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나디아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쉬는 중이라고 생각했던 짧은 시간 동안, 이지호의 얼굴은 싸늘하게 식을 대로 식어 있었다.
갑자기 왜 저래? 그녀는 당혹감을 숨기지 못한 채 대답했다.
“경과 저의 결혼이라니, 확실히 정해진 일도 아니었잖아요.”
“공작님께 똑똑히 전해 들었습니다. 개선식이 열리기 불과 며칠 전이었죠. 개선식 때 월계관을 받는 것을 계기로 결혼이 진행될 것이라고. 분명 그랬는데, 개선식 후에 갑작스레 말씀을 바꾸시더군요. 딸아이의 요청이 있어 바꾸게 되었다고요.”
“그건…….”
“저와 결혼하는 게 몸서리쳐질 만큼 싫었습니까? 제가 이방인이라서? 출신 모를 놈이라?”
그의 목소리가 점차 격양되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듯 몇몇 사람들이 이쪽을 힐끔대기도 했다.
이목을 끌어서 좋을 것이 없었다. 나디아는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저는 지호 경의 출신이 천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게 치면 저도 반은 평민의 피가 섞여 있는걸요.”
“거짓말.”
“지호 경.”
“그런 빈말을 하려거든 표정 관리부터 하시지요. 아니면 제 앞에선 그런 노력을 기울일 가치도 없다는 겁니까?”
“그저 피곤했을 뿐이에요. 제 표정에 과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아요.”
“제 앞에선 사교용 미소조차 짓고 싶지 않다는 거군요.”
“…….”
나디아의 표정이 왈칵 일그러졌다.
좋게 달래려는데 저런 반응이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무엇보다…….
‘나를 먼저 배신한 건 그쪽이었잖아.’
차가운 지하실에서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했던 기억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그런 주제에 감히 누가 누구에게 화를 내는 건지.
카레인과 아버지가 미운 만큼 그 역시 원망스러웠다.
배신감이 더해졌기에 더했다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은 감정이었다.
짜증스레 한숨을 내뱉은 그녀가 말을 이었다.
“지호 경도 딱히 저와의 결혼을 반기지 않았잖아요.”
“제가 언제 그런 말을 했습니까?”
“고귀한 핏줄의 아내를 얻어 신분을 세탁하고 싶었는데 웬 서출과 혼약을 맺게 되었으니 탐탁지 않았겠죠. 만일 저 대신 카레인과 결혼하라고 제안받는다면, 거절할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나요? 적녀의 남편 대신 서녀의 남편이 되는 길을 택할 수 있느냐는 말이에요.”
“…….”
“이해해요. 누구나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보완해 줄 배우자를 찾는 법이니까.”
“…….”
그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때로는 침묵이 대답을 대신하기도 하는 법이다.
그럴 줄 알았지. 한동안 그의 대답을 기다리던 나디아가 짧게 하, 하고 한숨인지 한탄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이것으로 죽기 직전 카레인에게서 들었던 말이 거짓은 아니라는 게 명확해졌다.
대체 뭘 기대한 걸까?
비록 아버지의 명령으로 약혼한 사이였지만 반려자로서 의리는 지키려 했다.
그가 자신을 먼저 배신하지만 않았다면 자신이 과거로 돌아올 일도, 이렇게 말씨름을 하고 있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죄책감 같은 건 들지 않는다. 그녀에게 이지호는 카레인과 동급으로 깨부숴야 할 적이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상적인 배우자감이 아니잖아요.”
“…….”
“그러니 이제 각자 갈 길 가요. 아버지가 어울리는 신붓감을 소개시켜 줄 테니까.”
때마침 음악이 끝났기에 나디아는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녀를 붙잡으려고 한 듯한 그의 손이 갈 길을 잃은 채 허공을 부여잡는다.
“저는 일주일 내로 수도를 떠날 거예요. 어쩌면 영영 다시 뵐 일이 없을지도 모르죠.”
“…….”
“모쪼록 잘 지내시길.”
나디아는 기계적으로 무릎을 살짝 굽히며 인사했다.
그에 비해 이지호는 그녀에게 인사할 생각도 못한 채 멀뚱히 서 있기만 했다.
거절당했다는 것에 기분이 상한 것 같기도 하고, 다소 충격을 받은 것 같기도 하다.
내 알 바 아니긴 하지만.
나디아가 매몰차게 몸을 돌렸을 때였다.
“나디아 양.”
등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녀는 끝내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미 한 번 자신을 배신한 남자에게 구질구질한 미련 같은 건 갖지 않는 편이 낫다.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피곤해…….’
아버지의 수족 앞이라 조금 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어째 춤을 추기 전보다 더 피곤해진 것 같았다.
보는 눈이 없는 장소에서 잠시 쉬어야겠다.
발라지트 저택의 정원은 몹시 넓었고, 평생 그곳에서 살아온 나디아는 어디로 가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장미정원을 지나 자그마한 연못.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은신처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역시 아무도 없네.’
정원에 있는 여러 연못 중 가장 작고 구석에 있어 관리 역시 제대로 되지 않았다.
