해결했더라……?
아무리 기억을 뒤져 봐도 떠오르는 바가 없다.
한참 동안이나 신음을 흘리는 그녀를 위해, 집사장이 찬물을 가져다주었다.
한 잔 들이켜고 열불을 가라앉히라는 의미 같았다. 그가 은근한 목소리로 운을 뗀다.
“마님, 제게 좋은 해결 방안이 있습니다.”
“그게 뭐지?”
나디아가 세차게 고개를 들었다.
“비록 가문간의 사이가 안 좋긴 하지만, 어쨌든 이제 마님은 윈터펠 가문의 사람이 되었지 않습니까?”
“맞아. 내 성은 이제 윈터펠이지.”
“그으런 의미에서 말입니다…….”
집사장이 은근하게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이처럼 가문의 사정이 안 좋을 때에 마님께서 지참금을 빚 탕감에 써 주신다면…… 정말 정말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
집사의 눈빛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윈터펠 가의 일원이 되었으니 싫으나 좋으나 평생 북부에서 살게 됐지 않으냐?
친정 때문에 저택에서의 네 평판이 좋지 못한데, 이럴 때 크게 베풀어 준다면 네게도 좋고 우리에게도 좋을 것이다…….
‘그러니까 제발 살려 달라는 거군.’
나디아는 비로소 집사가 순순히 장부와 인장을 넘겨준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견제고 나발이고, 일단 이 망하기 직전의 재정 상태를 해결하고 보자는 의지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