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142)

제1화

원수 가문인 발라지트 공작가와 윈터펠 후작가 사이의 혼사.

이 역사적인 혼인을 계기로 두 가문이 화해할 수 있을 것인가?

대다수의 세인들은 그렇노라고 답했다.

서로 친인척이 되었으니 예전의 악감정은 뒤로 밀어 둘 것이라고.

하지만 그들이 이 피로연의 풍경을 볼 수 있었다면 제 생각이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곧장 깨닫게 되리라.

신혼부부의 탄생을 축하하는 파티장. 화기애애해야 할 장소엔 냉랭한 한기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한기의 원인은 바깥 공기도, 얼음덩이도 아닌 한 사람의 인간이었다.

“……신방?”

피로연 내내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던 신랑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단지 두 글자를 내뱉었을 뿐인데도 목소리에서 언짢음이 가득 묻어 나온다.

그가 집사에게 기막히다는 어조로 반문했다.

“방금 신방이라고 했나? 합방을 하라고?”

“예, 이제 결혼식도 올리셨으니 명실상부한 부부…….”

“나더러 날 암살하러 왔을지도 모를 여자와 한 침대를 쓰라는 말이냐?”

“아, 암살이라니요!”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신부가 어깨를 떨며 목소리를 높였다.

곱게 화장한 얼굴이 금세 울상이 된다. 창백하게 질려 가는 안색은 화장으로도 가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조금도 신뢰하지 않는 신랑, 글렌의 시선에선 그저 가증스러울 연기일 뿐이었다.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린 그가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나디아 발라지트, 네게 질문 하나를 하지. 나와의 결혼을 자처한 이유가 뭐냐? 첩자 짓? 혹은 반역 모의 문서를 위조하려고? 우리 가문에 반역죄를 뒤집어씌울 작정이냐?”

“그건…….”

“바른대로 말해라. 여기서 널 보호해 줄 이는 아무도 없어.”

그리 말하는 목소리에는 정말로 살기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겁에 질린 신부의 몸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한다.

한참 눈동자를 굴리며 우물거리던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제, 제가 후작님을 오랫동안 흠모했기 때문에…….”

“헛소리!”

빠득. 이 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더러 그따위 거짓말을 믿으란 말이냐?”

“저, 정말이에요! 믿어 주세요. 후작님을 처음 본 순간 한눈에 반하고 말았답니다.”

신부, 나디아가 처연하게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왈칵 쏟아 낼 것만 같다.

저 여인이 원수의 딸만 아니었다면 깜박 속아 넘어갈 만큼 실감 나는 연기였다. 어쩌면 저리도 가증스러울 수 있는지.

‘틀림없이 제 아비가 시킨 짓이겠지.’

자신을 사랑한다는 헛소리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글렌은 원수의 딸이 공교롭게도 그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말을 믿을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이 모든 건 발라지트 공작이 정적의 영지에 첩자를 심으려는 수작에 불과하다.

공작의 꼭두각시인 왕이 이 결혼을 적극 추진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전에 나와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있었나? 말 한마디 해 보지 않은 사내에게 반해 북부까지 따라왔다는 말을 믿으라고?”

“사랑에 빠지는 데에 이유가 필요한가요?”

“이런 정신 나간…….”

“저는 후작님을 사랑해요! 부디 제 마음을 받아 주세요!”

“…….”

그는 여전히 가련한 척 어깨를 떨고 있는 나디아를 쏘아보며 이를 갈았다.

윈터펠 가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저의가 몹시 의심스러우나, 공작의 친딸인 신부를 거칠게 심문할 수도 없는 일.

지금으로써는 그녀를 해할 수가 없다.

주먹 쥔 손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글렌은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않기 위해 몇 번이고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다.

‘어차피 아군 하나 없는 적지에서 연약한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한정되어 있어.’

특히나 남편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아내라면 더더욱 행동반경이 제한되는 법이다.

그러니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당장 그녀를 내칠 필요는 없다.

원치 않는 아내를 제거하는 건 정적을 상대한 이후에 해도 늦지 않았다.

북부가 독립을 꾀하고 있다는 의심을 피하고, 자체적으로 힘을 기르는 그날까지.

그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좋아. 사랑한다는 거짓말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두고 보지.”

“……!”

당장은 제 존재를 용인하겠다는 말에 나디아의 표정이 밝아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하지만 내 아내로 인정받을 망상 따위 꿈에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내가 발라지트의 딸에게서 후사를 볼 일은 영영 없을 테니.”

“저, 저는 아버지의 첩자가 아니에요! 어떻게 제 진심을 의심하실 수가…….”

이어지는 글렌의 경고에 그녀는 곧장 울상을 지어야 했다.

흐윽, 나디아가 절망한 듯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어 입을 막았다.

하마터면 나도 같은 생각이라고 맞장구칠 뻔했기 때문이다.

‘그 말 꼭 지켜라, 후작놈아.’

그가 아내의 의무랍시고 동침을 요구할 것을 되레 걱정했던 차였다.

그런데 본인이 저렇게 나와 주다니 이쪽에선 쌍수를 들고 환영할 수밖에.

