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142)

제7화

‘왜 개선식을 흔쾌히 허락해 줬나 했더니…….’

같잖은 로맨스 서사 따위로 개선식의 주인공을 만들어 내려는 속셈인 듯했다.

치졸한 방법이지만 그는 개선식이 열린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머나먼 곳에서 피를 흩뿌린 북부군에게 영광을 가져다줄 수만 있다면 이따위 하책을 쓰는 것쯤이야 충분히 눈감아 줄 수 있었다.

“나디아, 어서 네 영웅에게 관을 바치거라.”

“예.”

나디아라고 불린 공작 영애는 전통에 따라 하얀색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오랜 신화에 등장하는 여신들처럼 치맛자락이 일자로 떨어지는 옷이었다.

가느다란 몸매로 청아한 분위기를 자아냈으나 그의 눈길을 오래 끌지는 못했다.

사실 글렌은 그녀에게 별달리 관심이 없었다.

그녀가 준비한 월계관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발라지트 공작의 딸이 이지호가 아니면 누구에게 월계관을 내민단 말인가?

검은머리 이방인 기사가 발라지트 공작으로부터 후원을 받는다는 것은 매우 유명한 이야기였다.

“……?”

그랬기에 그녀가 제 앞에 와서 멈춰 섰을 때, 글렌은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기다려 봐도 제 앞에서 움직일 생각을 안 한다.

당혹스러운 건 그뿐만이 아니었는지, 제단 위에 올라온 귀족들 사이에서도 의아해하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 월계관, 지호 경의 것이 아니었나요?”

“공작님의 따님이 왜 윈터펠 후작에게…….”

“잠시 기다려 봐요. 곧 움직이겠죠.”

아무래도 어린 여자가 너무 긴장한 탓에 실수를 한 모양이다. 글렌이 당황한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긴장한 나머지 사람을 착각한 것 같군. 내가 아니라 옆쪽이다.”

“착각한 게 아니에요.”

“뭐?”

이런 자리에서 실수를 하면 발라지트 공작의 성정을 생각해 볼 때 무사할 수가 없을 터인데.

비록 정적의 딸이라지만 안타까운 마음이 치미는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글렌이 다시 한번 조용히 그녀의 실수를 일깨워 주려 할 때였다.

“아니, 지금 사람을 잘못 본 게…….”

“저는 오래전부터 줄곧 윈터펠 후작님을 마음에 품고 있었답니다! 서쪽 국경에서 들려온 영웅담에 저의 마음은 더욱 커져만 갔어요. 부디 저의 월계관을 받아 주세요.”

“……!”

나디아가 그리 말하며 글렌에게 월계관을 내밀었다.

그 순간, 제단 위를 바라보고 있던 대중의 환호성이 더욱 요란해진다.

와아아아아-!

펑! 퍼펑!

누군가 축포를 터트리는 듯 저 멀리서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이런 상황을 전혀 언질받지 못했던 글렌으로서는 경악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기가 차서 입이 딱 벌어진 그에게 나디아가 노래하듯 말했다.

“후작님을 처음 뵈었을 때, 그만 첫눈에 반하고 말았답니다. 처음 본 순간 깨달았어요. 이분이 제 인생을 맡길 사람이라는 사실을요.”

미친 소리를 정성껏 하고 있다.

어조만 예쁘게 말한다고 해서 그게 정신 나간 소리라는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글렌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들을 둘러싼 환호성이 더욱 요란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더 늦었다간 수습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발라지트 양, 성년식이 지난 여인이 이 자리에서 월계관을 바친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모를 만큼 멍청하지 않겠지.”

“예, 알아요. 저는 후작님께 사랑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랍니다!”

마지막 말은 우렁차게 외쳤기에 제단 위에 모인 귀족들의 귀에도 닿을 수 있었다.

쐐기를 박는 그녀의 행동에 웅성거림이 더욱 심해진다.

뭣도 모른 채 환호하는 대중과 달리, 정계의 대립 관계를 아는 그들로서는 적잖이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 계획을 미리 알지 못했던 일부 귀족들이 경악에 물든 채 입방아를 찧기 시작했다.

“이, 이거 공작님과 상의가 되긴 한 건가?!”

“당연히 그렇겠지요! 미혼 영애가 아버지와 합의도 없이 저런 짓을 할 수가…….”

“기혼이라면 더 문제지!”

충동적으로 이런 짓을 저지른 거라면 향후 몇 년간은 회자될 스캔들이다. 발라지트 공작과 왕은 과연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사람들은 왕이 있는 상석을 힐끔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왕이 태연한 얼굴로 입을 연다.

“윈터펠 후작, 아리따운 여인이 저리 매달리는데 받아 주지 않고 뭘 하는 건가?”

“……!”

글렌의 표정이 왈칵 일그러졌다.

이것이 발라지트 공작, 더 나아가 국왕까지 개입한 연극이란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자기 자식의 명예를 저버리면서까지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그의 뜻대로 휘둘릴 수는 없었다. 글렌이 왕을 바라보며 말했다.

“폐하, 발라지트 공의 여식이 제게 월계관을 바친다니 너무 과분합니다. 저는 이 관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 말하는 표정은 북부의 만년설처럼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당장이라도 나디아를 처리해 버리고 싶다는 눈빛이다.

