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결혼식은 윈터펠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치러졌다.
나디아조차 이렇게 빨리 진행될 줄 예상하지 못해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시간을 질질 끌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시간을 끄는 게 무의미하다고 판단 내린 모양이다. 나디아 입장에서야 환영할 일이었다.
전해 들은 일정대로라면 드레스나 식장을 준비할 시간이 모자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해결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이 웨딩드레스는 선대 후작 부인께서 시집올 때 가져오셨던 옷입니다. 결혼식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작고하신 후작 부인의 드레스를 입도록 해요.”
대대로 웨딩드레스를 물려 입는 건 귀족 가문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다.
사실 나디아는 결혼식 자체를 통으로 생략한다 하더라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속내를 모르는 하녀장은 거의 변명하듯 설명을 덧붙였다.
“미리 이야기를 들으셨을지 모르겠지만, 결혼식은 간출하게 치러질 예정입니다. 몬스터 웨이브와 흉년이 겹쳐 영지민들의 사정이 좋지 않아요. 이런 상황에서 영주님이 혼약식을 사치스럽게 치른다면 필히 원성이 높아질 겁니다.”
“괜찮아. 이해해.”
“물론 일생에 한 번뿐인 결혼식을 간략하게…… 예? 방금 뭐라고 하셨나요?”
“나는 이제 발라지트 공작 영애가 아닌 윈터펠 후작 부인인걸. 그러니 영지민들을 우선하는 게 당연하지.”
“허…….”
귀족 영애의 일생에 결혼식보다 더 중요한 행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장례식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결혼식이었다.
웬만한 귀족 영애들에게 결혼식을 얼렁뚱땅 치를 것을 강요했다간 사단이 나도 크게 날 것이 자명하다.
자신을 무시하는 거냐는 둥, 나를 핍박했다간 아버지가 가만히 있을 것 같냐는 둥, 예상되는 시나리오만 수십 가지였다.
그랬기에 이 말을 꺼내기 전까지 얼마나 긴장했던가?
그러나 마음을 졸였던 게 무색하게도 예비 마님의 태도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오히려 나디아는 행복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태도로 반문했다. 마치 꿈꾸는 소녀 같은 어투였다.
“북부 땅이 남부처럼 풍요롭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단다. 하지만 그분을 사랑해서 북부로 오길 자처했으니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하지 않겠니?”
‘아…… 사랑에 빠진 여자 행세, 정말 힘들다.’
컨셉을 너무 과하게 잡은 건 아닌지 슬슬 걱정될 지경이다. 좀 자중할걸.
내심 후회하고 있는 그녀의 등 뒤에서 픽 하고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흥! 퍽 재밌는 소리를 하는구나.”
“……그레이스 부인.”
뒤를 돌아보자 회색 머리칼의 귀부인이 의자에서 일어나는 모습이 보인다.
그레이스 그린우드. 글렌 윈터펠의 고모이자, 나디아에게는 시고모가 되는 여인이었다.
선대 후작 부인이 세상을 떠나고 선대 후작이 병석에 누워 오늘내일 하는 지금, 그녀는 이 가문의 가장 높은 웃어른이나 다름없었다.
깡마른 몸매와 고지식해 보이는 입술에서 그녀의 성격이 보이는 듯했다.
가까이 다가온 그레이스 부인이 들고 있는 부채로 나디아의 어깨를 내려쳤다.
“……제가 말실수를 했다면 너그러이 가르쳐 주세요.”
“마치 진짜 이 가문의 안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말하는구나.”
“?”
나디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둥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아!’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그러고 보니 아직 혼인서약을 치르지 않았네요. 그전까지 제 성은 윈터펠이 아니죠.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인.”
“그런 말장난을 하자는 게 아니잖아!”
그레이스 부인이 체면도 잊고 소리를 질렀다가 곧장 표정을 가다듬었다.
하마터면 아랫것들이 보는 앞에서 교양 없이 소란을 피울 뻔했다.
“흠흠…… 우리 가문에서 이 결혼을 인정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으냐는 뜻이었다.”
네가 수도에선 얼마나 날고 기는 명문가 여식이었는지는 몰라도, 여기서는 내 아랫사람이야.
그녀가 그런 의미를 담아 나디아를 노려보았다.
초장에 서열 정리를 확실히 하지 않으면 추후에 피곤한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아무리 권신의 딸이라 한들, 저 계집에게 이곳은 적진의 한복판이다.
게다가 비호해 줄 이도 없는 상황.
나이까지 어리니 조금만 겁을 준다면 마음대로 휘두르는 건 일도 아니리라.
아니나 다를까 나디아의 얼굴에서 핏기가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한다.
나디아가 충격에 빠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예……? 국왕 폐하의 명으로 맺어진 결혼인데 대체 누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인지…….”
“뭐?”
“그,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누가 들을까 봐 무섭습니다. 세인들이 윈터펠 가문은 왕실에 불충하다고 의심하겠어요.”
“불충이라니! 내가 언제!”
“폐하께서 주선한 혼사를 인정하지 않는다니 그게 불충이 아니라면 무엇인가요?”
“큿!”
부채를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그레이스 부인은 빠르게 곁눈질로 방 안에 있는 이들을 훑어보았다.
모두 윈터펠 후작가의 충성스러운 사용인들이지만 혹시 말이 새어나갈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이 영악한 계집이……!’
