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42)

제2화

그 순간, 카레인의 얼굴에 조소가 번졌다.

“순진하구나. 정말 네 약혼자가 모를 것 같아? 이런 일을 나랑 아버지 둘이서만 작당했을 거 같냐고!”

“……뭐?”

나디아의 표정에서 처음으로 균열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아버지와 이복동생에겐 애초에 기대하는 바가 없었으니 실망할 것도 존재하지 않았으나 약혼자는 달랐다.

그 사람 역시 이딴 저급한 계책에 동의했다니. 믿어지지가 않는다.

그녀의 표정이 흔들리자 카레인은 더욱 즐거워했다.

“뭐가 그렇게 충격이야? 예상했어야 한 거 아냐?”

“그럴…… 리가…….”

“네가 그 사람과 약혼할 때와는 상황이 달라졌잖아. 그는 이제 이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 중 하나가 될 테니까. 그런 남자의 안사람이 서출이라는 건…… 그쪽 입장에서도 좀 그렇지.”

이지호는 더 이상 예전처럼 이계에서 소환됐을 뿐인 이방인이 아니었다.

악마족과의 전쟁을 거치며 그의 가치는 천정부지로 올라갔다.

한때 이복언니의 혼처를 비웃었던 카레인이 그 자리를 탐낼 만큼.

‘그래서…… 그날 이후로 날 찾아오지 않은 건가?’

나디아의 머리는 무작정 현실을 부정하는 대신 ‘그럴 수도 있다’라는 가능성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는 종종 제가 처음 이곳에 소환됐을 때 겪었던 고초를 말해 주며, 반드시 출세하여 자신을 무시하는 이가 없도록 만들겠다며 다짐하곤 했다.

악마족과의 전투에서 미친 듯이 공을 세웠던 것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그 남자가 세간에서 말하는 ‘용사’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나디아가 모를 리가 없었다.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는 데에는 처가의 힘도 중요한 법.

그가 더 나은 아내를 얻을 기회를 마다할 가능성은 적었다.

아니, 어쩌면 그는 처음부터 서출 영애와 약혼한 것을 ‘이방인으로서 겪는 차별’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이쪽 세상에서 출세하는 걸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남자였잖아.’

차라리 파혼하자는 말을 했으면 순순히 물러나 줬을 것을…….

아니, 출세한 뒤에 약혼녀를 저버리는 비겁자가 되긴 싫었던 것일까?

동상처럼 굳어 있는 그녀를 향해 카레인이 계속해서 말했다.

“하등품을 상등품으로 바꿔 주겠다는데 마다할 사내가 어디 있겠어? 안사람의 신분은 남자의 체면을 대변하기도 하는걸. 이게 너와 나의 몸값 차이야. 알겠니?”

“…….”

우스꽝스러웠다. 모든 게 우습기 짝이 없었다.

지극히 이기적인 약혼자도, 딸을 체스말로 쓰고 버리는 아버지도, 신나서 이 누추한 곳까지 달려온 이복동생도.

나디아는 헛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그래서…… 그따위 얘기나 하려고 고귀한 적통 아가씨께서 여기까지 내려온 거야?”

“그럴 리가.”

카레인의 눈매가 생긋 휘어진다.

첩의 자식 따위가 공작가 핏줄로 대우받는 게 얼마나 거슬렸던지.

발라지트 공작가의 여식으로 대접받는 건 오로지 그녀 자신만이 유일해야 했다.

평생 거슬려 했던 이복자매가 비참해진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온다.

이제 이 기막힌 책략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할 때가 왔다.

카레인은 노래 부르듯이 말을 이었다.

“난 널 도와주려고 온 거야. 외간 남자와 뒹굴다가 파혼당한 여자를 어느 귀족 가문에서 받아 주겠니? 게다가 서출이기까지 하니…… 평민 잡부가 아닌 이상 결혼하는 건 무리일걸? 그럴 바에는 차라리 명예롭게 죽는 게 낫지 않아? 이번 한 번만 내가 도와줄게.”

짝짝짝. 그녀가 박수를 세 번 치자, 지하실 문이 열리며 남자 하인들이 들어왔다.

그들의 손에 들린 것은 굵은 밧줄이었다. 사람 하나가 매달린다 해도 끊어지지 않을 만큼 굵은 밧줄.

그 물건을 보고도 앞으로의 상황을 예측하지 못할 만큼 눈치가 없진 않았다.

나디아의 등허리에 소름이 쭈뼛 돋았다.

“너……!”

“아버지는 못난 딸이라도 품으려 했지만, 네가 창피를 못 이긴 나머지 자결한 거야. 지호 경은 본의 아니게 약혼자를 잃은 거고. 이렇게 되면 우리 가문의 명예도, 그 사람의 명예도 지켜지지 않겠니? 더러워지는 건 네 이름뿐이지. 그래도 사람들한테 수치심은 아는 여자로 기억되긴 하겠네.”

카레인의 느긋한 손짓에 하인들의 움직임이 이어졌다.

건장한 사내들이 나디아를 짓누른 채 팔다리를 묶는다.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남자 여럿의 힘을 이겨낼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이거 놔!”

“저항해 봤자 소용없을 텐데.”

곧이어 목에도 밧줄의 매듭이 걸렸다.

그녀를 천장에 매다는 남자들의 손길에선 망설임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커흑!”

목이 콱 옥죄어진다. 숨을 쉴 수가 없다.

묶인 발을 허우적거렸으나 닿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이렇게…… 끝난다고?’

평생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하게 기며 살았던 인생이었다.

