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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4/142)

제4화

나디아가 환희에 젖는 동안에도 대화는 더욱 진전되고 있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가?”

“저희 측 사람을 윈터펠 후작 부인으로 만드는 데에는 두 가지 이점이 있습니다. 우선 첫째, 만일 북부가 독립을 모의하는 기색을 보인다면 거의 즉각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 윈터펠 후작이 다른 북부 가문의 여식과 혼인하여 동맹을 공고히 하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생각이 있을 테니 후작 부인을 배척하려 할 텐데?”

“예, 물론 그렇겠지요. 하지만 한 가문의 안주인은 집안에 관련한 문서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안주인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반란 모의를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잘 풀리기만 한다면 그쪽의 정보를 빼돌리는 첩자 역할을 할 수도 있겠지요.”

“호오…….”

그럴듯한 주장에 그럴듯한 근거까지 더해졌으니 귀 기울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나디아가 탁자 위로 찻잔을 내려놓으며 국왕의 표정을 살폈다.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는 걸 보니 이미 반쯤 설득된 모양이다.

‘윈터펠 후작이 결혼을 했던 게 정확히 언제였지?’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다음 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 말인즉 서두르지 않으면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섣불리 대화에 끼어들었다간 아버지의 분노만 사게 될 터.

나디아가 주변의 분위기를 탐색하고 있던 그때, 잠시 생각에 잠겼던 왕이 입을 열었다.

“물론 좋은 생각이네. 하지만 과연 적진으로 귀한 딸을 보낼 자가 있을지 걱정이야. 그런 혼처에 자기 딸을 보내고 싶어 할 아비가 어디 있겠나?”

“왕실에 대한 신하들의 충심을 너무 과소평가하시는군요. 자식이야 또 낳으면 됩니다. 하지만 평생 충성을 다할 주군을 또 만나기란 요원한 일이지요. 서로 딸을 내놓지 못해 안달을 낼 테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으하하하핫! 자네 말솜씨가 갈수록 좋아지는군. 아주 혓바닥에 기름칠을 했어.”

망설이기만 하던 나디아에게 ‘기회’가 포착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충신이라면 당연히 딸을 내놓을 거라는 아버지의 말.

우물쭈물 눈치만 살피다간 이 기회를 놓쳐 버릴지도 모른다. 지금은 망설일 때가 아니었다.

결심을 굳힌 그녀가 몸을 일으키며 외쳤다.

“폐하! 발라지트 공의 여식이 감히 청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나디아!”

아버지의 입에서 저것을 내쫓으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나디아는 얼른 뒷말을 이었다.

“적진인 북부로 가야 할 여인이 필요하다면 제가 그 역할을 맡고 싶습니다! 부디 제가 폐하를 위해 공을 세우게 해 주세요!”

“……!”

국왕의 얼굴에 경악이 퍼져 나갔다.

쨍그랑! 등 뒤에서 찻잔이 깨지는 소리가 터져 나온다.

발라지트 공작의 표정은 말할 것도 없었으며, 카레인은 경악한 목소리로 속삭이기까지 했다.

“너 미, 미쳤어?!”

나디아는 아버지와 동생의 반응을 깨끗이 무시한 뒤 국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

“방금 폐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아버지의 여식이라면 누구보다 믿을 만한 여인이라고요.”

“내가 그런 말을 한 건 맞지만…… 그래도 북부는 네가 직접 가기엔 좀 험한 곳 아니냐?”

“폐하께선 줄곧 아버지를 신하로서 아껴 주셨지요. 그 덕분에 저는 귀족 영애로서 평안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분에 넘치는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건 모두 폐하의 은총 덕분입니다. 이번 기회에 부디 은혜를 갚을 수 있게 해 주세요.”

나디아는 그리 말한 뒤 넙죽 바닥에 엎드렸다.

‘아버지는 나를 말릴 수 없어.’

조금 전, 발라지트 공작은 자기 입으로 이런 말을 했다.

충성스러운 신하라면 자기 딸을 내놓지 못해 안달을 낼 거라고.

여기서 나디아를 만류한다면 자기 친딸을 북부로 보내기 싫어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실제로 발라지트 공작은 예상치 못한 딸의 돌발 행동에 극심하게 분노했으면서도 그녀를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하고 있었다.

“네 마음은 정말 기특하구나.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네 아버지와 윈터펠 가문은 누구나 아는 원수 가문 아니냐? 그가 너와의 혼인을 쉽게 받아들일 리 없다.”

“제가 이번 개선식 때 윈터펠 후작에게 월계관을 바치겠습니다.”

“뭐라?”

국왕의 얼굴이 서린 기막힘이 더욱 짙어졌다.

등 뒤의 아버지에게선 깊은 신음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성년식이 지난 여인이 개선식을 치르는 사내에게 월계관을 바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기나 한 게냐?”

“사랑 고백이나 다름없는 행위라는 것, 알고 있어요.”

