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142)

제8화

이 우스꽝스러운 연극 대사 중에서 유일하게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정말 감사해요. 절대 후작님께 폐가 되지 않도록 노력할게요.”

“아니, 민폐는 이미 충분히 끼쳤지. 용건이 끝났으면 이제 그만 제자리로 돌아가지 그래?”

비록 그에게 진심이 전달되진 않은 듯했지만.

목적은 달성했으니 더 뭉그적거릴 이유가 없었다. 빠르게 아버지 곁으로 돌아가는 그녀의 시야에 이지호의 모습이 들어온다.

그가 배신감에 젖은 얼굴로 나디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다.

‘왜 저런 표정이지? 아, 설마…… 아버지에게서 미리 언질 받지 못한 건가?’

나디아가 제게 월계관을 줄 거라고 믿고 있었는데, 그것이 눈앞에서 다른 사람에게로 가 버리니 황당할 만도 했다.

‘아버지도 참,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미리 언질해 줬으면 좋았을걸.’

대우가 이따위이니 그가 출세에 목숨을 걸게 된 이유도 이해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전생에 자신을 저버렸던 남자에게 굳이 이해심을 발휘해 줄 만큼 마음이 넓지는 않다.

그의 시선을 외면한 나디아가 곧장 제자리로 돌아갔다.

개선식의 흥겨운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 * *

해가 뉘엿뉘엿 지평선을 넘어가는 저녁. 개선식이 마무리되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집으로 돌아가는 시각.

발라지트 가문의 세 부녀 역시 저택으로 돌아가기 위해 채비를 하는 중이었다.

마차에 올라타기 직전, 공작이 나디아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녀의 공을 치하했다.

“나디아, 오늘 잘해 주었다. 당황한 그놈의 얼굴이 참 볼만하더구나. 크하핫!”

“별말씀을요.”

등 뒤에서 카레인이 눈을 흘기는 게 느껴졌지만 나디아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가 이복동생을 깔끔하게 무시한 채 마차에 오르려는 순간이었다.

“공작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멀리서 들린 목소리가 그녀의 발목을 붙잡는다. 나디아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지호 경?”

의장용 예복을 차려입은 채 성큼성큼 다가오는 남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이지호였다.

가까이 다가오는 그의 표정이 얼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다.

그가 후견인인 발라지트 공작 앞에서는 꽤나 예의를 차린다는 걸 감안해 볼 때, 저건 표정 관리도 안 될 만큼 기분이 바닥이란 뜻이었다.

발라지트 공작이 답했다.

“무슨 일인가? 먼 길을 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들어가서 쉬지 않고.”

“급히 여쭤 볼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오늘 개선식의 월계관…… 분명 공작 영애가 제게 주는 거라고 들었습니다만 어찌 된 일인지요?”

“아아, 그건 말이네…….”

공작의 얼굴에 살짝 귀찮다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모시는 주군이 계획을 바꿨다면 그러려니 할 것이지, 설마 찾아와서 따질 거라곤 생각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대답했다.

“일이 그렇게 됐네. 급박하게 진행된 일이라 자네에게 귀띔해 주지 못한 건 미안하군. 더 나은 혼처를 찾아 줄 테니 너무 마음에 두진 말게나.”

“다른 이를 소개받으려고 찾아온 게 아닙니다! 대체 무슨 이유로 계획이 바뀐 겁니까? 그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네. 이런 곳에서 말할 주제는 아닌 것 같으니 다음에 자리를 마련하지.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게나.”

“정말 너무하십니다! 분명 출정 전에도 제게…….”

끈질긴 이지호의 태도에 마침내 공작이 벌컥 성을 냈다.

“그럼 이제 와서 어쩌자는 말인가! 이미 개선식은 치러진 것을! 없었던 일로 해 달라고 온 수도에 공고문이라도 붙이라는 건가?!”

“……큭.”

기어오르지 말아야 할 선을 긋는 목소리.

매서운 공작의 기세에 그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에겐 아직 발라지트 공작의 후원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지호가 아무 말도 못 한 채 주먹을 말아 쥐기만 하자, 공작이 이마를 짚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어찌 됐든 자네에게 미리 말해 주지 못한 건 내 실수이니 그에 대해 보상을 해 주겠네. 원하는 여인과 짝을 지어 주지. 수도에는 아리따운 여인이 별처럼 많아.”

“…….”

“내 말, 이해할 수 있겠지?”

이번에는 화를 달래 주듯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나디아는 저것이 아버지가 사람을 다루는 방식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원하는 혼처와 이어 주겠다는 보상까지 제시되었으니 저쪽에서도 계속 이번 일을 물고 늘어질 수는 없으리라.

다만 발라지트 공작이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두 사람은 원래부터 사이가 별로 안 좋았다는 거지.’

회귀 전, 이지호와 글렌 윈터펠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라이벌 관계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두 사람이 직접적으로 부딪힌 적은 없었다.

다만 두 사람이 지닌 공통점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을 입방아에 오르게 했다.

비슷한 나이, 영웅으로 손꼽히는 실력, 그리고 준수한 외모. 남 얘기 좋아하는 귀족들이 비교하지 않고 못 배길 조합이다.

당사자에 대해 악감정이 없더라도 주변에서 라이벌 심리를 부추긴다면 없던 경쟁심도 생기기 마련이다.

