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142)

제15화

나디아는 이름 모를 기사의 부축을 받아 웨딩 마차에서 내려왔다.

사이즈가 맞지 않은 웨딩 슈즈 때문에 걸음이 영 불편하다.

“이곳은 후작가 소유의 별장입니다. 결혼식은 별장의 정원에서 치러질 예정입니다. 혹시 이미 전해 들으신 바가 있습니까?”

“네, 그렇다고 들었어요.”

“다행이군요. 하객들은 정말 중요한 소수만 초대되어 인원수가 좀 적을 겁니다. 선대 후작님께서 병중이라 식을 크게 치르지 못하는 점 미리 양해 부탁드립니다.”

“선대 후작님께서 하루 빨리 쾌차하시길 바라요.”

이름 모를 기사는 면사포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그녀를 웨딩 로드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러고는 작게 속삭이듯 덧붙였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걸어가셔야 합니다.”

“네.”

웨딩 로드를 따라 붉은 카펫이 늘어져 있어 혼자 걷는 건 어렵지 않아 보였다.

“신부 입장!”

나디아가 허리를 세우며 식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편, 면사포 아래 가려진 그녀의 눈동자는 연신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중이었다.

시야가 조금 희끗하긴 하지만 전체적인 규모 정도는 확인할 수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규모의 결혼식에 나디아는 소리 없이 감탄하고 말았다.

‘와…… 약혼식보다 더욱 간출하게 치러지는 결혼식은 처음 봐.’

약혼식도 빠르게 치르느라 규모를 줄였다는 걸 고려해 볼 때 이건 말도 안 되는 처사였다.

아무리 꼴 보기 싫은 원수 가문과의 혼사라 한들, 가주의 결혼식을 이따위로 넘겨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대체 이 결혼식을 총괄한 게 누구…….

‘……아, 설마 가주 본인인가?’

자신을 바라보는 윈터펠 후작의 눈빛이 머릿속에 불쑥 떠올랐다.

혼약식을 이렇게 치르는 이유가 납득이 된다. 나디아는 시선을 다시 정면으로 던졌다.

웨딩 로드의 맨 끝에 검은 예복을 입은 남자가 우뚝 서 있었다. 면사포 너머로도 그가 장신임이 느껴졌다.

나디아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걸어 신랑의 곁에 섰다.

“지금부터 혼인서약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신랑신부가 나란히 서자 본격적으로 식이 진행되었다. 주례를 맡은 이가 길고 긴 축사를 읊기 시작한다.

등 뒤에서 하객들의 박수가 몇 차례 울렸고, 글렌이 나디아의 손에 결혼반지를 끼워 주었다.

나디아 역시 그의 손에 결혼반지를 끼웠다.

사실 거기까지만 해도 무난했다. 문제는 본식의 가장 마지막 절차였다.

바로 혼인서약의 마지막 맹세.

주례가 목소리를 엄숙히 낮추며 읊조렸다.

“신랑 글렌 윈터펠은 신부 나디아 발라지트를 아내로 맞이하여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시겠습니까?”

“……예.”

전부 포기한 듯 힘 빠진 목소리였다.

그 다음엔 나디아에게로 질문이 돌아왔다.

“신부 나디아 발라지트는 신랑 글렌 윈터벨의 반려자로서 평생 신의를 지킬 것을 맹세하시겠습니까?”

“예!”

신랑의 것과 대비되는 힘찬 목소리. 등 뒤에서 하객들이 작게 비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세상에. 철이 없는 건지, 머리가 없는 건지…….”

“발라지트 공작이 딸을 정말 곱게 키웠나 봅니다, 쯧쯧.”

“지금 자기 처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나 봐요.”

주례는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듯 계속 식을 진행시키기만 했다.

“이제 신랑신부는 맹세의 입맞춤을 나누십시오.”

“…….”

“…….”

잠시 침묵.

움직이지 않는 신랑을 보다 못한 주례가 덧붙였다.

“신랑은 우선 신부의 면사포를 걷으십시오.”

“……예.”

짧게 한숨을 내쉰 글렌이 마지못해 팔을 움직였다. 면사포를 헤치고 들어온 손이 턱을 살포시 붙잡는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면사포가 사라지자 비로소 시야가 뚜렷해졌다.

그 덕에 나디아는 처음으로 글렌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볼 수 있었다.

남성적인 얼굴형과 콧날. 뚜렷한 눈썹. 흔치 않은 은발과 호박색 눈동자.

무엇보다 이목구비의 조합이 그야말로 예술이다. 마치 조각상이 눈을 깜박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디아조차 일순간 심장이 뛸 정도였다.

‘저런 얼굴이라면…… 첫눈에 반해 북부까지 따라왔다는 말에 개연성이 생기지.’

얼렁뚱땅 지어낸 거짓말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나디아가 마음속으로 제 선택을 칭찬하고 있는 찰나, 조각상 같은 얼굴이 조금씩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물러나려는 그녀를 커다란 손이 단단히 붙잡는다.

이윽고 두 사람의 입술이 스치듯이 맞닿았다.

설마 진짜 접촉할 줄은 몰랐던 터라-하는 척만 할 줄 알았다- 나디아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 글렌.”

글렌은 그런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듯 곧장 허리를 곧추세웠다.