윈터펠 가문의 사람들 중 나디아를 제대로 된 안주인으로 인정하는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저쪽에서 왕실을 걸고넘어진 이상, 이미 덫에 걸린 셈이나 다름없었다.
조카인 글렌은 여자들의 다툼에 관여하진 않을 테지만 윈터펠 가문의 왕의 명령을 우습게 안다는 소문이 나도는 것까지는 용납하진 않을 것이다.
여기서 계속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불리해지는 건 그녀였다.
이성적으로 판단내리자면 여기서 물러서야 옳았다.
하지만 아랫것인 하녀들 앞에서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추태를 보일 수야 없는 노릇이다.
그레이스는 자존심을 세우듯 턱끝을 치켜 올리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아무리 국왕 폐하라도 신하의 집안일에 일일이 간섭할 수는 없어! 이 혼약이 맺어진다 한들, 글렌이 널 보호해 줄 것 같으냐!”
“제가 아내로서 진심을 보인다면 언젠가 그분도 저를 아껴 줄 테지요.”
“어디 한번 두고 보자꾸나. 네가 쫓겨나는 게 빠를지, 내 조카가 너를 아내로 받아 주는 것이 빠를지!”
그레이스 부인이 표독스럽게 그녀를 노려본 뒤 등을 돌렸다.
나름대로 자존심을 세우고자 하는 것 같아 보였으나, 도망치는 처지에 그래 봤자 딱히 위협적이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쾅!
문이 부서질 듯한 굉음과 함께 그레이스 부인이 퇴장했다.
그녀가 사라진 방 안에는 긴장된 침묵만이 감돌뿐이었다.
하녀들이 어쩔 줄 모르며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다. 쭈뼛거리는 기색을 눈치챈 나디아가 부드럽게 말했다.
“하던 일 계속하렴.”
“네, 넵!”
대놓고 남편에게 냉대받을 거라는 말을 듣고도 기분 좋은 새신부가 있을 리 없었다.
더욱 문제는 실제로 그럴 확률이 높다는 것이었다.
말단 하녀인 그들의 입장에선 아무리 입지 없는 안주인도 두려운 존재이기 마련이다.
괜히 화풀이 상대가 되어 매를 맞게 될지도 모른다.
하녀들은 나디아의 옷 치수를 재면서도 분위기를 풀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레이스 부인의 말씀은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럼요, 그럼요. 이렇게 어여쁘신데 어느 사내가 냉대…… 아니, 아니! 어느 사내가 눈길을 거둘 수 있겠어요?”
“저, 저희가 최선을 다해 치장해 드릴게요. 후작님께서 한눈에 반하시도록…….”
하녀들이 웃전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아부를 떨기 시작했다. 마님이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전혀 모른 채.
나디아가 생각했다.
‘그래 주면 이쪽이야 환영이지.’
결혼 첫날밤을 혼자 지새우는 건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문제는 글렌과 정말 잠자리를 해야 하는 상황이다.
만에 하나 그 남자가 합방을 하자고 하면…… 그러면…….
‘……어떡하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피할 방법이 나오지 않는 그 문제.
그레이스 부인이 요란하게 떠들고 간 탓에 애써 외면했던 문제가 다시 상기되어 버렸다.
미처 해결하지 못한 난관 앞에서 나디아의 표정이 와그작 일그러졌다.
* * *
결혼식까지 남은 시간은 쏜살처럼 지나갔다. 사실 며칠 남지 않은 날짜이기도 했다.
결혼식 준비가 얼렁뚱땅 진행되는 동안 나디아의 머릿속에선 한 가지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합방을 한다고? 진짜?’
아내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냐는 말을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서른 번은 넘게 들은 것 같았다.
아니, 안주인으로 인정을 하든가, 아니면 합방도 생략하든가. 둘 중 하나만 해라, 하나만.
몹시 어이없는 상황이었지만 윈터펠 후작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설정상 항의하기도 뭣했다.
사랑에 빠졌다는 설정에 충실하려면 합방을 거부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이대로라면 정말 말 몇 마디 나눠 보지 못한 남자와 잠자리를 함께해야 할 판국이었다.
전생에 약혼자가 있긴 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결혼식까지 치르진 못한 그녀다. 그렇기에 당연히 경험도 없었다.
‘솔직히 긴장이 안 된다면 거짓말인데…….’
당혹스러운 상황에 표정을 구기던 그녀는 이내 혀를 쯧 찼다.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순결 까짓게 뭐라고.
불행 중 다행인 점이라면 윈터펠 후작의 껍데기만큼은 훌륭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나디아는 관례대로 몸을 정갈히 하며 결혼식을 기다렸다.
그리하여 마침내 결혼식 당일.
수선한 드레스를 입은 나디아가 웨딩 마차에 올라탔다.
신부와 함께할 남자 형제나 아버지가 없었기에 그녀는 홀로 결혼식장으로 향해야 했다.
이윽고 그녀를 태운 마차가 덜컹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디아는 부케를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목적지에 도착하길 얌전히 기다렸다.
면사포를 젖히고 창밖을 내다보자, 성밖의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야외 결혼식이라더니 성 바깥에서 치르는 모양이었다.
점차 식장에 다가가고 있다는 걸 암시하듯 음악 소리가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했다.
잠시 후, 강과 들판이 보이는 곳에서 마차가 멈춰 섰다.
“도착했습니다, 마님.”
덜컹.
웨딩 마차의 문이 열리고 눈앞으로 손이 불쑥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