게다가 윈터펠 후작은 이지호의 후견인인 발라지트 공작의 대표적인 정적이니, 두 사람의 관계가 미묘해지는 건 예견된 수순이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선 갈등이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는데…….’

그들이 본격적으로 주목받게 되는 건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의 일로 기억한다.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줄곧 무시당했던 이지호는 유서 깊은 명문가의 자손인 윈터펠 후작에게 열등감을 품었다.

자존심상 절대 그 사실을 인정하진 않았지만 말이다.

어쩌면 이번 일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가 나빠지는 것이 앞당겨질지도 모른다.

원래 제 손에 들어와야 했을 것을 싫어하는 상대에게 빼앗겼으니 두고두고 한이 되지 않겠는가?

열등감을 품은 상대의 것은 뭐든지 빼앗고 싶어지는 법이다. 비록 그것이 본래 크게 가치를 두지 않았던 것이라 할지라도.

나디아가 회귀 전의 일들을 떠올리는 동안에도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되고 있었다.

공작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어나간다.

“내 실수도 있으니 오늘 자네의 태도는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네. 거처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게나.”

“…….”

“자네가 원하는 여인은 누구든지 이어 주도록 노력해 보지. 이 수도에서 내 청을 거절할 만큼 간덩이가 큰 놈은 존재하지 않아. 알아듣겠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이해한 것 같아 다행이군.”

말은 그렇게 해도, 이지호는 분함을 삼키지 못하겠다는 듯 연신 입술을 짓씹고 있었다.

하지만 발라지트 공작은 수하의 이해를 일일이 구할 만큼 세심하지도, 너그럽지도 않았다.

더 이상 해 줄 것이 없다고 느꼈는지, 몸을 돌려세운 공작이 말했다.

“나디아, 카레인. 어서 돌아가자꾸나.”

“예.”

이쯤 되니 전 약혼자의 처우에 살짝 안쓰러운 마음이 들 지경이었다.

마차에 올라타기 직전, 나디아가 무심코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이지호는 여전히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은 채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일순간 두 사람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

“…….”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아주 잠깐 뒤를 돌아보았던 그녀가 마차 안으로 완전히 몸을 집어넣는다.

그리고 문이 탁 하는 소리를 내며 닫혔다.

덜컹, 덜컹.

발라지트 공작 일가를 태운 마차가 곧장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마차를, 그는 우뚝 멈춰 선 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아주 오랫동안이나.

* * *

“그래서 첫째 아가씨가 이렇게 말했다는 거야.”

“뭐라고 했는데? 응?”

“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봐!”

“윈터펠 후작님을 너무너무 사랑합니다! 부디 제 마음을 받아 주세요!”

“세상에…… 미쳤어, 미쳤어!”

“으아, 그자는 우리 공작님과 사이가 안 좋지 않아? 그런데 그래도 돼?”

“아직까지 저택이 뒤집어지지는 않았으니까 공작님도 허락하셨다는 뜻이겠지.”

“와,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딱 그 꼴이네. 어떻게 그걸 허락하셨대?”

“우리 공작님이 그렇게 너그러우신 분인 줄은 처음 알았네.”

공작 영애의 공개 구애에 뒤집어진 것은 귀족 사회뿐만이 아니었다.

저택에서 일하는 말단 하녀들마저도 이번 사건에 대해 떠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얼마나 수다에 정신이 팔렸냐면, 자신들이 나디아의 방 아래에서 떠들고 있다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들의 목소리는 2층에 있는 나디아의 방까지 생생하게 들렸다. 아주 생생하게.

“그래서 진짜 결혼한대? 진짜로?”

“이미 일을 저질렀는데 어떡하겠어? 윈터펠 가문에 시집가지 못하면 평생 어디에도 시집 못 갈걸.”

“어느 사내가 다른 남자에게 월계관을 바친 여자를 받아 주려 하겠니? 가문에 미혼 영애가 있으면 수치니까 어떻게든 결혼을 성사시켜야지. 국왕 폐하께서도 후작가에 압박을 넣는 모양이야.”

“아니, 왜? 왜 굳이 추운 북부로 결혼해 떠나시려 한대? 얌전히 있으면 공작님이 어련히 알아서 수도에 있는 좋은 가문의 영식을 소개해 주셨을 텐데!”

“내 말이 그 말이야. 뭣 하러 고생을 자처하는지…….”

나디아는 창가에 기댄 채 하녀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무례한 대화였음에도 그녀의 얼굴색에는 한 줌 변화조차 없었다.

되레 곁에 있던 하녀장이 펄쩍 뛰기만 했다.

“저, 저…… 입조심을 하라 그리 말했건만! 제가 당장 내려가서 혼쭐을…….”

나디아가 그런 하녀장에게 그만두라는 듯 손짓을 했다.

“아니, 그냥 놔둬.”

“하지만 저대로 놔뒀다간 소문이 어디까지 퍼질지 모릅니다.”

“이미 온 수도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을 텐데 고작 사용인들 몇몇을 단속한다고 해결이 되겠어? 게다가 판이 커지는 건 오히려 바라는 바인걸.”

“……?”

저잣거리의 뜨거운 감자가 되는 게 바라는 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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