죽은 공작 부인이 연못을 메워 버리려고 했다는 말도 얼핏 들은 것 같았다.
비록 실행에 옮기진 못하고 병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말이다.
“하아…….”
나디아는 한숨을 내쉬며 잔디밭 위에 자리를 잡았다.
풀밭 위에 앉아 잔잔한 수면 위를 바라보고 있으면 어지러웠던 마음이 정리되는 기분이다.
그런데 그때.
바스락.
그녀의 휴식을 방해하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디아 언니!”
“……아, 너였구나.”
장미 풀숲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다름 아닌 카레인이었다.
이지호가 쫓아온 줄 알고 깜짝 놀랐는데 그가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안도하는 뇌와는 달리 표정은 반사적으로 구겨지고 있었다.
‘어쩌면 더 피곤한 상황이 발생할지도…….’
카레인이 이복언니의 휴식 시간을 존중해 줄 리가 만무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저 표정을 보라. 악의와 심술로 똘똘 뭉친 표정에서 여기까지 찾아온 의도가 보이지 않은가?
“여긴 무슨 일이야?”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숨 돌릴 틈도 없이 악담을 내뱉기 시작했다.
“공작가를 망신시키지 말라는 얘기를 하려고 왔지. 방금 사람들이 널 보고 뭐라고 했는지 알기나 해? 개새끼처럼 남자 앞에 쪼르르 달려가는 꼴이라니……. 내가 다 부끄러웠단 말이야. 우리 가문 체면은 생각도 안 해?”
“…….”
“제발 어디 가서 가문 망신 좀…… 듣고 있어?”
안 듣고 있다. 나디아는 그리 말하는 대신 표정으로 답해 주었다.
네가 뭐라고 말하든 조금도 관심 없다는 듯 시큰둥한 표정.
완전히 무시당했다는 걸 자각한 카레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이게……! 잠시 아버지의 관심을 받았다고 건방지게 굴지 마!”
역시 그게 문제였나?
그날 발라지트 공작이 나디아의 편을 들어준 게 어지간히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왜 굳이 찾아와서까지 시비를 거나 했더니. 그 수준 낮은 유치함에 조소를 참기 힘들었다.
“아버지가 널 딸로 인정해 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그저 널 이용하려는 것뿐이라고! 내가 북부로 가겠다고 했으면 아버지는 한사코 나를 말렸을걸. 널 딸이 아닌 체스말로 생각했으니 북부로 보낼 생각을 하신 거지.”
“체스말이라…… 맞는 소리네. 그런데 혹시 아니? 나와 지호 경의 혼사가 물 건너갔으니 그 자리에 널 끼워 넣을지도.”
“뭐?”
카레인의 표정이 심한 모욕이라도 당한 듯 일그러졌다.
입술과 볼이 파르르 경련하고 있었다. 그녀가 격양된 목소리로 외쳤다.
“그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
“나, 난 공작 부인의 딸이야! 내 외가는 유서 깊은 백작 가문이라고! 출신 모를 이방인 따위가 어떻게 내 남편이 될 수 있단 말이야!”
나디아는 대답 대신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표정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사실 너도 알고 있잖아. 정실 소생이든 측실 소생이든, 공작에게 딸이란 그저 정략결혼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
멍청하고 불쌍한 것. 나처럼 하루빨리 아버지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편해질 텐데.
넌 영원히 사랑받는 딸이 될 수 없어.
“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깃든 동정심을 눈치챈 카레인은 거의 거품을 물 만큼 흥분했다.
저따위가 뭐라고 감히 자신을 동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단 말인가?
극도로 흥분하게 되면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기 마련이다.
그녀는 논리적인 반박은 물론이고, 저급한 욕설조차 떠올리지 못한 채 삿대질만 해댔다.
파란색, 붉은색, 하얀색 등 다채로운 색깔로 물드는 얼굴이 퍽 볼만했다.
그러던 중, 나디아의 시야에 들어오는 물건이 하나 있었다.
바로 이복자매의 목에 걸린 목걸이. 굵은 사파이어가 아름다운 물건.
그건 어머니가 남긴 몇 안 되는 유품이었다.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카레인이 눈을 얇게 뜨며 물었다.
“뭘 쳐다보는 거야!”
“…….”
“내 말 무시하지 마! 아버지는 곧 너한테서 관심을 잃을……!”
잔뜩 흥분해 화를 내던 카레인은 곧 이복언니의 시선이 정확히 제 목덜미를 향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왜 목을 쳐다보지? 목덜미를 더듬어보니 차가운 액세서리의 감촉이 손에 걸린다.
제 목에 걸려 있는 것은 화려한 사파이어 목걸이였다.
그리고 그것은 찢어 죽이고 싶을 만큼 얄미운 이복언니의 어머니가 남긴 유품이다.
언니가 이 목걸이를 탐난다는 듯 바라보는 이유야 뻔하디뻔했다.
‘아하.’
네 약점이 이거구나? 언제 펄펄 뛰며 화를 냈냐는 듯, 그녀의 입가에 득의만만한 미소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