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142)

제10화

혼약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빠르게 진행되었다.

다만 귀족 가문 체면상 절차를 생략할 수는 없었기에, 수도에서 간단히 약혼식을 올린 후 윈터펠 영지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온갖 자질구레한 절차들을 모두 끝낸 지 사흘째 되던 날, 비로소 두 가문의 결합을 축하하는 야외 파티가 열렸다.

장소는 바로 발라지트 저택의 후원.

나디아는 새벽부터 일어나 곱게 단장한 채 예비 남편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했다.

화려하게 치장한 채 나타난 나디아를 바라보며, 귀족들은 소리 죽여 속삭였다.

“그거 아세요? 윈터펠 후작령은 거의 1년의 반이 겨울이래요. 어떻게 그런 땅에도 사람이 사는지 몰라요.”

“그런 동네이니 그리 반반한 얼굴인데도 후작과 결혼하겠다는 영양이 없는 거죠.”

“하긴, 그렇지 않으면 굳이 서녀와 결혼할 이유가…….”

얼렁뚱땅 치른 약혼식이 끝나고 나서도 사람들의 입방아는 사그라들 줄을 몰랐다.

나름대로 목소리를 죽인 것 같은데 생생히 들려오는 게 미스터리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나디아는 깔끔하게 그들을 무시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다고 표현하는 쪽이 옳으리라.

‘나는 지금 사랑에 빠진 여자다……. 사랑에 미친 여자다…….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게 되어 행복해서 어쩔 줄 모르는 여자다…….’

남자에게 공개 고백을 할 정도로 사랑에 미쳐 버린 여자. 그게 바로 지금의 나디아 발라지트였다.

그러니 보는 눈이 많은 장소에선 사랑을 이루게 된 철없는 여인을 연기할 수밖에.

그녀는 긴장되고 설레어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연신 파티장 입구를 힐끔거렸다.

누가 보더라도 약혼자의 등장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여인의 모습이다.

보수적인 귀족들은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차기도 했다.

연기에 심취한 그녀에게 발라지트 공작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나디아.”

“일찍 오셨네요, 아버지.”

“내가 주최하는 파티나 다름없으니 자리를 지켜야지. 그보다 꽤나 들뜬 얼굴이구나. 누가 보면 정말 윈터펠 놈이 좋아 죽는 줄 알겠어. 이미 결혼은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는데.”

그 역시 보수적인 늙은 귀족들 중 하나.

아무리 결혼을 밀어붙이기 위한 핑계였지만 딸이 고고하게 행동하지 않는 모습이 탐탁지 않은 것일까?

나디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아버지의 마음에 들 만한 대답을 골라냈다.

“저는 국왕 폐하 앞에서 제 마음을 고백했어요.”

“응?”

“목적을 이뤄냈다고 갑작스레 태도를 바꾼다면 저는 폐하를 능멸한 것이 됩니다. 사람들이 우리 가문의 충심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논하는 건 기분 나쁘잖아요.”

“흐음…… 뭐, 그것도 그렇구나.”

아버지가 납득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파티장 입구에서 사람들이 술렁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아니나 다를까 잘 차려입은 글렌이 사람들을 헤치며 걸어오고 있다.

나디아가 얼굴 근육을 움직여 활짝 웃음 지어 보였다.

“윈터펠 후작님!”

그러고는 거의 뛰다시피 쪼르르 그에게로 다가갔다.

속사정을 다 아는 발라지트 공작마저도 깜짝 놀랄 만큼 빼어난 연기였다.

‘설마 정말 저놈에게 반한 건 아니겠지……? 외모 하나만큼은 번지르르한 놈이니.’

상기된 얼굴로 달려 나가는 나디아는 사랑에 빠진 여인 그 자체였다.

공작마저 한순간 헷갈릴 정도였으니 다른 이들의 반응은 말할 것도 없으리라.

“조용하고 얌전한 아가씨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사랑에 빠지니 사람이 저렇게 달라지는군요.”

“원래 얌전한 고양이가 제일 먼저 부뚜막에 올라간다고들 하지 않나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쯧쯧.”

우아함과 차분함은 귀족 사회가 여자들에게 강요하는 기본적인 덕목이었다.

감정을 감출 생각도 못한 채 저리 헬렐레 웃음을 흘리는 꼴이라니.

보수적인 귀족사회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은 절대 아니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혀를 차건 말건, 나디아는 방긋방긋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후작님과 함께 입장하고 싶었는데…….”

“…….”

글렌이 굳은 얼굴로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너무 기쁜 얼굴로 반겨 주기에, 한순간 그녀와 자신이 정말 친한 사이인 줄 착각할 뻔했다.

혹시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어릴 적 인연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이 여자는 발라지트 공작의 여식이야. 윈터펠의 적이다.’

아버지와 윈터펠 가문이 어떤 사이인 줄 뻔히 알면서도 저렇게 천연덕스러운 연기라니.

하여간 발라지트의 핏줄이 섞인 것들은 하나같이 음습하기 그지없었다.

“늦는다고 미리 연락이 갔을 텐데. 많이 기다리게 한 건 아닌지 미안하군.”

