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그나저나 무슨 일이니? 날 찾아온 거 아냐?”
“잠시 후에 국왕 폐하께서 공작님을 찾아오실 거예요. 폐하를 뵐 준비를 하셔야지요.”
“마침 잘 됐네. 얼른 준비할게.”
“네, 본채로 가셔요.”
마침 잘됐다는 말은 심심하던 차에 일정이 생겨서 기쁘다는 뜻이 절대 아니었다.
스무 살로 돌아왔다는 건 자각했지만 나디아는 이 시기쯤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아무리 가장 신뢰하는 신하라 한들 군주가 신하의 자택에 방문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국왕의 방문 사유를 통해 이 시기에 일어났던 일들을 떠올릴 수 있으리라.
나디아는 하녀를 따라 본채로 걸어가며 생각에 잠겼다.
‘이맘때쯤 왕이 아버지를 찾아온 이유라면…… 아, 칼라아이 원정대의 개선식 문제 때문인가 보군.’
칼라아이 원정대는 이민족을 몰아내고 서쪽 국경을 안정화시키는 공을 세웠다.
문제는 그 원정대를 이끈 자들 중 북부 지역의 맹주, 윈터펠 후작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남부 지역에 기반을 둔 아버지는 북부 영주들과 노골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버지가 북부 영주들을 싫어하는 것만큼 그들도 발라지트 공작가를 싫어했는데, 그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국왕을 조종하며 국사를 좌지우지하는 권신을 어떤 지방 영주가 좋아할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멍청한 왕은 아버지의 거짓말에 넘어가 진심으로 북부를 경계하고 있었다.
동시에 봉신의 의무는 충실하라고 요구하니, 진작 사생결단이 나지 않은 게 용한 수준이다.
‘미운 놈에게 개선식이라는 명예를 안겨 주긴 싫다는 거겠지.’
승전을 거두고도 왕과 기 싸움을 해야 하는 윈터펠 후작의 처지가 안쓰럽긴 했지만 지금 그들을 걱정해 줄 때가 아니었다.
전생에 그녀를 배신한 약혼자, 이지호와의 혼인 동맹이 결정된 것이 바로 이맘때쯤이었던 것이다.
기억이 정확하다면 당장 오늘 안으로 약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된다.
‘시간이 너무 빠듯해. 조금 더 옛날로 돌아갈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얼굴이 초조하게 일그러졌다.
* * *
나디아가 치장을 마치고 본채로 향했을 땐, 왕실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가 이미 정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아마 국왕이 타고 온 마차이리라.
발걸음을 더욱 빨리하는 그녀의 맞은편에 아버지가 나타났다.
“왜 이리 늦은 것이냐?”
“죄송합니다. 급하게 준비한다고 준비했는데…….”
“폐하께선 아직 정원을 둘러보고 계시니 됐다. 그보다 네게 전할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다.”
아무래도 오늘 안으로 약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는 기억이 틀리진 않은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발라지트 공작이 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너와 카레인이 차 시중을 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이미 전해 들어서 알고 있겠지?”
“네, 하녀장이 그러던걸요.”
“그동안 개선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거다. 네가 지호 경에게 월계관을 바치는 게 어떠하겠냐는 말이 나올 텐데, 그때 너는 좋은 의견이라고 동의하기만 하면 된다. 알겠느냐?”
“……예.”
결혼 적령기의 여인이 개선식을 치르는 영웅에게 월계관을 바친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연정의 고백이지.’
서쪽 이민족들을 토벌한 원정대를 상대로 개선식을 생략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개선식에서 가장 주목받는 전쟁 영웅은 윈터펠 후작이 되어선 안 된다.
혼기에 찬 아름다운 공작 영애가 전도유망한 기사에게 공개적으로 고백을 한다. 그리고 젊은 기사는 그녀의 구애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혼인을 약속한다.
대중이 환호할 만한 한 편의 로맨스였다.
잠시 윈터펠 후작의 영웅담에 심취했던 사람들의 관심은 모조리 그리로 쏠리게 될 것이다.
‘혼인 동맹도 공고히 할 겸 말이야.’
이지호를 완전히 제 사람으로 만들어 두고 싶으나 적녀인 카레인을 주기엔 격이 맞지 않는다.
공작은 그리 판단하고 서녀인 자신을 결혼시키려는 계획을 세웠으리라.
그의 입에서 월계관 이야기가 나왔다는 건 공작의 마음이 완전히 정해졌다는 뜻이었다.
자신이 결혼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밝힌들 그가 들어줄 리가 만무했다.
‘조금 더 어릴 때로 회귀했어야 했어. 약혼까지는 남은 시간이 너무 없는데…… 어쩔 수 없이 약혼은 받아들이고, 나중에 파혼하는 방법을 찾아봐야 하나?’
여차저차 파혼은 한다고 치자. 그 이후에는 어쩔 것인가?
그녀의 운명이 아버지의 손아귀 안에 달려 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외가도, 재산도, 하다못해 혈통도 없는 여자가 홀로 자립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디아가 초조하게 입술만 짓씹는 동안, 두 사람은 어느새 정원에까지 당도해 있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정원을 둘러보고 있는 국왕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 옆에는 말동무 역할을 해 주는 듯한 카레인이 서 있었다.