어렸을 적에는 계모의 눈치를 보느라 숨 한 번 편히 쉬어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좋은 것은 죄다 이복자매에게 빼앗겼다.

일생 동안 들러리처럼 이용당하다가 마지막 순간까지 누명을 쓰고 죽는다니. 너무나 잔혹한 운명이다.

흐려지는 시야 너머로 즐거운 듯 웃고 있는 이복동생의 모습이 비쳤다.

카레인이 생긋 눈을 접어 웃으며 손을 흔든다.

“잘 가, 나디아. 네 마지막은 내가 끝까지 지켜봐 줄게. 그래도 우린 자매잖니?”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디아 발라지트의 목숨이 끊어졌다.

그녀의 나이 스물세 살 때의 일이었다.

* * *

과거로 되돌아왔다는 걸 깨닫는 순간, 가장 먼저 나디아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이번 생에는 배신당하기 전에 먼저 배신하겠다고.

* * *

죽음으로부터 3년 전. 그녀의 나이가 스무 살이었던 때.

나디아는 굵은 밧줄이 옥죄었던 목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돌아왔어…….”

정말 과거로 회귀한 것일까, 혹은 그저 기나긴 꿈을 꾼 것에 불과할까?

‘그렇게 생생했던 것이 꿈일 리가 없지.’

숨이 끊어져 가던 그 순간의 감각이 지금도 그대로 살아나는 듯했다.

눈물로 흐려져 가던 시야 속에서 즐겁다는 듯 미소 짓던 이복동생.

나디아는 의식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원수의 웃음소리를 들어야 했다.

조롱당하며 죽어 가는 비참함.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감. 앙다문 턱에 힘이 들어갔다.

‘이번에는 결코…….’

“비키세요, 아가씨! 청소하는데 거기 서서 뭐 하시는 거예요!”

퍽!

누군가 상념에 잠긴 나디아의 몸을 거세게 밀쳤다. 그녀의 여린 몸이 갈대처럼 휘청거린다.

“청소 끝날 때까지 나가 계세요. 방해만 되는걸요.”

나디아를 밀친 이는 발라지트 가문의 청소 담당 하녀, 앰버였다.

그녀가 나디아 뒤의 선반을 먼지떨이로 대충 털며 불평을 쏟아 냈다.

“청소를 하는 것 같으면 알아서 자리를 피해 주면 안 돼요? 네? 대체 몇 번이나 말씀을 드려야 하는지, 쯧.”

“…….”

본래 방 청소는 주인이 자리를 비웠을 때 하는 게 원칙이었다.

이곳이 나디아의 방이 아닌 카레인의 방이었다면 앰버는 감히 발을 들일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뒷배 없는 서녀 따위 두렵지 않다는 거겠지.’

가주인 아버지는 원체 집안일에 무심하다.

안주인의 몫인 집안일에 관여하면 체면이 깎인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그러니 제게 깍듯하게 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특히나 카레인의 경우 이복언니에게 무례하게 구는 하녀들을 특별히 잘 챙겨 주곤 했으니, 더더욱 그녀에게 잘 대해 줄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대다수의 하녀들은 딱한 그녀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겨 지켜야 할 선은 지키는 편이었다.

앰버 같은 천둥벌거숭이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 저 애…… 가면무도회 날에 내게 칵테일을 가져다줬던 얼굴이야.’

카레인의 수족이 가져다준 술을 마시고 의식을 잃다니. 우연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공교로운 일이었다.

무례한 하녀를 바라보는 나디아의 눈빛이 차게 가라앉았다.

“뭐, 뭐예요? 그렇게 쳐다보면 어쩔 건데요?”

“…….”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앰버가 흠칫 떨며 표독스레 눈을 떴다.

만만하게 여겼던 첫째 아가씨에게 겁먹은 걸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저 아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나디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생긋 미소 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난 이만 나가 있을게. 청소 열심히 해.”

“아…….”

그러자 한순간 겁먹는 듯했던 앰버의 표정에서 긴장이 풀린다.

그러면 그렇지. 만만한 첫째 아가씨가 화를 낼 리가 없지.

“에휴, 무슨 소리를 하려나 했더니……. 얼른 나가 계세요. 청소가 끝나면 다시 불러 줄 테니.”

앰버가 짧게 안도의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려세웠다.

그 탓에 그녀는 보지 못했다.

제 옆을 스쳐 지나가는 아가씨가 앞치마의 뒷주머니에 반짝이는 무언가를 집어넣는 모습을.

달칵.

방을 나선 나디아는 복도의 창가에 앉아 시간을 죽였다.

이곳은 사람들이 자주 오가는 복도다. 오래 지나지 않아 다른 이가 찾아올 것이다.

“어머, 아가씨? 왜 여기 계신가요?”

아니나 다를까,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복도 끝에서 하녀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마침 그녀에게 전할 말이 있어서 찾아온 것 같았다.

“침실이 청소 중이라 그래.”

“예? 그렇다고 복도에서 기다리실 필요는…….”

“청소 중에는 편히 휴식을 취하지 못하실 거라고, 나가 계시는 게 더 나을 거라고 앰버가 그랬거든. 나는 정말 신경 안 쓰는데…….”

“침실 옆에 거실도 있잖아요.”

나디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냥 내가 있는 게 신경 쓰이나 봐. 어쩔 수 없지.”

“흐음…….”

하녀장의 표정에 의문스러운 기색이 떠오른다.

하녀가 청소를 이유로 주인을 방에서 쫓아내다니.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경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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