나디아가 살짝 몸을 떨며 생각했다.

‘죄, 죄송해요……. 하지만 저와 결혼하는 게 그쪽에게도 이득일 거예요.’

최소한 그녀는 아버지의 뜻대로 첩자 역할을 하진 않을 테니 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말도 안 되는 연극이었지만 그건 그녀가 알 바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어떻게 해서든 미래를 바꿔야 한다는 것뿐.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살기에 소름이 오소소 돋을 지경이다. 익히 예상했던 반응이었지만 나디아는 상처받은 것처럼 울상을 지었다.

지금은 없는 연기력까지 모두 쥐어짜내야 할 때였다. 그녀가 울먹이는 얼굴로 글렌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제가…… 적녀가 아니라 서출이라서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건가요?”

“뭐?”

“그, 그렇다면 저를 책임지지 않으셔도 좋아요! 부디 이 관만 받아 주세요. 제 마음이 전달되었다면 그것으로 족하답니다.”

이런 미친.

그렇게 중얼거리는 입 모양이 보인다.

그리고 그녀가 단단히 미쳤다고 생각하는 건 글렌뿐만이 아니었다.

“바, 방금 대체 뭐라고…….”

“책임지지 않아도 좋다니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요?”

“맙소사.”

제단 위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자신을 책임지지 않아도 좋으니 사랑하는 마음만 알아 달라?

천박한 여자라고 당당히 선언하는 짓이나 다름없었다.

월계관을 바친 이가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끝내 거절하는 건 도리가 아니다.

발라지트 공작에게서 미리 언질을 받은 몇몇 사람들이 분위기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윈터펠 후작님, 젊은 여인을 개선식에서 망신시킬 셈이십니까? 어찌 그리 매정하신지요!”

“발라지트 영애는 순수하게 후작님을 흠모했을 뿐입니다!”

“설마 방금 공작님과 잠시 언쟁을 벌인 것에 악감정을 품으신 겁니까? 사내가 어찌 그리 치졸하십니까!”

“…….”

제단 위가 그를 압박하는 목소리로 가득 찰수록, 글렌의 표정은 더욱 굳어 갔다.

호박색 눈동자에서 살기가 스멀스멀 흘러나오고 있었다.

심지어 환호하던 대중들도 글렌이 계속 월계관을 받지 않자 의아한 듯 웅성거리는 중이었다.

끝내 그녀의 월계관을 거절한다면 개선식의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싸늘하게 식어갈 것이다.

이 개선식은 글렌의 요청으로 열리는 것이었다.

머나먼 땅에서 죽어 간 병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그리고 겨우 살아 돌아온 이들에게 영광을 안겨 주기 위해.

‘내 손으로 개선식을 망칠 수 없다는 걸 예측하고 이런 일을 꾸몄군.’

글렌이 눈을 살짝 감았다가 떴다. 나디아는 그가 짧은 시간 동안 살인 충동을 참았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저, 정말 죄송합니다…….’

저 남자에게는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 꼴이리라.

난데없이 뒤통수를 맞게 된 그에겐 미안하지만 언젠가는 자신과 결혼하길 잘했다고 생각할 날이 올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조금만 더 얄미운 짓을 할게요.’

마음속으로 용서를 빈 나디아는 더욱 연기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눈물 연기를 하기 위해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리기까지 해야 했다.

그리운 어머니의 모습을 회상하니 절로 눈가가 촉촉이 젖어 든다.

“흐윽, 흣.”

“?!”

지척에서 들린 울음소리에 글렌의 고개가 바람 날리는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월계관을 든 여인이 서글픈 듯 눈물을 글썽이고 있다.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 여자가 여기서 난장판이라도 벌이는 순간 개선식은 망한다.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챈 군중들이 의아한 듯 웅성이고 있었다.

지금은 제단 주변에 모인 이들만 이상한 기색을 눈치챈 상태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동요가 퍼져 나갈 것이다.

빠득. 글렌의 입술 사이에서 이 가는 소리가 살벌하게 흘러나왔다.

듣고 있던 나디아가 이 상태를 걱정할 만큼 살벌한 소리였다.

마침내 그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긴 이야기는 추후에 하도록 하지, 발라지트 양.”

북부의 눈바람을 사람의 목소리로 만든다면 저런 느낌이리라.

살기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자신은 이미 수십 번은 더 죽였다.

이크, 그녀는 얼른 눈을 내리깔며 마저 연기를 이어나갔다. 이 우스꽝스러운 연극을 마무리할 때다.

“받아만 주신다면 평생 영광으로 생각하겠…….”

탁!

하지만 말을 끝나기도 전에 그가 가로채듯 월계관을 가져가 버린다.

나뭇가지에 긁힌 손에서 살짝 피가 비쳤으나 멀리 있는 군중들에겐 보이지 않는 장면이었다.

와아아아아아아-!

전설 속 영웅담의 마지막 장은 아름다운 여인과의 로맨스로 끝나기 마련이다.

마치 한 편의 서사시 같은 장면에 군중들은 환호하고 또 환호했다.

요란한 환호 소리에 묻히지 않도록, 나디아가 그에게 몸을 밀착시킨 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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