“그렇다면 거절당했을 때 네 명예가 어찌 될지 또한 알고 있겠구나. 미혼 영애가 남자에게 공개적으로 구애하다 거절당하다니. 그리 되면 넌 제대로 된 가문과 결혼하긴 힘들다.”

“개선식의 월계관이 거절당한 사례는 없습니다.”

“그건 개선식을 열기 전에 미리 합의를 하기 때문이지! 대중이 좋아할 만한 연극이란 말이다!”

그 말 그대로였다.

이지호에게 월계관을 바치는 나디아의 행위가 미리 계획되어 있었던 것처럼, 다른 개선식 때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이 환호할 만한 서사를 만들어 내기 위한 연극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나디아의 표정은 변함없이 침착했다.

“하지만 그는 저의 월계관을 거절하지 못할 겁니다. 그건 개선식의 열기에 찬물을 끼얹는 짓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지요. 이 개선식은 윈터펠 후작의 요청으로 열리는 것 아닌가요? 본인이 요청하여 열린 개선식을 자기 손으로 망칠 수 있을 리가요.”

“……!”

“그는 분명 일단 개선식을 일단락 지은 다음, 사태를 수습하려는 생각으로 제 월계관을 받아 줄 겁니다. 그 후에 폐하께서 공신의 딸이 간곡히 애원한다는 명분으로 저와 후작가의 혼사를 추진하세요. 폐하께서는 신하가 여태 바친 충성을 외면하지 못해, 공작 영애의 사랑을 이뤄 주려는 자애로운 군주가 되시는 겁니다.”

“그…….”

거참 비열한 계책이구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들었을 때 처음 든 생각이었다.

하지만 양심의 가책이 조금 느껴진다는 것만 제외하면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나디아는 발라지트 공작의 딸이 아닌가?

충신의 딸을 위험한 곳으로 내몰았다간 발라지트 공작이 실망하게 될지도 모른다.

왕이 망설이고 있다는 걸 눈치챈 나디아가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폐하, 제가 왕실과 아버지의 은혜를 갚을 수 있게 해 주세요. 제 아버지 역시 충심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결코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허…….”

이렇게까지 간곡하게 말해 주니 국왕 입장에서도 명분이 생긴다. 그가 발라지트 공작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제 딸아이가 이리 기특한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노련한 그라지만 이번만큼은 표정을 관리하는 게 쉽지 않았다.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지만 눈가엔 조금도 웃음기가 없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왕은 그 사실을 알아챌 만큼 똑똑하지도, 눈치가 빠르지도 않았다.

왕이 감탄했다는 듯 박수를 치며 말한다.

“발라지트 공작가는 이 나라의 참된 충신이오! 젊은 여인임에도 기개만큼은 여느 기사 못지않군!”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누군가를 북부로 보내야 하는 것에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네가 이리 나서 주니 내 마음이 한결 놓이는구나. 네 충정을 결코 잊지 않으마.”

마음이 놓인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그의 입가엔 싱글벙글 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어쩜 저리도 입 발린 말에 쉽게 넘어가는지 의아할 지경이다.

‘나야 편해서 좋긴 하지만…….’

몇 번이고 나디아의 충심을 치하한 왕이 다른 화제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녀와는 연관이 없는 대화였기에 나디아는 조심스레 뒤로 물러났다.

본래 역할인 다과를 대접하기 위해서였다.

힐끔 곁눈질로 아버지의 모습을 살펴보니 예상했던 대로 완연한 노기가 느껴진다.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소파 팔걸이를 쥔 손에 힘줄이 선명하게 서 있었다.

‘국왕의 동의를 이끌어 내긴 했지만, 아버지의 최종적인 허락 없이는 이번 일을 성사시키기 힘들어.’

어떻게든 아버지를 설득시켜야 한다는 난관은 사라지지 않는다.

무슨 수로 그를 납득시킬 것인가?

조용히 눈을 내리깐 그녀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 * *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너.”

용건을 끝마친 왕이 저택을 떠나자마자 뾰족한 목소리가 나디아의 머리채를 잡아챘다.

이복동생인 카레인의 목소리였다. 나디아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버지 옆에 선 카레인이 복잡한 감정에 찬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멍청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제 발로 자청해서 북부로 가겠다고? 네가 거기서 어떤 대우를 받을지…….”

“카레인, 그만하거라.”

발라지트 공작이 중후한 목소리로 딸을 꾸짖었다.

“네가 끼어들 이야기는 아닌 듯하구나.”

“읏.”

단호한 아버지의 태도 앞에선 안하무인인 그녀마저도 한 수 접을 수밖에 없었다.

조용해진 딸아이를 뒤로 한 채 그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선다.

왕이 사라진 이후, 발라지트 공작의 얼굴에선 미소라는 가면이 완전히 벗겨진 상태였다.

쿵! 그가 무시무시하게 굳은 얼굴로 지팡이를 바닥에 굴렀다.

“설명을 해 보아라, 나디아.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은 저지른 것이냐? 지호 경에게 월계관을 바치는 게 네 역할이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반드시 내가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을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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