자세를 바로잡는 그의 표정은 고인 연못처럼 썩어 가는 중이었다.

“이로써 신랑신부가 부부의 연을 맺었음을 선언합니다. 하객들은 새로이 탄생한 부부에게 축복의 박수를 보내 주십시오.”

짝짝짝짝짝!

하객들이 기계적으로 박수를 친다. 글렌은 환호하는 하객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미치겠군.’

사춘기 소녀처럼 첫키스에 큰 의미를 부여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첫 입맞춤을 나눈 상대가 원수의 딸이라는 건 상상도 못 해 본 일이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나 조금 울적해지려는 찰나, 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는 손길이 느껴졌다.

거리상 그의 소매에 닿을 수 있는 이는 한 사람뿐이다.

“용건은 나중에. 일단 식 진행에 집중…….”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린 그가 일순간 흠칫했다.

제 옆에 자리 잡은 여자가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던 것이다.

도저히 연기라고는 볼 수 없는 행복한 미소.

볼을 발그레하게 물들인 신부가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속삭였다.

“지금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

“…….”

“너무 행복해요. 지금 세상에서 저보다 행복한 여자는 없을 거예요.”

“…….”

“정말로요.”

무슨 말로 답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나디아는 애초부터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배시시 웃으며 면사포를 내릴 뿐이었다.

얼굴을 가린 그녀가 그에게 매달리듯 팔짱을 꼈다.

“…….”

알 수 없는 감각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 글렌은 이를 악물고 그녀의 신분을 상기해야 했다.

‘저렇게 순진한 척해도 저 여자는 발라지트 공작의 딸이야. 아버지의 뜻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불과하지.’

순수한 척하는 미소에 속아 넘어가선 안 된다.

그 탐욕스러운 늙은이가 정말 딸의 사랑을 이뤄 주기 위해 시집보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북부와 남부의 대립이 갈수록 첨예해지고 있는 때였다.

이 따위 하책에 넘어가는 것만큼 망신스러운 일도 또 없으리라.

글렌은 일순간 흔들렸던 마음을 다잡으며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 * *

얼렁뚱땅 치른 예식이 끝난 후, 피로연이 곧장 이어졌다.

본식에 참석했던 하객들 대다수가 피로연에도 참석했는데, 그 말인즉 피로연의 규모도 보잘 것 없었다는 뜻이다.

규모가 작긴 해도 지킬 절차는 다 지키긴 했다.

하객들이 신혼부부에게 선물을 주며 앞길을 축복하는 절차도 그대로였다.

대부분 윈터펠 가문이 더욱 번성하길 바란다면서 귀한 물건을 바치곤 했다.

신기한 것은 개중에서 빈말로도 결혼을 축하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나디아는 북부인들의 눈치에 경탄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하객들의 인사를 모두 받아 준 나디아가 의자에 몸을 기대며 한숨을 쉬었다.

‘아…… 피곤해 죽겠다. 거기다 얼굴 근육이 뻐근해.’

그나마 예식 도중엔 면사포를 쓸 수 있어서 다행이었는데, 맨얼굴을 드러내는 피로연에선 어쩔 수 없이 방긋방긋 웃는 체를 해야 했다.

사방이 적대적인 인물로 가득 채워진 곳에서 행복한 척 웃는 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얼굴 근육에 거의 경련이 일 지경이다.

‘그래도 무사히 식을 치러서 다행이긴 한데…… 아니지. 고비가 하나 더 남았구나.’

바로 신혼부부의 첫날 밤. 며칠 전부터 그녀의 속을 썩였던 문제였다.

원수의 딸이라고 혐오하면서 잠자리를 함께하다니. 뇌가 아랫도리에 달린 건가?

고비의 순간은 오래 지나지 않아 찾아왔다. 하늘이 새까매진 시각, 하객들이 하나둘씩 집으로 돌아갔을 때쯤이었다.

늙은 집사가 조심스레 상석에 올라와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후작님, 시간이 늦었습니다. 이제 연회를 파하고 신방에 드시지요.”

“……신방?”

피로연 내내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던 글렌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탁! 들고 있던 와인 잔이 거친 소리를 내며 팔걸이 위에 놓였다.

그가 기막히다는 어조로 반문한다.

“고든, 방금 신방이라고 했나? 합방을 하라고?”

“예, 이제 결혼식도 올리셨으니 명실상부한 부부…….”

“나더러 날 암살하러 왔을지도 모를 여자와 한 침대를 쓰라는 말이냐?”

“아, 암살이라니요!”

나디아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른 것은 연기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내가 댁을 왜 죽여? 아버지와 대적할 수 있는 세력가는 그리 흔치 않은걸.’

가족과 전 약혼자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오래 살아 줘야 했다.

겸사겸사 그도 정적을 해치울 수 있게 되니 서로에게 이득 아닌가?

하지만 그런 그녀의 속내를 꿈에도 알 리 없는 글렌에겐 그저 가증스러울 연기일 뿐이었다.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린 그가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나디아 발라지트, 네게 질문 하나를 하지. 나와의 결혼을 자처한 이유가 뭐냐? 첩자짓? 혹은 반란 모의 문서를 위조하려고? 우리 가문에 반역죄를 뒤집어씌울 작정이냐?”

“그건…….”

“바른대로 말해라. 여기서 널 보호해 줄 이는 아무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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