뚜벅, 뚜벅.

구두가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피부를 찌르는 듯한 살기가 멀어진다.

사용인들이 허둥지둥 글렌을 따라나서는 소리까지 귓가에 들려왔다.

아무래도 자리를 떠난 모양이다.

나디아는 상심한 척 고개를 푹 숙인 채 물었다.

“후작님께선…… 가셨니?”

“그, 그것이…….”

하녀들이 서로 안절부절못하며 눈치만 살피기 시작한다.

무언의 기 싸움에서 밀린 하녀 하나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그런 것 같아요.”

야호! 그녀의 마음속 목소리가 환호성을 질렀다.

이렇게 보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 자신과 동침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니 말을 물리지는 못하겠지.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는 것이 이 시대 남자들의 덕목 아닌가?

절대 오지 마라. 난 넓은 침대를 혼자서 쓸 테니까.

* * *

나디아 발라지트가 난데없이 적대 가문에 시집가게 된 경위는 매우 길었다.

얼마나 기냐 하면, 그녀의 1회차 인생까지 돌아가서 설명해야 할 정도로.

공작가 서녀로 태어난 나디아의 인생은 순조롭게 항해를 시작하는 것처럼 보였다.

비록 적통이 아닌 서출 자식이었지만 크게 문제가 되진 않았다.

나디아는 결코 제게 정해진 선을 넘는 법이 없었고, 공작 부인은 남편의 사생아마저 품는 대인배 역할을 연기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비록 비슷한 나이대의 이복동생이 시도 때도 없이 시비를 걸긴 했지만 참을 수 있는 범위 내의 것이었다.

안락한 생활과 약간의 귀찮음을 교환한다고 생각하면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그리고 그녀는 여느 가문의 서녀들이 대개 그러하듯, 성인이 된 이후 정략결혼의 장기말로 사용되었다.

적통 딸을 주기엔 과분하고, 그렇다고 혼인을 맺지 않기엔 아까운 그런 자리로.

약혼식 전날, 이복동생이 찾아와 한껏 비아냥거렸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이계에서 온 용사면 뭐 해? 근본도, 출신도 모를 자인데! 제 고향에서 천출이었을지 알 게 뭐야? 나라면 그런 남자랑 살 맞대고 못 살아.’

그래, 분명 그리 말하며 저를 조롱했었는데…….

나디아가 실소를 참으며 말했다.

“이제 와서 그 남자가 아까워지기라도 했어? 언제는 천하고 살 맞대기 싫은 남자라면서?”

“입 조심해. 천한 계집은 너겠지.”

나디아의 시선이 향하는 장소엔, 고급 모피를 걸친 금발 여인이 화려한 드레스 자락을 늘어트린 채 우뚝 서 있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얼굴엔 승리감과 우월감이 가득했다.

바로 발라지트 가문의 유일한 적녀이자 이복동생인 카레인이었다.

그녀가 기쁜 얼굴로 한껏 이죽거렸다.

“약혼자를 두고 다른 남자들과 더럽게 놀아난 주제에 잘도 떠드는구나.”

“내게 그딴 누명을 씌울 생각을 해낸 네 머리가 더 더럽지.”

“어머! 목격자가 몇 명인데 아직도 발뺌을 하다니!”

그건 가면무도회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가면무도회의 특성상 다른 연회보다 분위기가 자유스러웠고, 그에 따라 나디아에게 술을 권하는 이들도 많았다.

제 주량도 모르고 그런 자리에 참석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그날 마신 잔의 개수는 분명히 주량의 반에 미치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부터 의식이 끊겼고, 겨우 정신을 차린 후에는 이미 모든 일이 벌어진 상태였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을 때, 나디아는 반쯤 옷을 벗은 채 낯선 남자와 휴게실의 소파 위를 뒹굴고 있었다.

더 최악인 점은 그 광경을 목격한 이들을 수도 없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녀가 약혼한 몸으로 외간 남자와 잠자리를 했다는 소문이 퍼져 나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천리마도 그보다 빠르지는 못했으리라.

‘그 여자의 모친도 공작님을 유혹해서 인생 고쳤잖아요.’

‘남자 없이는 못 사는 거지. 참…… 그 어미에 그 딸이라더니, 쯧쯧.’

‘그나저나 발라지트 공작님은 뭐라고 하던가요? 서출 계집이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으니 맨몸으로 쫓아내도 할 말이 없을 텐데.’

‘너그럽게도 별채에서 근신을 명하기만 했더랍니다.’

‘어머, 자비롭기도 하셔라.’

나디아는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해서 내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할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체면을 중시하는 그로서는 비정한 아비라는 평을 원치 않았던 것뿐이리라.

별채의 침실이 아닌 지하실에 가둬 놓았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너무 허탈하고 황당해서 웃음이 피식 새어 나온다.

그리도 귀히 여기던 명예를 저버리면서까지 이런 짓을 벌일 줄이야.

“대체 이 우스운 각본을 누가 만들어 냈는가 했더니…… 역시 너와 아버지였구나, 카레인.”

“나와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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