사실 일부러 늦게 왔다. 그의 의도를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나디아는 그저 해맑은 얼굴이었다.

“많이 기다리긴요. 딱 제시간에 도착하셨는걸요. 마침 댄스 타임이랍니다.”

“아…… 그래.”

“자, 저쪽으로 가요.”

나디아는 뻣뻣하게 굳은 글렌과 팔짱을 끼곤 중앙으로 향했다.

그는 정말 내키지는 않는 듯했지만 그녀가 이끄는 대로 따라와 주었다. 주위의 시선을 의식한 듯했다.

오늘 파티의 주인공들이 나서자 사람들이 얌전히 길을 터준다.

그 덕에 두 사람은 손쉽게 파티장의 정중앙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음악에 맞춰 스텝을 밟으며 나디아가 생각했다.

‘아, 이것도 여간 힘든 게 아니네.’

그녀는 한 시간째 방긋방긋 웃는 표정을 짓고 있는 중이었다.

슬슬 얼굴 근육에 무리가 오기 시작한다. 한껏 끌어올린 입꼬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래도 웃어야 한다.

그리도 열렬하게 좋아하는 남자와 춤을 추게 되었는데 시큰둥한 표정을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디아는 억지로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에 비해 마지못해 춤을 추는 글렌의 표정은 떨떠름하기 짝이 없었다.

자신을 향한 그녀의 눈빛이 그윽해질수록 그의 얼굴은 점차 썩어 갔다.

“무슨 생각이지?”

“예?”

저 말을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을 묻는 거라고 생각할 만큼 나디아는 멍청하지 않았다.

이런 사기 행각을 벌이는 이유를 순순히 자백하라는 말이리라.

단둘이서 붙어 있게 되면 이런 추궁을 받으리라 익히 예상했던 만큼, 그녀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가까이서 보니 더 잘생겼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거 말고.”

“그럼 렌과 함께 하는 시간이 정말 꿈같다는 생각?”

“렌?”

그의 턱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이는 듯했다. 정말 친한 사이에서만 부르는 애칭을 함부로 부르다니.

그의 분노를 사리라는 걸 예상했으면서도 일부러 애칭을 사용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러면 대화 주제를 호칭으로 넘길 수 있겠지.’

아니나 다를까, 그의 반응은 그녀가 의도한 그대로였다.

“벌써 애칭을 부르기엔 그대와 내가 아직 먼 사이가 아닌가 싶은데.”

“하지만 저희는 곧 가족이…….”

“윈터펠 후작. 혹은 그냥 이름. 둘 중 하나를 사용해.”

“그럼 글렌이라고 부를게요.”

면박에 가까운 태도에도 불구하고 나디아가 첫사랑에 들뜬 소녀처럼 배시시 웃었다.

그러고는 입안으로 그의 이름을 굴렸다. 정말 설레어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처럼.

“글렌.”

“…….”

“글렌.”

그가 자신을 굉장히 어처구니없다는 눈빛으로 내려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런 시선 따위에 주눅들 거였다면 그날 국왕 앞에 나서지도 못했을 것이다.

곡 중간에 들어온 터라 오래지 않아 음악이 멈추었다.

곡이 바뀌면 파트너 역시 바꾸어야 한다.

그녀는 몹시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글렌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럼 잠시 후에 봐요, 글렌.”

“…….”

다른 사람과 춤출 때에는 억지로 웃지 않아도 되겠지.

나디아는 얼굴 근육을 휴식시키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녀에게 다가온 새로운 댄스 파트너는…….

“어머, 지호 경? 언제 오셨나요?”

검은 머리의 이방인, 이지호였다.

파티가 시작됐을 때부터 자리를 지켰는데 그가 와 있는 줄은 정말 몰랐다.

이방인이라는 출신 탓에 귀족사회에 섞이는 걸 꺼려 하지 않았던가?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머뭇거리는 사이 다음 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디아는 어쩔 수 없이 그의 허리 위에 팔을 올려야 했다.

“방금 전 도착했습니다. 댄스 타임이 시작되기 얼마 전이었죠.”

“아, 그럼 윈터펠 후작님과 비슷한 시기에 도착하셨나 보군요.”

그렇다면 그와 마주치지 못한 것도 납득이 간다.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스텝을 밟았다.

‘그는 아버지의 사람이니 연기하지 않아도 되겠지.’

누차 말하지만 계속해서 방긋방긋 웃고 있는 건 몹시도 힘든 일이다.

지칠 대로 지쳤는지라 표정을 관리할 힘이 없었다. 나디아는 얼굴에서 힘을 풀며 그저 기계적으로 스텝을 옮겼다.

그때, 머리 위에서 이지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디아 양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답해 드릴 수 있는 거라면 답해 드릴게요.”

“저와 결혼하는 게 그렇게 싫었습니까?”

“……예?”

무념무상인 상태였기에 그녀는 그의 목소리가 굉장히 싸늘하다는 것을 반 박자 늦게 깨닫고 말았다.

“고향으로부터 멀리 떠나는 걸 감수할 만큼? 천박하다는 불명예를 감수하면서까지 제가 싫었습니까? 차라리 적진 한복판이 낫겠다 싶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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