긴 금발, 그리고 마지막 기억보다 조금 앳된 얼굴.
이복동생의 모습을 발견한 나디아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진다. 하지만 그녀는 곧 평온을 가장해냈다.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먼저 인사를 한 것은 발라지트 공작이었다. 나디아 역시 아버지의 뒤를 따라 국왕에게 약식으로 예를 차렸다.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오, 네가 발라지트 공의 첫째 여식이구나. 참 곱기도 하지.”
왕은 40대 후반의 중년 사내로, 한 나라를 이끄는 수장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평범한 모습이었다.
‘아버지의 멍청한 꼭두각시…….’
저런 자가 아버지 같은 이에게 휘둘리고 있으니 북부 영주들이 불만을 품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발라지트 공작이 말했다.
“폐하, 제 딸들이 폐하께서 방문하신다는 걸 알고 다과를 대접하길 청했습니다. 청컨대 부디 제 여식들이 자리에 동석하는 걸 허락해 주십시오.”
“공의 여식들인데 동석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소? 누구보다 믿을 만한 여인들 아니겠는가? 하하하. 날도 쌀쌀한데 이만 들어가게나.”
“황송합니다.”
왕이 어서 들어가자는 듯 크게 손짓을 한다.
사용인들이 준비해 둔 카펫을 밟으며 그가 발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공작의 서재에 딸린 응접실. 주로 은밀한 밀담을 나눌 때 사용되는 장소였다.
왕과 아버지, 그리고 카레인과 나디아는 함께 응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왕이 응접실 소파에 자리를 잡자 카레인이 먼저 티푸드를 꺼내기 시작한다. 그 때문에 차를 우리는 건 자연스레 나디아의 몫이 되었다.
그녀는 찻잎을 꺼내는 척하며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쫑긋 기울였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칼라아이 원정대가 개선식을 열어 줄 것을 요구했소.”
“개선식이 충분히 열릴 만한 공이지요.”
“그건 나도 안다네! 하지만 원정대 지휘관 중에서 가장 공이 큰 건 윈터펠 후작이지 않은가! 개선식이 열렸다간 그놈이 가장 큰 주목을 받게 될 거야. 작위를 물려받은 지 얼마 안 된 놈이니 이걸 계기로 입지를 다지려 하겠지.”
“그렇다고 그들의 요청을 무시할 수만은 없습니다. 원정대에는 윈터펠 후작뿐만이 아니라 다른 영주들도 군사를 지원했지요. 만일 개선식을 열지 않는다면 왕실이 참전 군인들을 홀대한다며 전국 각지에서 비난 여론이 일 것입니다.”
“끄응…… 하지만 북부 놈들 좋을 일을 해 줄 수는 없지 않겠소? 무슨 묘책이라도 있소?”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개선식의 주인공을 다른 이로 만들면서 북부인들의 목에 족쇄를 채울 계책이.”
“역시 발라지트 공일세. 뭔가, 그 방법이?”
개선식의 주인공을 다른 이로 만드는 계책이란 나디아와 이지호의 약혼을 뜻하는 것이리라.
그럼 북부인들의 목에 족쇄를 채울 계획이란 뭔가? 나디아는 두 사람의 대화에 더욱 집중했다.
“바로 결혼입니다.”
“결혼?”
“예, 두 쌍의 결혼 말입니다. 우선 윈터펠 후작의 혼사 이야기부터 하겠습니다. 폐하의 권위를 이용해 그를 혼인시키십시오. 물론 상대는 충성스러운 귀족의 여식이어야 합니다.”
저 말을 들으니 떠오르는 바가 하나 있었다.
바로 윈터펠 후작의 아내는 아버지의 입김이 닿은 가문의 여식이었다는 걸.
‘북부 영주들이 결혼으로 뭉치는 걸 방지하면서, 적진에 첩자를 들여놓으려는 속셈이었지.’
실제로 아버지의 속셈은 어느 정도 먹히긴 했다.
윈터펠 후작 부인이 영지 내부의 사정을 바깥으로 흘린다는 것을 들키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때문에 북부 영주들과 아버지의 사이는 더욱 험악해지고, 윈터펠 후작 부인은 친정으로 내쫓기게 된다.
윈터펠 후작이 결혼을 했던 게 아마…… 이지호와 약혼했던 그다음 해였던가?
보아하니 이때부터 아버지가 계획한 시나리오인 모양이다.
어린 나이에 환영받지 못할 결혼을 할 여자만 불쌍하게 됐…….
‘잠깐.’
그때, 번뜩이는 무언가가 나디아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 역할을 내가 대신할 수도 있는 거 아냐?’
북부를 지키는 후작과 공작의 딸. 신분상으로 볼 때 꽤나 어울리는 조합인 데다 나이대도 비슷하다.
게다가 지금 이 시점에서 아버지에게 나디아는 고분고분한 딸에 불과했다.
늘 얌전했던 딸이 자신을 배신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할 테니 그는 나디아를 북부로 보내는 걸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이지호와의 약혼을 피하면서 전생의 복수를 하기에 윈터펠 후작가 만큼 적합한 상대가 또 없었다. 막막했던 상황에서 구원의 동아줄이 하나 내려온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